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왕흥사지에서 국내 최고(最古)의 치미 출토
부여 왕흥사지에서 국내 최고(最古)의 치미 출토 - 동승방건물에 올린 6세기 백제 치미 공개 - |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배병선)는 2013~2014년 충남 부여군 규암면 소재 왕흥사지(사적 제427호)에 대한 발굴조사 때 출토됐던 백제 치미를 복원하여 3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처음으로 공개한다.
* 치미(鴟尾): 동아시아 전통건축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지붕의 장식기와로, 건물의 용마루 양 끝에 올려 건물의 위엄을 높이고, 귀신을 쫓는 역할을 하는 부재
부여 왕흥사지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지난 2000년부터 총 15차에 걸쳐 학술발굴조사를 하고 있는 유적으로, 특히 2007년에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사리장엄구(보물 제1767호)가 나와 큰 주목을 받았던 절터이다.
* 사리장엄(舍利莊嚴): 사리를 담는 그릇인 사리기(舍利器), 사리기 등을 넣는 사리감(舍利龕), 사리기와 함께 봉안되는 각종 공양품 등을 아울러 이름
장식된 막새문양과 발굴된 다른 유물을 비교해 볼 때 이번에 공개되는 치미는 왕흥사 창건 당시(577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되며, 부소산 폐사지 치미, 미륵사지 치미 등 현재까지 알려진 고대 치미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백제 사비기의 기와 제작기술과 건축기술, 건축양식 등에 대한 종합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귀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출토된 치미는 전체를 한 몸으로 제작한 후, 상․하로 나누어 가마에서 구워낸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 승방터로 판단되는 건물지의 남북 양끝에서 각 1점씩 출토되었는데, 고대 건물지에서 용마루 좌우의 치미 1벌(2점)이 함께 출토된 사례는 처음이다. 건물 지붕에서 떨어지면서 파손된 채 오랜 기간 땅에 묻혀있어 파편들도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 승방(僧房): 사찰 승려들이 거주하는 곳
이에 남쪽 치미는 상부만, 북쪽 치미는 하부만 복원했으며, 3차원 입체영상(3D) 기술을 활용해 상하부 전체를 복원한 이미지도 만들었다. 이렇게 복원된 3D 영상 속 치미의 높이는 123㎝, 최대너비 74㎝로, 중국의 남조척(1자=24.5㎝ 전후)을 적용하면 5자 정도 높이에, 너비는 3자에 해당된다.
왕흥사지 치미는 마름모꼴의 꽃장식인 연화문(蓮花紋), 구름문, 초화문(草花紋) 등의 문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고, 전체적으로는 꼬리 부분을 하늘로 향해 날카롭게 표현하여 마치 새가 꼬리를 세워 비상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여기서 단순할 수도 있는 지붕장식을 화려함과 위엄을 갖춘 예술품으로 승화시킨 백제 최고 수준의 장인 정신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사찰의 금당 혹은 강당 등 중요 건물에만 치미가 사용되었을 것으로 알려진 사례와 달리, 승려들이 사용하는 승방 건물에까지 치미가 쓰였다는 점은 당시 승려들의 높은 지위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로도 주목된다.
출토된 치미는 2016년 11월 3일 오후 1시 30분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진행되는 ‘6∼7세기 백제ㆍ신라 기와의 대외교류’ 학술대회에서 관계전문가들과 일반에 한 차례 공개되며, 오는 29일부터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세계유산 백제’에 출품되어 전시될 예정이다.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扶餘 王興寺址 舍利器 一括.보물 제1767호. 충청남도 부여군 충절로2316번길 34 (규암면,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은 목탑지의 심초석 남쪽 중앙 끝단에 마련된 장방형 사리공 내부에서 발견되었다.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가장 바깥에 청동제의 원통형 사리합을 두고 그 안에 은으로 만든 사리호, 그리고 보다 작은 금제 사리병을 중첩하여 안치한 3중의 봉안 방식을 취하였다.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가장 귀한 재질인 금, 은, 동을 순서대로 사용한 백제 사리장엄의 면모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우선 청동제사리합은 바닥이 납작한 원통형 몸체의 위, 아래로 두 줄의 음각선을 둘렀고 사리함 뚜껑에도 두 줄씩 음각선을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 넣었다. 뚜껑 중앙에 솟아 있었던 연봉형의 손잡이는 부러진 채 발견되었는데, 현재 복원되어 있다. 청동 합 안에 넣었던 은제사리호는 직립된 긴 목 아래로 둥근 몸체와 낮은 굽을 지닌 호의 모습을 하였다. 목 부분에 접합한 흔적이 보이는 것은 금제 사리병을 안치하기 위해 상부와 하부를 따로 만들어서 나중에 접합한 것으로 추측된다. 불룩하게 솟은 뚜껑 중앙의 연봉형 손잡이가 있고 그 주위에 연잎을 유려하게 새겼다.
특히 몸체의 안쪽 바닥에는 별도의 받침대가 있는데, 은제사리호 내부에 안치되는 금제사리병이 움직이지 않도록 계획된 것이다. 가장 안쪽의 굽 달린 금제 사리병은 아래쪽으로 갈수록 볼록해지는 호리병 형태로서 가장자리에는 음각선이 한 줄 새겨져 있다. 뚜껑 가운데로 보주형의 손잡이가 솟아있으며 역시 그 주위에 6엽의 연잎을 새겼다.
청동제사리합에는 6행 29자의 명문이 확인된다.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神化爲三” 즉, “정유년(丁酉年, 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百濟王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가 장시(葬時)에 신(神)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명문은 사찰(刹)의 건립시기, 사리기의 제작시기 등을 알려주고, 더불어 사찰의 건립 배경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부여 왕흥사지 사리기 일괄’은 현재까지 확인된 국내 사리기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사리장엄구로 가치가 높다.
<글.사진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