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충남

윤원거 묘비(尹元擧墓碑)

노촌魯村 2017. 9. 24. 22:07


윤원거 묘비(尹元擧墓碑. 공주시 기념물 제19호.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 산 6-1.조선후기)

계룡면 유평리 마을 중앙에 위치한 윤전 사우 뒤쪽에 있는  파평윤씨 종산에는 조선 중기의 학자 용서 윤원거의 묘소와  묘비가 있다.
윤원거는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공부하였으며, 1633년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다. 1635년에는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종사운동을 주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672년 윤원거가 세상을 떠나자 계룡면 유평리에 장사지냈는데, 이때 묘비는 세우지 않았다가 1796년에서야 윤광안이 묘비명을  짓고 조윤형이 글씨를 써 처음으로 묘비를 세웠다.
묘비에는 윤원거가 죽은 지 120여 년이 지나도록 그의 높은  도덕과 절의를 나타내는 기록이 없어 작은 묘비를 세우게  되었다고 쓰여있다. (출처:공주시청)


유명조선(有明朝鮮)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 증이조참판용서윤선생휘원거지배(吏曹參判龍西尹先生諱元擧之配) 증정부인안동권씨지묘(贈貞夫人安東權氏之墓)

유명조선국징사용서선생파평윤공휘원거지묘(有命朝鮮國徵士龍西先生坡平尹公諱元擧之墓) 증정부인연일정씨부하(贈貞夫人延日鄭氏附下) 증정부인광산김씨부하(贈貞夫人光山金氏附下)

 ** 징사(徵士):임금이 불러도 나아가 벼슬하지 않는,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선비

윤원거 묘(尹元擧 墓.공주시 기념물 제19호.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유평리 산6-1)

파평윤씨 묘소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윤전의 아들 윤원거의 묘소이다. 윤원거는 본관이 파평이고 자는 백호, 호는 용서(龍西)이다. 가정에서 학문을 익히고 25살에 김장생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을 전습하였으며, 1635년(인조 13)에 성균관 재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전론을 제기하였으나 아버지인 윤전이 강화도에서 순절하자 재야에 은거,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윤원거 는 윤전과 마찬가지로 유평리에 은거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으나 유언에 따라 유평리에 묘소를 쓰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파평윤씨가 어떻게 유평리에 들어왔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파평윤씨가 오랫도안 세거한 논산시 노성면이 계룡면 남쪽에 있어, 거리상 근접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유평리에 이거한 것으로 보인다.

묘비는 1796년에 세워진 것이며, 전체 높이 224m, 비신 높이 16㎝, 너비 68㎝, 폭 35㎝의 규모이다. 옥개석과 비좌는 오래된 것이지만 비신은 1993년에 새로 세웠다.

윤원거 묘비는 1796년 세워졌으며, 윤광안(尹光顔)이 글을 짓고, 조윤형(曺允亨)이 글을 썼다. 묘비의 뒤편에는 윤원거가 죽은 지 120여 년이 지났으나 윤원거의 높은 도와 절의를 나타내는 기록이 없어 작은 묘비를 세운다고 기록하고 있다. 옆에는 윤원거의 가계와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출처:문화재청)

윤원거尹元擧 : 1633년(인조 11)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35년 성균관재생으로 들어갔다. 이때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묘 종사 운동에 참여하여 반대자들과 논쟁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주전론을 제기하였으나 아버지가 강화도에서 순절한 뒤에는 일절 국사를 논하지 않고 연산과 노성에 은거하면서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이때 윤순거·윤문거·윤선거 등 종형제와 더불어 종약을 제정하고 보인당(輔仁堂)을 다시 일으켜 동재와 서재를 건립하고, 양정재를 지어 강학 활동에도 힘썼다.

1658년(효종 9)부터 학문과 덕행으로 추천되어 공조좌랑·공조정랑·종부시주부·성균관사업·사헌부지평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복제(服制) 예송(禮訟)에서 남인 권시(權諰)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였다가 송시열(宋時烈) 일파의 비난을 받았다.

1661년부터 여러 차례 사헌부장령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670년(현종 11) 세자시강원진선에 임명되었을 때에는 상소를 올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논하였는데, 그 요지는 솔선수범·입지·정심(正心)·면학·휼민(恤民)·근검절약·무사 봉공 등이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이 뛰어나 이수광(李睟光)의 칭찬을 받았다. 가정에서 학문을 익힌 뒤 1625년(인조 3)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과 예학을 배우고 익혔다. 저서에 『용서문집(龍西文集)』이 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윤원거 어머니 해평윤씨(海平尹氏) 묘(첨지중추부사 윤환(尹晥)의 딸. 윤원거 묘 바로 앞쪽에 위치)

유명조선(有明朝鮮) 세자시강필선(世子侍講弼善) 증이조판서충헌윤공휘전지배정부인해평윤씨묘(贈吏曹判書忠憲尹公諱烇之配貞夫人海平尹氏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