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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락당 하립·삼의당 김씨 부부 시비(湛樂堂河립·三宜堂金氏夫婦詩碑)

노촌魯村 2022. 2. 25. 20:16

담락당 하립.삼의당 김씨 부부 시비(湛樂堂 河립 三宜堂 金氏 夫婦詩碑)

담락당 하립·삼의당 김씨 부부 시비(湛樂堂河립·三宜堂金氏夫婦詩碑 전북 진안군 마령면 동촌리 36-1)

담락당湛樂堂과 삼의당三宜堂.  부부夫婦 시인을 기념하는 시비이다.

삼의당(三宜堂) 김씨는 1769년(영조 45) 남원에서 사관 김일손의 11대 손 김인혁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 택호가 삼의당이다. 여성이기에 이름은 전하지 않고 그 택호만 전한다.

조선시대 여성으로서 가장 많은 257편이나 되는 시문을 남겼다.

기록에 의하면 남원시 향교동 처봉마을(현재의 유천마을)에서 출생하여 서당과 향교의 담벽에 몰래 붙어 서서 학도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 한글과 한문을 깨우쳤다 한다.

그녀는 나이 18세에 같은 마을에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난 담락당(湛樂堂) 하립과 결혼했다. 이들 부부는 나이도 같거니와 가문이나 글재주가 비슷하여 주위에서 천상배필天上配匹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고 한다. 설레는 첫날 밤, 열여덟의 신랑신부가 서로 주고받은 시가 전해내려 온다.(출처 : 진안군청)

 

담락당 하립·삼의당 김씨 부부 시비(湛樂堂 河립 三宜堂 金氏 夫婦詩碑) 뒷면

부부는 인륜비롯

만복의 바탕이라

도화시桃禾詩 이 한편을

마음속 새겨보오

왼집안 화목해야

온갖 일 이뤄지리

(담락당 하립 시 ‘초야 창화’ 전문)

 

부부는 백성비롯

군자의 기본이라

공경과 순종함은

오로지 아내의 길

님의 뜻 종신토록

어기지 않으리오

(삼의당 김씨 ‘화답의노래’ 전문)

 

하립 : 본관은 진양(晉陽). 자는 청서(淸瑞), 호는 담락당(湛樂堂)이다.

세종 대 영의정을 지낸 경재(敬齋) 하연(河演)이 12대조이고 명종 대 8대 문장가 중 한 명이었던 청천(菁川) 하응림(河應臨)이 7대조이고 증조할아버지는 하경윤(河慶潤)이고 할아버지는 하한징(河漢澄)이고 아버지는 하경천(河經天)이다.

부인은 삼의당(三宜堂) 김씨이다.

하립(河氵昱)[1769~1830] 은 남원 서봉방(捿鳯坊)에서 태어났다.

이름 ‘립’은 삼수 변(氵)에 욱(昱)자를 몸으로 한 글자로, 자전에 없는 조자(造字)이다.

하씨 문중 전래에 의하면, 이는 ‘三日立’ 곧 ‘셋째 너만은 입신양명하라’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하립은 1786년 18세 되던 해에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동네에서 출생한 비슷한 몰락 양반 가문의 후손 김인혁(金仁赫)의 딸 삼의당 김씨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에 오랜 시간 집을 떠나 산사나 한양 등지에서 과거 공부에 매진하였다.

1788년에서 1796년까지 8년간은 한양에서 면학하였는데, 당시 1만 여 권의 장서가이면서 순조 대 영의정,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두실(斗室) 심상규(沈象奎)의 집에서 유숙하였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박학다문의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과거 시험에 실패하고 귀향하여 부모를 시봉하였다. 가난한 가세를 일으키고자 1801년 12월에 전라북도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로 이주하여 삼의당 김씨와 부부 시인으로 해로하였다.

문집으로는 『담락당집』이 있는데 이 중 시집인 『담락당운집(湛樂堂韻集)』은 『담락당 시집』이라는 제목으로 2000년 진안 문화원에서 번역판이 간행되었다. 오언절구, 칠언절구, 오언율시, 칠언율시 등 모두 209수가 실려 있다. 또한 ‘마이산에 탑들이 줄줄이 들어 있다’는 구절이 있어 마이산 탑의 역사를 시사하는 「금당사우음중씨(金塘寺偶吟仲氏)」라는 시구도 들어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김삼의당金三宜堂 : 조선 후기 진안에서 활동한 여류 문인이다.

김삼의당은 남원에서 태어나 32세 때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로 이주하여 살았던 조선 후기의 몰락 양반 여성 문인이다.

가난한 살림을 꾸리면서 남편에 대한 애정과 기대, 일상생활 속의 일과 전원의 풍치 등을 260여 편의 한시와 문장으로 남겼다.

본관은 김해(金海). 당호는 삼의당(三宜堂). 아버지는 연산군 때의 학자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인 김인혁(金仁赫)이고 남편은 진양인(晉陽人) 담락당(湛樂堂) 하립(河氵昱 )이다. 김삼의당(金三宜堂)관련항목 보기[1769~1823]은 전라북도 남원의 서봉방(捿鳳坊)[현 교룡산 서남 기슭]에서 몰락한 사족의 빈곤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일찍이 한글로 된 『소학』을 읽고 문자를 배워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했다.’고 한다. 스스로 글공부에 노력하여 여자로서의 부덕뿐만 아니라 문학에도 상당한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1786년(정조 10) 18세가 되던 해에 같은 해, 같은 날, 같은 동네에서 출생한 담락당 하립과 결혼하였다.

본가와 시가가 모두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기 때문에 김삼의당은 남편의 과거 급제를 평생소원으로 삼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했다. 그러나 가세가 더욱 빈한해지자 생활고를 면하기 위해서 1801년(순조 1) 32세에 진안군 마령면 방화리로 이주하여 죽을 때까지 진안에 살았다.

시부(媤父)와 시형제 다섯이 모두 시문에 능하였기 때문에 엄격했던 유교 가문의 생활 규범 속에서도 삼의당은 시작(詩作)을 할 수 있었고 시를 인정받았다.

남편은 혼인 첫날밤에 화답시를 쓰는 등 일상생활의 애환을 시문으로 화답하던 시우(詩友)이기도 했다. 또한 삼의당은 시부모를 봉양하고 형제, 친척들에게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가문에서는 물론 인근에서도 부도(婦道)를 칭송하였다.

당호 삼의당(三宜堂)은 『시경』 도요시(桃夭詩) ‘의실의가재지자(宜室宜家在之子)’에서 따온 것이다.

1930년에 장사(長沙) 김기현(金箕現)과 승평(昇平) 정형택(鄭逈澤)이 원고를 모아 『삼의당고(三宜堂稿)』를 간행하였다.

2권 1책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1권은 시이고, 2권은 산문이다.

1권에 실린 시는 총 111편 253수이고, 2권에는 편지글 6편, 서(序) 7편, 제문 3편, 잡지(雜識) 6편 등 총 26편의 산문이 실려 있어 조선조 여성으로서는 가장 많은 작품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서문은 함양 오상철(吳相喆)이, 발문은 정형택이 썼다.

문집은 1950년 『조선 역대 여류 문집』[을유 문화사 발행]에 수록되었고, 1982년에 출판된 『김삼의당 시문집』[황안웅 번역, 제일사]이 있으며, 2004년에 『삼의당 김부인 유고』[이월영 역주, 신아 출판사]로 번역·출간되었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 덕현리에 남편 하립과의 합장묘가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