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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의성

고운사(孤雲寺)

노촌魯村 2012. 10. 9. 12:49

고운사(孤雲寺.대한불교조계종제16교구본사.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116) 

고운사(孤雲寺)는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등운산(騰雲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 이 지역의 대표적 고찰이다. 오랜 사찰의 역사에서 느낄 수 있는 고풍스러움과 함께 등운산의 절경은 이 곳을 참배하는 이들에게 많은 감명을 던져주고 있다. 특히 절에 이르는 500여 m의 진입로는 빽빽한 송림이 좌우에 펼쳐져 있어 ‘솔굴’로 불릴 정도로 유명하다. 또한 고운사는 풍수를 아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연꽃이 반쯤 피어있는 형상인 이른바 부용반개(芙蓉半開)의 터로 영남 지역 일원에서는 최고의 명당터 가운데 하나로 소문나 있는 것이다. 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의 고승 의상 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운사 관련 각종 자료에서는 예외 없이 의상 창건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의상 관련 자료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찾아볼 수 없어 역사적 사실 여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할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 밝혀진 고운사의 창건과 관련한 가장 오랜 기록은 1729년(영조 5) 신유한(申維翰, 1681~?)이 지은 「고운사사적비」라는 자료이다.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로 알려진 그는 1728년 「운수암기」를 지은 데 이어 고운사사적비도 지었는데, 이 자료에서 다음과 같이 고운사의 역사를 밝혀놓고 있다.

'신라의 의상 조사께서 자리를 잡은 이후 이 사찰을 개창하였다. 고려 건국 초에는 운주화상(雲住和尙)이 계속해서 이곳을 중수하였으며, 송나라 천우선사(天祐禪師)가 더욱 새롭게 정비하였다. 또한 도선 스님이 발원하여 석조 약사여래불을 봉안하였으며, 다층의 부도도 봉안하였다.'

위의 내용은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고운사 역사의 큰 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쉽게도 신유한이 어떠한 자료를 근거로 하여 이 사적기를 찬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까지 전해지고 있던 사중의 기록이나 인식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된다. 그런데 위의 자료에서는 현 고운사의 절 이름과 관련한 내용, 즉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과의 관계는 밝혀져 있지 않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후대의 자료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먼저 1918년 오시온(吳始溫)이 지은 「고운사사적비」의 다음 내용을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당 의봉(儀鳳) 원년에 의상 국사께서 왕의 명을 받들어 여러 사찰들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등운산은 소문현의 북쪽에서 가장 웅장하고 봉우리와 계곡이 지극히 아름답다.”는 말을 하고, 신문왕 원년 신사년(辛巳年, 681년)에 고운사(高雲寺)를 창건하였다. 이어서 최문창공(崔文昌公, 최치원)이 여지(如智)․여사(如事) 두 분 스님과 함께 가운루와 우화루를 세웠으며, 사찰 이름도 고운사(孤雲寺)로 바꾸게 되었다.'

오시원의 사적비에서는 681년이라는 고운사 창건 연도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아울러 신라 하대의 대학자인 최치원과의 관계, 특히 그의 호를 따서 사찰 한자 표기를 바꾸게 되었다는 내용을 수록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1728년의 사적비에 없던 내용이 1918년의 사적비에 와서 이렇게 수록된 경위에 대해서는 정확한 내용을 밝히기 어렵다. 다만 문소현(聞韶縣, 의성군)의 읍지(邑誌) 자료에서 이와 유사한 내용이 보이는데, 이것으로 미루어본다면 1918년 사적비의 최치원 관련 내용은 지역 전승 자료를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볼 때, 고운사는 신라시대 창건설이 유력하게 전승되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81년의 의상 스님 창건설에 이은 9세기 후반 무렵의 최치원에 의한 중창설이 그것인데, 비록 조선 후기에 편찬된 자료들에 의한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고운사의 신라시대 창건설은 비교적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현존하는 고운사 석조 여래좌상(보물 제246호)은 9세기에 조성된 불상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으므로 최치원과의 상관성도 매우 높아 보인다. 아울러 의상의 화엄 사상을 높이 평가했던 최치원의 태도로 보아 의상에서 최치원으로 이어지는 고운사의 역사는 신라 화엄사상사 전체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고운사의 창건과 역사를 알게 하여주는 자료는 대부분 조선 후기에 편찬된 것들이다. 이들 자료는 거의 '경북오본산고금기요(慶北五本山古今記要)'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 자료는 강유문(姜裕文)이 1937년에 편찬하였다.(출처 : 대한불교진흥원-한국의불교문화-한국의 사찰-고운사(孤雲寺) 자료)

천왕문

신라시대 거찰(巨刹) 고운사(孤雲寺)

붉은 돌이 많다는 단촌면 구계리 116번지에 위치한 사찰이다. 신라 신문왕 원년 화엄종주 의상조사[義湘祖師]가 등운산 아래 창건하여 고운사[高雲寺]라 하였다. 그후 신라의 대유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여지[如智], 여사[如事] 두 대사[大師]와 같이 가운[駕雲], 우화[羽化] 2개의 루[樓]를 건립하니 그의 호를 따 고운사[孤雲寺]라 하게 되었다. 신라 헌강왕때 선각국사[先覺國師]가 석조약사여래불상[石造藥師如來佛像]과 5층탑을 조성하였으며, 고려 태조 무신년에 운왕 조통대사[雲往 照通大師]가 중건하였으나, 현종 무오년에 화재로 불에 타 버렸다. 그후 천우대사[天祐大師]가 대웅전[大雄殿], 약사전[藥師殿], 극락전[極樂殿], 적묵당[寂默堂], 설선당[說禪堂], 동별실[東別室], 서별실[西別室], 관음전[觀音殿], 사당[舍堂], 백연암[白蓮庵], 회운당[會雲堂], 청풍당[淸風堂], 문수전[文殊殿], 양로당[養老堂] 등 사찰 전반을 새롭게 하였다. 이후 조선 영조 갑자년에 어첩(御牒 : 왕실의 계보를 간략하게 적은 책)연수전[延壽殿]에 봉안하니, 지방사림의 행패를 면하게 되면서 번영하게 되었다. 신라이후 고려에 와서 영주의 부석사 등 화엄종찰이 쇠퇴함에 따라 고운사가 영주, 선산, 김천, 군위, 영천 등 14개 군에 흩어져 있는 사찰종무[寺刹宗務]를 관장하니 암사[庵舍], 전각[殿閣]을 합하여 366간에 달하게 되었다. 고운사의 일제시대 명소로는 당시에 발간된「일광[一光]」이란 잡지에 의하자면 운수암에서 듣는 저녁 종소리[雲水暮綜], 백련암 밝은 가을 달[白蓮秋月], 가운루의 청명한 바람[駕虛淸風], 금당의 옛 탑[金堂古塔], 기장[奇壯]한 연지폭포[蓮池瀑布] 등을 나열하고 있다. 지금은 당시의 개울을 복개하였기로 머리위 흰 구름들은 여전하나 다리앞으로 흐르던 맑은 시냇물을 보기 어렵다.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가 승군의 전방기지로 식량을 비축하고 부상한 승병의 뒷바라지를 하던 사찰이기도 했다. 또한 고운사를 위해 많은 공적을 남긴 수월선사[水月禪思]는 살아있을 때 사리[舍利]가 64개나 나왔다고 한다. 석학[碩學]으로 너무나 이름높은 함홍대사[函弘大師]가 고운사에 있었기 때문에 이곳에 와서 글하는 체 하지 말라는 속설[俗說]이 있을 정도로 불도와 학문의 본원지라 할 만큼 유명한 곳으로, 일제시대 당시엔 수준높은 한시[漢詩]들이 우화루와 가운루 등에 걸려 있었다. 경내 등운교 좌측에 두 개의 비각이 있다. 옥개형[屋蓋形] 지붕이 있는 것은1879년 조성한 함홍당 대선사를 기리는 비각이다. 그 우측에 나란히 있는 비는 수월대선사를 기리는 비[水月大禪師碑]이다. 일제시대에는 전국 31 본산지[本山地]의 하나로 많은 승려와 신도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학원까지 세워 후진을 육성함으로써 사찰의 전성기를 이루기도 하였다. 일제의 탄압 중에도 꾸준히 사찰을 발전시키는데 힘써 가운교[駕雲橋] 및 축대와 난간, 가운루[駕雲樓], 석주[石柱] 등 사찰 전반을 중수하였다.  1927. 1. 13일자 동아일보의 내용처럼 사찰 재산 또한 적지 아니 하였으나, 광복 직후 토지분배와 분규로 각종 건물과 수목들이 수난을 받게 되며 쇠퇴하였다. 1969년 주지의 노력으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로 의성, 안동, 봉화, 영주, 영양 등 5부[五部]를 관장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면모를 갖추었으나, 1970년대 사찰건물 일부가 소실되어 사찰이 전에 비하여 많이 축소되었다. 지금 현재로는 고운사의 말사로 66개의 사찰이 있다. 고운사에는 석조석가여래좌상, 가운루, 삼층석탑, 연수전 등의 지정문화재와 고운사 대웅전으로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68호로 지정되었으나, 그 자리에 대웅전[大雄寶殿]을 신축하게 되면서 이건 문화재자료로서의 자격을 박탈된 나한전[羅漢殿]을 비롯하여 우화루, 극락전을 비롯하여 고불전[古佛殿]안 봉안된 약사불좌상[藥師佛坐像], 우화루에 있는 범종[梵鐘], 대웅보전 서쪽 벽의 1892년 조성한 칠성탱화[七星幀畵], 석가여래좌불상 뒷편의 후불탱화[後佛幀畵] 등이 유존되고 있다. 31본산의 하나이자, 규모와 역사로 보아 한국의 고 거찰[古 巨刹]로 보기에 손색이 없다. 예로부터 간직해 오던 많은 유물 등이 전란 등으로 유실이 되고 파손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기에 사찰 입구의 솔 숲은 자연스러운 모습을 간직하고자 교구 본사로서는 유일하게 사찰 앞에 상가 건물이 없다. 산문[山門]을 들어서 사찰에 이르는 길 또한 포장을 하지 않고 자연을 지키려 마사토만으로 비포장인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나 - 지나쳐 가는 자동차 비산먼지로 그간 다니기 어려웠던 점을 감안 - 산문 오른편으로 0.9km 정도되는 탐방로와 쉼터를 조성하여 두었다. 고도변화가 적당하여, 짧은 거리 등산효과를 볼 수 있다.(출처 : 의성군청)

고불전(오래된 석불을 봉안해놓은 아주 작은 전각으로 그 요철 모양의 구조가 특이하다.)

 

고운사 가운루 (孤雲寺駕雲樓.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1호.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6)

 등운산에 위치한 고운사는 신라 문무왕 원년(681)에 의상대사가 지은 절로서,신라의 최치원이 승려 여지, 여사대사 등과 함께 가운루·우화루를 세우고 이를 기념하여 그의 호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운주와 천우스님이 2차례에 걸쳐 절을 확장하여 지었으며 임진왜란(1592) 때에는 사명대사가 승병의 기지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835년 화재로 소실되어 새로 지었으나 1970년대에 건물 일부가 다시 소실되었다. 고운사 가운루는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의 중층(中層) 누각이다. 내부의 구조물에서 조각솜씨가 다른 부재들이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아 보수공사를 하며 부분적인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문화재청 자료) 

 

우화루 

우화루의 벽화

 우화루 벽화(호랑이 :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호랑이의 눈이 움직임)

 

우화루 벽화 원본(현재 식당 입구에 전시. 사람의 움직임에 따라 호랑이의 눈이 움직임)

종각

대웅보전

고운사삼층석탑(孤雲寺三層石塔.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호. 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산221)

고운사 대웅전 남쪽의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다. 아래층 기단에는 희미한 안상(眼象) 무늬가 보이고, 위층 기단에는 기둥 모양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 급격히 줄어 들고 있으며, 각 층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약한 경사가 흐르는 지붕돌은 네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크지 않고, 밑면에 1층은 4단, 2·3층은 3단의 받침을 각각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돌),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 뒤집혀진 앙화(仰花:활짝 핀 연꽃모양 장식) 등이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석재가 많이 닳아있고 아래층 기단이 특히 심하다.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줄어든 규모나 지붕돌의 조각양식 등에서 시대가 조금 내려간 모습들이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문화재청 자료)

나한전(현재의 대웅보전 자리에 있던 건물.원래의 대웅전)

나한전은 응진전 또는 영산전이라고도 불리우는데 16나한을 봉안하였으며 그 가운데는 석가모니불을 모셔 놓았다. 이 건물은 원래 현 대웅보전 자리에 있던 대웅전으로 조선 중기에 세워졌다. 건물을 이전하면서 16나한을 모셨고 전각의 이름도 바뀌었다. 불상은 우리나라에 보기드문 지불(紙佛)로 매우 원만한 상호를 보여준다

나한전의 내부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義城 孤雲寺 石造如來坐像)이 모셔진 약사전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 (義城 孤雲寺 石造如來坐像.보물 제246호.경북 의성군 단촌면 고운사길 415 (구계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갖추고 있으며, 손상이 거의 없는 완전한 불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고, 네모난 얼굴에 눈·코·입을 작게 표현하였다. 가슴이 발달하고 허리가 잘록하지만, 약간 치켜 올라간 어깨로 인해 불안정한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오른손은 손바닥을 무릎에 대고 손끝이 땅을 가리키고 있는 듯 하나 부서져 있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게 하여 배꼽 앞에 놓았는데 자연스럽지 못하다. 왼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규칙적인 평행의 옷주름이 나타나며, 다리와 팔 등에서는 도식적으로 표현되었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끝이 날카로운 배(舟) 모양이다. 머리광배와 몸광배에는 연꽃과 덩쿨무늬 등을 표현하였고,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대좌는 상·중·하대로 이루어졌는데, 상대석은 연꽃을 위로 떠받드는 모양으로 표현되었다. 8각의 중대석은 모서리를 기둥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하대석은 연꽃잎을 엎어놓은 모양으로 표현되었다. 이 불상은 머리, 얼굴, 신체, 옷주름, 대좌, 광배 등에서 8세기의 불상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9세기의 특징적인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義城 孤雲寺 石造如來坐像)의 대좌 

명부전

 명부전은 사후에 인간이 심판받는 장소를 형상화 한 곳으로 지장보살을 모시고 있으며 염라대왕을 비롯한 열 대왕과 그 권속들이 조성되어 있다. 이 건물은 약 300년 전에 세워진 법당이다. 죽어서 저승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 한다.

 

 

 

 

삼성각 

 

 

고운사 연수전(孤雲寺延壽殿)

고운사 연수전 (孤雲寺延壽殿.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4호.경북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116)  

연수전은 왕실의 계보를 적은 어첩(御牒)을 봉안하기 위해 1744년에 건립되었으며 1887년에 극락전 등 다른 전각들과 함께 중수되었다. 또한 연수전은 평면 형태가 사찰의 여타 전각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으며 사찰 내에 배치된 왕실과 관련된 건물이라는 점이 독특하다.

 

 

 

 

 

 

   

극락전

 

 

 극락전 벽화

만덕당

스님들의 공양장소이며 간혹 회의장소로도 쓰인다. 공양을 짓는 식당과 연결되어 있다.

만덕당의 범종 

무설전

 큰 방 한 개로 이루어진 건물로 수련대회나 기도시 방문객들의 숙소로 사용된다.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최치원 표준 영정(이규선 1938-    .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

최치원 진영(眞影) .조선시대(1793년). 비단에 색. 경주 최씨문중 

최치원 진영(眞影) X선 촬영.조선시대(1793년). 비단에 색. 경주 최씨문중

 

 

신라시대의 학자.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 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출처 : 고운사) 

● 고운사와 최치원

고운사 가운루. : 고운사의 얼굴이라 불릴만큼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누각이 가운루이다.아래로는 계류가 흐르고 뒤로는 산과 구름을 접하는 신선의 세계가 펼쳐진다. 고운사는 의상대사가 681년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현재까지 경북 북부 지방의 중심 가람으로서 전통을 자랑하고, 가람 건축의 짜임새도 뛰어난 곳이다. 의상대사 창건설 말고도 신라말의 대학자인 최치원이 창건했다는 설도 전해져서 더욱 이채롭다. 전설인즉, 고운 최치원이 여지, 여사라는 두 스님과 이 곳에 와서 가허루(駕虛樓)와 우화루(羽化樓)라는 두 누각을 건립하였고, 이 때부터 최치원의 호를 좇아 고운사라고 불리웠다는 것이다. 최치원은 유학자이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의 풍류도를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풍류도란 신라 화랑들과 같이 산천을 찾아 다니며, 심신을 단련하고 자연을 숭상하는 수행법이자 일종의 종교적 행위였다. 당대의 대 지성이요, 풍운아였던 최치원이 언제 죽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는 가야산에서 산신이 되었다는 설이 풍미했을 정도로 신선도나 도교의 성인에 가까웠다. 최치원과 밀접한 인연을 간직한 고운사는 도교적 이미지로 가득한 절이다. 뒷산의 명칭도 뭉게구름을 뜻하는 등운산이고, 최치원이 세웠다는 가허루나 우화루 역시 도교의 신선들이 타고 다니는 비행체들을 뜻한다. 물론 도교 또는 풍류도의 도사가 불교 사찰을 창건했다는 전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단지, 이 땅의 산세가 신선이 노닐만한 선경이라는 점,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지 신라말에 최치원과 관계가 되었기에 형성된 창건 연기가 아닐까. 가허루는 현재 가운루(駕雲樓)로 바뀌었고, 우화루는 우화루(雨華樓)로 이름이 바뀌었다. (출처 : 고운사)

등운산 고운사 법성게 숲 DAUM지도 스카이뷰에서 캡쳐

화엄일승법계도! 법계도 모양 그대로 4000평 부지에 조성한 작은 숲. 그 속에 한 사람이 걸을 만한 길이 나 있다. 가로수 길과는 또 다른 길. 그 숲이 묻는다. ‘너는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