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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괴산 각연사(槐山 覺淵寺)

노촌魯村 2017. 6. 11. 22:08


보개산寶蓋山 각연사覺淵寺 일주문








괴산 각연사 대웅전(槐山 覺淵寺 大雄殿.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6호. 충북 괴산군 칠성면 각연길 451 (태성리) )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재위 514∼540) 때 유일이 세운 절로 지었을 당시의 설화에 의하면 현재의 칠성면 근처에 자리를 잡고 공사를 시작했는데, 갑자기 까마귀 떼가 나타나서 대패밥과 나무 부스러기를 물고 날아가 작은 연못에 떨어뜨렸다고 한다. 유일이 물 속을 들여다보니 불상 하나가 있었음으로 깨달음을 얻어 못을 메우고 절을 지어서 각연사라 하였다 한다.
고려 전기에 통일이 다시 지었으며, 혜종(재위 943∼945) 때 수리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각연사 대웅전은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으로 절의 중앙에 위치한다. 네모난 돌로 쌓은 기단 위에 정방향으로 놓여 있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1층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의 건물이다. 앞면 3칸에는 모두 빗살문을 달아 출입하게 하였고, 옆면 앞쪽에도 빗살문을 달았다. 내부에는 원형이 잘 남아있는 장엄한 닫집이 있고, 불상이 모셔져 있다.
각연사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어 당시의 건축기법을 잘 살필 수 있는 건물이다. (출처 : 문화재청)



괴산 각연사 대웅전(槐山 覺淵寺 大雄殿) 내부(지장보살.석가여래.관세음보살)

통일대사





삼성각(三聖閣)

칠성탱화

산신탱화

나반존자

 

 


각연사 맷돌

보리자나무(학명 : Tilia miqueliana Maxim)

각 지역의 사찰에 더러 심어져 있으며 사찰에서는 보리수나무한다.  열매를 보리자라고 하는데 염주를 만드는데 쓴다.

 


 


괴산 각연사 비로전(槐山 覺淵寺 毘盧殿.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25호. 충북 괴산군 칠성면 각연길 451 (태성리))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법당으로 이곳에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433호)을 모시고 있다.
낮은 기단 위에 정남향을 바라보고 있으며, 주춧돌은 신라시대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올렸으며, 기둥은 가운데만 약간 굵게 하였다.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기둥 위에서 지붕 처마를 받치는 공포가 기둥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의 건물이다.
각연사 비로전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전체적으로 단아하며, 당시의 건축기법을 잘 보이고 있다.(출처:문화재청)





괴산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槐山 覺淵寺 石造毘盧遮那佛坐像.보물  제433호.충북 괴산군 칠성면 각연길 451, 각연사 (태성리))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모두 갖춰진 완전한 형태의 불상으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닌 비로자나불을 표현한 것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의 상투 모양 머리(육계)는 펑퍼짐하여 구분하기 어렵다.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에는 옷주름이 간략하게 표현되었는데, 특히 다리부분의 옷주름이 극단적으로 형식화되었다. 이런 표현은 얼굴모습과 함께 장곡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174호)과 직결되는 것이다.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손모양은 매우 어색한데, 이것은 왼쪽에만 걸쳐 입은 옷과 함께 불상의 오른쪽을 더욱 허술하게 만들고 있다.
불상의 광배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구분하듯 가운데가 잘록하게 들어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물방울 모양이다. 광배를 살펴보면 불상의 머리 위쪽과 불상 양쪽으로 각각 3구의 작은 부처가 새겨져 있고, 안쪽에서부터 연꽃무늬와 구름무늬가 새겨졌으며,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신라 전성기의 전형적인 불상처럼 긴장된 활력과 세련된 기교는 나타나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단아하면서도 화려해진 모습을 보이는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이다.(출처:문화재청)

 







 

꽃으로 꾸며진 각연사 풍경

 












 


괴산 각연사 석조귀부(槐山 覺淵寺 石造龜趺.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12호. 충북 괴산군 칠성면 태성리 35번지)

각연사는 신라 법흥왕 때 유일대사가 세웠다고 하나, 〈각연사대웅전상량문〉에 의하면 신라 경순왕 때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비로전 대들보에서 발견된 묵서에는 고려 혜종(943∼945)년간에 중수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 석조귀부는 남북 기준방향에서 북서∼남동 방향으로 30˚ 가량 틀어져 있다. 현재 비신(碑身)과 이수(이首)는 결실되었고 귀부(龜趺)만 남아 있다.
귀부는 받침석과 한 돌로 조각되었으며 받침석의 평면형태는 방형이다. 4개의 다리는 힘차고 생동감있게 묘사되었고 발톱은 날카롭다. 등면의 귀갑문은 좌우 대칭으로 표현되었는데 4각형과 6각형의 변형된 형태이다. 귀갑문 안에는 타원형이 변형된 꽃무늬를 장식하였다. 목과 귀두는 따로 만들어 끼우도록 한 것이나 지금은 유실되었다. 목과 등이 연결되는 부분에는 연꽃무늬 모양을 조식하였다. 비좌(碑座)는 장방형으로 화려한 구름무늬와 안상(眼象)을 표현하였으며, 괴임을 조출하였다.
이 석조귀부는 힘차고 생동감 넘치는 신체와 귀갑문의 형태 및 귀갑문 안의 꽃무늬, 비좌의 구름무늬와 안상, 귀두를 따로 만들어 끼운 조각수법 등으로 미루어 조성시기는 고려전기로 추정된다.
각연사 석조귀부는 비신이 유실되어 비문의 내용을 알 수 없어 선사의 탑비인지 사적비인지 그 성격을 파악할 수 없으나, 귀부의 각부 조각기법이 우수한 수작으로 가치가 있다.(출처:문화재청)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비(槐山 覺淵寺 通一大師塔碑.보물  제1295호.충북 괴산군 칠성면 각연길 451 (태성리))

고려 전기의 승려인 통일대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비로, 각연사 동남쪽의 보개산 계곡을 따라 1㎞쯤 떨어진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통일대사는 고려 전기에 중국유학을 다녀온 이로, 그가 왕실에서 불교의 교리를 강의하자 각지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대사가 입적하자 광종은 ‘통일대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당대의 문장가였던 김정언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다.
돌로 쌓은 축대 위에 세워져 있는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구조이다. 거북받침돌은 등에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았으며, 거북머리는 용의 머리로 바뀌어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로 오면서 나타나게 되는 양식상의 특징이다. 비몸에 새겨진 글씨는 해서체인데, 원래 새겨진 3,500자 가운데 현재는 대부분이 깍여 260자 정도만이 드문드문 보이고 있다. 머릿돌의 네 면에는 4마리의 용을 웅장하게 새겨 놓았는데, 그 용들이 머리를 들어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인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받도록 하였다.
원래의 자리에서 원래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몇 안되는 석비중의 하나로, 고려 광조 9년(958)에 건립되었다. 받침돌에 새긴 거북머리의 양식상 변화나 각 부분에 새긴 조각수법은 당시 석비의 우수함을 잘 보여준다.(출처:문화재청)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槐山 覺淵寺 通一大師塔.보물  제1370호.충북 괴산군 칠성면 각연길 451 (태성리))

각연사는 칠보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사찰로부터 동남쪽 약 1km 지점에 통일대사탑비가 있고, 이로부터 동남쪽에 있는 보개산 주봉을 향해 약 30분 정도 올라가면 중봉의 능선상에 탑이 건립되어 있다. 탑은 본래 무너져 있던 것이 1965년 발견되었고, 흩어진 부재를 모으고, 찾아내어 1982년 6월에서 7월 12일에 걸쳐 괴산군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탑은 기단부·탑신부·상륜부를 구비한 전형적인 팔각원당형 석조탑으로 전체 높이는 2.3m이다. 기단부는 지대석·하대석·중대석·상대석으로 구성되었는데, 전체 부재는 완전하다. 지대석과 하대 하단석은 1석으로 조성되었다. 지대석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고, 하단석의 측면에는 좌·우각 4괄호형인 안상을 1구씩 배치했다. 하대 상단석과 중대석 받침 역시 1석으로 조성되었다. 상단석에는 복엽16판의 복연이 조식되었는데, 8각의 각 면과 모서리에 각각 1구씩 배치하였다. 판단에는 귀꽃이 조식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모두 파손되어 흔적만 남기고 있다. 상면에는 각형 1단의 받침 위에 굽형괴임대를 받침으로 삼아 중대석을 놓았다. 중대석은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각 모서리에 우주만을 모각하였다. 상대석 역시 1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하면에는 각형 3단의 받침을, 측면에는 단판 복엽 16판의 앙연을 배치했다. 연화문은 8면의 중앙과 모서리에 각각 8판씩 배치하여 하대 상단석과 같은 양식을 보이고 있다. 상면에는 낮은 각형 1단의 받침을 조출해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을 각각 1석으로 조성했다. 탑신석의 각 모서리에는 우주를 모각했고, 전·후면에는 이중의 선으로 장방형 액을 마련하고 내부에 문양을 새긴 문비형을 모각했다. 옥개석의 하면에는 각형 3단의 받침을 조출하고, 처마의 하면에는 각 모서리에 1판씩 나머지 면에 3판씩 모두 복엽 32판의 앙연을 조식했다. 낙수면의 경사가 급하고 처마는 두껍게 조성되었는데, 기왓골은 두툼하게 묘사되었다. 전각에는 귀꽃을 배치했는데, 현재 4개소는 결실되었고, 나머지 4면에는 접착제로 부착했다. 정상에는 단엽 16판의 연화문이 조식된 복련대(伏蓮帶)가 마련되었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어 노반만 남아있는데, 옥개석과 1석으로 조성되었다. 측면에는 단엽 16판의 앙연이 입상형(立狀形)으로 조식되었고 정상에는 찰주공이 남아있다.
각연사 통일대사탑은 각부의 조각 수법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무너져 있던 것을 복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각 부를 구성하는 부재 또한 완전하다.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팔각원당형 석조탑의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으며 양식적으로도 고려 전기 석조탑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통일대사탑비가 958년-960년(고려 광종9년8월 -11년3월) 사이에 건립되었고, 이 탑의 주인공이 통일대사임이 입증된 점으로 보아 탑비와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절대 다수의 석조탑는 사찰의 한쪽 한적한 곳에 자리하고 있고, 탑비 역시 인근에 위치하는 것이 통식이다. 그런데 이 탑은 탑비와 멀리 떨어진 산 중턱에 건립되어 있어 위치상의 색다른 면을 보이고 있다. 더욱이 탑이 있는 곳에서는 사찰로 들어오는 진입로뿐만 아니라 각연사까지 조망되고 있어 다른 탑과는 확연히 다른 입지(立地)를 택하고 있다. 이같이 탑의 위치를 탑비와 멀리 떨어진 산 중턱에 건립한 예는 쌍계사 승탑, 보현사 낭원대사탑, 봉암사 정진대사탑 등 소수의 예에서만 볼 수 있다. 따라서 주변 및 사찰을 조망하기에 좋은 지점에 탑을 건립함은 9세기이래 산천비보사상에 의해 산 정상부에 석탑을 건립하는 것과 같은 사상적 배경을 지닌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 문화재청)

괴산 각연사 석조귀부에서  괴산 각연사 통일대사탑비 가는 길 중간 쯤에 있는 승탑2기




작은 승탑에는 "선적당탑善跡堂塔" 명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