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충남

부여 무량사(扶餘 無量寺)

노촌魯村 2012. 3. 4. 20:17


 

 

 

 

 

 만수산 무량사 일주문

 

 

만수산 무량사 일주문 뒷편 

  만수산 무량사 천왕문

 

 

무량사 당간지주

               

 






 

 

 

 

부여 무량사 석등(扶餘 無量寺 石燈.보물 제233호)

무량사 법당 앞뜰에 세워져 있는 8각 석등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네모난 바닥돌 위로 3단의 받침돌을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아래받침돌은 연꽃 8잎이 조각되어 있고, 가운데받침은 기둥으로 길게 세워져있으며 그 위로 연꽃이 새겨진 윗받침돌이 놓여 있다. 화사석은 8면 중 4면은 넓고, 4면은 좁은 형태로, 넓은 4면에 창이 뚫려 있다. 지붕돌은 여덟 귀퉁이의 치켜올림과 처마의 경사가 잘 어울려 경쾌한 모습을 보여 주며, 꼭대기에는 자그만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 전체적으로 지붕돌이 약간 큰 감이 있으나 경쾌한 곡선으로 인해 무거움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래·위받침돌의 연꽃조각은 통일신라 전성기의 화려한 연꽃무늬와는 차이가 있고, 각 부분이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만들어진 시기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 사이인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자료)

 

부여 무량사 오층석탑 (扶餘 無量寺 五層石塔.보물 제185호)

무량사 극락전 앞에 자리하고 있는 웅장한 모습의 5층 석탑이다. 탑을 받치는 기단(基壇)은 1단으로, 둥글게 다듬은 두툼한 석재를 포함한 층단으로 괴임을 만들고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을 세웠다. 탑신(塔身)은 지붕돌과 몸돌을 한 층으로 하여 5층을 이루고 있다.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있는 몸돌은 지붕돌에 비하여 높이가 낮은 편이나 전체적으로 알맞은 비례를 보이고 있어 우아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준다. 지붕돌은 얇고 넓으며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지붕돌과 밑의 받침은 딴 돌로 구성되어 있고 받침의 수는 위로 올라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탑의 꼭대기에는 낮은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의 일부가 남아있다. 백제와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조화시켜 만든 고려 전기의 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백제의 옛 땅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백제의 기법이 이어졌고 통일신라의 시대적인 양식도 계승되었다. 해체공사를 할 때 탑신의 1층 몸돌에서 금동제 아미타여래좌상, 지장보살상, 관음보살상의 삼존상이 나왔고, 3층에서는 금동보살상, 5층에서는 사리구(舍利具)가 발견되기도 하였다.(문화재청 자료)

 




 

 

 

 

 

무량사오층석탑출토유물 (無量寺五層石塔出土遺物.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00호)

1971년 무량사 오층석탑(보물 제185호)에 대한 해체·복원 작업중 발견된 9점의 유물이다. 석탑 1층 몸돌에서 아미타불좌상을 주존으로 한 금동제 삼존불이 나왔고, 3층 몸돌에서도 금동보살좌상 1구가 발견되었다. 5층 몸돌에서는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금동제 삼존불의 본존인 아미타좌상은 높이 33.5㎝로, 얼굴을 앞으로 수그린 자세에 오른손은 어깨 앞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도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다. 관음보살좌상은 아미타불의 좌측에 있으며, 아미타불과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높이는 25.9㎝로 3개의 산모양 관 중앙에 부처가 새겨 있고, 늘어진 목걸이 장식이 화려하다. 손모양은 같으나 방향이 다르다. 지장보살좌상은 높이 26㎝로 관음보살과 모습은 같으나 삼산관이 없고 손모양이 반대이다. 3층 몸돌내에서 발견된 금동보살좌상은 높이 35.2㎝로, 관과 두 손이 파손되었다. 5층 몸돌에는 청동 외합과 내합이 들어있는 사리구가 발견되었다. 내합 안에는 수정으로 된 작은 병, 다라니경, 자단나무와 방분향으로 가득 차 있다. 수정병 안에는 청색 사리가 1개 들어 있었다. (문화재청 자료)

 

부여 무량사 극락전 (扶餘 無量寺 極樂殿.보물 제356호)

무량사는 신라 말에 범일이 세워 여러 차례 공사를 거쳤으나 자세한 연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신라말 고승 무염대사가 일시 머물렀고, 고려시대에 크게 다시 지었으며, 김시습이 이 절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흔치않는 2층 불전으로 무량사의 중심 건물이다. 외관상으로는 2층이지만 내부에서는 아래·위층이 구분되지 않고 하나로 트여 있다. 아래층 평면은 앞면 5칸·옆면 4칸으로 기둥 사이를 나누어 놓았는데 기둥은 매우 높은 것을 사용하였다. 위층은 아래층에 세운 높은기둥이 그대로 연장되어 4면의 벽면기둥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는 그 얼마되지 않는 낮은 벽면에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창문을 설치했었는데 지금은 나무판 벽으로 막아놓았다. 아미타여래삼존상을 모시고 있는 이 불전은 조선 중기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낸 불교 건축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우수한 건물이다. (문화재청 자료)



 

 

 

 

 

 

 

   

극락전 문

 

 

     

무량사 극락전 천장


부여무량사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扶餘無量寺塑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보물 제1565호)

부여 무량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중층전각으로 이루어진 극락전의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는데, 17세기 대규모 사찰에서 널리 조성되었던 대형의 소조 불상 양식을 따르고 있다. 이 삼존상은 아미타·관음·대세지라는 분명한 아미타삼존 도상을 보여주고 있고, 이미 발견된 복장발원문을 통해 현진(玄眞)이라는 조각승과 1633년이라는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어 조선후기 조각사 연구는 물론 조각 유파 연구에도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거대한 규모로 조성되었기 때문에 불신의 전체적인 모습이 도식적으로 단순화된 감이 있으나 양대 전란 이후 자존심과 자신감을 회복하고자 노력했던 당시 불교계의 저력을 느낄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7세기 전반기 대형불상에서 삼신 또는 삼세불상이 결합된 삼존형식이 대부분인 가운데, 극락전의 주존으로 아미타·관음·대세지보살이 결합한 삼존도상의 드문 예로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 (문화재청 자료)

 

무량사미륵불괘불탱 (無量寺彌勒佛掛佛幀.보물 제1265호)

미래불인 미륵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 여덟구씩의 화불을 그린 괘불인데, 괘불이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진행할 때 예배를 드리는 대상으로 법당 앞 뜰에 걸어놓았던 대형 불교그림을 말한다. 미륵불은 두 손으로 용화수 나뭇가지를 받쳐들고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쓰고 서 있다. 보관의 끝에는 6구의 불상이 있고 그 사이로는 동자(童子)와 동녀(童女) 등 59구의 얼굴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다. 네모난 얼굴에는 눈과 속눈썹, 도톰한 입술, 콧수염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고 옷에는 화려한 장식들이 달려있다. 머리광배와 몸광배가 그려져 있고 몸광배에는 연꽃과 모란 등의 무늬가 있다. 머리광배와 몸광배 밖으로는 오색의 구름과 함께 배치된 작은 불상들이 마치 미륵불을 수호하고 있는 듯하다. 녹색과 붉은색을 주로 사용하여 화려하게 채색되었으나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모습이다. 조선 인조 5년(1627)에 그려진 이 불화는 5단의 화면을 이어 한 화면을 만든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으며 17세기 전반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근엄하고 당당한 모습과 중후한 형태미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문화재청 자료)

 

 


부여무량사명부전 (扶餘無量寺冥府殿.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89호)

부여 무량사 명부전은 극락전 전면의 동편에 있는 건물로서 지장보살을 모시고 명부의 시왕상(十王像)을 모셨으며 일명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부른다. 건물기단은 자연석을 이용한 낮은 기단에 기둥은 원주를 사용하였으며 좌우 측면 중앙기둥과 후면 평주는 방형 단면이다.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전면 3칸에는 2짝씩의 세 창살문을 달았고 후면은 판장벽으로 처리하고 양측면에 방풍판을 달았다. 1872년 원열화상에 의해 건립되었다고 전하며 건물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무량사 명부전은 19세기 사찰건축물로서 단아하면서도 치졸하지 않으며 화려한 익공양식과 목판재 벽체 등 전통적인 건축양식이 잘 보존되어 오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자료)

 

 

 

김시습영정 (金時習影幀.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4호)

매월당 김시습(1435∼1493) 선생의 초상화이다.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사람이며 조선 전기의 유학과 불교에 능통한 학자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금오신화』를 남겼을 뿐 아니라 그의 저작은 다채롭다고 할 만큼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교·불교 관계의 논문들을 남기고 있으며 15권이 넘는 분량의 한시를 남겼다. 비단에 채색하여 그려 놓은 이 그림은 조선 전기 사대부상 중의 하나로, 선생이 살아 있을 때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슴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야인의 옷차림에 패랭이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옅은 살색으로 맑게 처리하였고, 윤곽선과 눈·코·입 등은 옅은 갈색으로 그렸다. 의복은 옅은 홍색인데 필요한 부분만 약간 짙은 갈색으로 묘사했다. 이로써 얼굴과 의복을 옅은 살색과 그보다 약간 짙은 갈색을 대비시켜 조화있는 화면을 만들었다. 수염은 회색 바탕에 검은 선으로 섬세하게 그려, 당시 초상화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조선 전기의 초상화는 현재 몇 점 밖에 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도 원본을 본 떠 그린 것이거나 덧칠을 한 것이 많은데 이 초상화는 원본 그대로 남아있어 귀중한 작품이다. 그의 저서인『매월당집』에 의하면, 김시습은 생전에 두 점의 자화상을 그렸다고 하는데, 이 그림이 그 자화상인지의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약간 찌푸린 눈매와 꼭 다문 입술, 눈에서 느껴지는 총명한 기운은 그의 내면을 생생하게 전하는 듯하여 초상화의 진수를 보여준다.(문화재청 자료) 

 

 

무량사 영산전

건물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장방형평면을 하고 있다. 가구는 5량가로 대들보, 종보를 동자주를 사용하여 결구하는 간략한 방식이다. 기단은 막돌을 6단 쌓은 위에 축조하였는데 자연석을 덤벙주초 방식으로 사용하였다. 기둥은 모두 원형단면의 것이나 좌측면에는 방형단면, 우측면에는 원형단면의 것을 사용하였는데 크기는 다른 기둥에 비하여 매우 적다. 기둥 위에는 초익공을 사용하였는데 앙서 끝에 연화로 장식하였으며 보머리는 봉황두를 끼워놓았다. 벽면은 정면 어칸의 2짝 세살창을 제외하고는 모두 판장벽으로 마감하였다.
내부에는 뒷벽체에 붙여 ‘ㄱ자형 불단을 마련하여 석가여래, 10대제자 중 대가섭(大迦葉)과 아나진(阿那律)을 협시하고 오백나한을 함께 봉안하였다. 천장은 연등천장방식으로 처리하였다. 지붕은 정면 겹처마, 후면 홑처마 형식으로 정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부속건물 성격에 맞도록 맞배지붕으로 마감하고 측면에는 풍판을 두었다. 익공의 장식화된 형태로 보아 1872년 비구니 원열화상(元悅和尙)이 명부전과 함께 창건하였다는 기록과 일치하는 19세기의 건물이다.

 

 

 

 

무량사 영산전 앞 석등

무량사 삼성각

칠성탱화

산신탱화

나반존자

 

 

   

무량사 옛 사진('대구근대역사관' "백년 전 그곳을 거닐다"의 전시 사진 중에서)

 

매월당 시비

     

 

半輪新月上林梢(반륜신월상림초)

 새로 돋은 반달이 나뭇가지 위에 뜨니,
山寺昏鐘第一鼓(산사혼종제일고)

산사의 저녁종이 가장 먼저 울리네.

 

淸影漸移風露下(청영점이풍로하)

 달 그림자 아른아른 찬이슬에 젖는데,
庭凉氣透窓凹(일정량기투창요)

 뜰에 찬 서늘한 기운 창 틈으로 스미네.

 

위의 모든 그림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그림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