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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팔공산

은해사 거조암 (銀海寺 居祖庵)

노촌魯村 2006. 3. 7. 14:10

 거조암은 은해사의 한 암자인데 직선 거리로 4km 가량 떨어져 있고, 들어오는 입구도 다르다. 거조암은 당초 거조사라 하여 은해사보다 앞서 창건되었다. 신라 효성왕 2년(738)에 원참조사가 창건했다고도 하고 경덕왕(742∼764)때 창건했다고도 한다. 은해사와 거조사가 언제  한 울타리 안에 놓이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근래에 와서 은해사를 본사로 하고 거조사를 말사로 편입하여 거조암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영산전은 잡석이 불규칙하게 축조된  기단위에 길죽하게 만들어져 있으며, 소박하고 간결한 주심포계 형식을 취하고 있는 앞 뒤 정면 7칸 측면 3칸의 길쭉한 맞배지붕 집이다. 공포, 보의 단면, 솟을 합장, 포대공 등에서 일부 고식을 볼 수 있으나 일반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조선초기에 중수하면서 많은 부분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영산전안에는 석가모니 불상과 526분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단 하나뿐인 오백성중청문이란 책자가 있다. 이 책에는 5백나한상의 이름이 적혀있는데, 제작연대는 알 수 없고 영파스님이 저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한국관광공사 자료에서)

 거조암 삼층석탑

 

 

 거조암 산신각

 

 거조암 산신각 산신탱화

은해사거조암삼층석탑(銀海寺居祖庵三層石塔.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4호. 경북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622)

은해사에 딸린 암자인 거조암 영산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리고 있다. 위층 기단의 네 면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갔고, 밑면에 계단모양의 받침을 새겨 두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모두 사라져 버린 상태이다.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자료)

 

 

 

 

 영산전 기둥과 공포

 영산전 내부

 

 

 

 

 

 

 영산전 측면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고려중기의 고승(高僧)이자 선종(禪宗)의 중흥조. 성은 정(鄭)씨. 자호는 목우자(牧牛子). 황해도 서흥(瑞興)출신.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낸 광우(光遇), 어머니는 개흥군(開興郡) 출신의 조(趙)씨이다.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고 병이 잦아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썼으나 효험이 없자, 아버지는 불전에 기도를 올려 병만 낳으면 자식을 부처에게 바치겠다고 맹세하였다. 그뒤 병이 깨끗이 나았으므로 8세 때 부모가 정해준 대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사堀山派)에 속하였던 종휘(宗暉)에게 나아가 승려가 되었다. 꾸준한 구도 끝에 1182년(명종 12) 승과(僧科)에 급제하였다. 전남 청량사(淸凉寺)에서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열람하다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생각을 일으키매 육근(六根)이 보고 듣고 깨달아 알지만, 그 진여자성은 바깥 경계들 때문에 물들어 더럽혀지는 것이 아니며 항상 자유롭고 자재하다."는 구절에 이르러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때 심성(心性)의 본바탕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의 불교계는 선종과 교종의 대립이 심각하여, 양측은 서로의 우열을 논하면서 시비만을 일삼았다. 이에 그는 선과 교가 모두 부처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어찌 서로 담 i 쌓고만 있는가를 의심한 나머지, 3년동안 노력한 끝에 <화엄경>의 여래출현품에서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몸 가운데 있건만 어리석은 범부는 스스로 알지 못하도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크게 깨닫고, "부처의 말씀이 교가 되고 조사(祖師)께서 마음으로 전한 것이 선이 되었으니, 부처나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서로 어긋나지 않거늘 어찌 근원을 추구하지 않고 각기 익힌 것에 집착하여 부질없이 쟁론을 일으키며 헛되이 세월만 소비할 것인가."하며 선교일원(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였고, 이에 입각하여 원돈관문(圓頓觀門)의 지침을 확립한 것이다. 또한, 그는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말씀이 둘이 없는 원칙에서 선교불이(禪敎不二)의 원리를 발견하고, 또 당나라 규봉종밀(圭峰宗密)의 저술인 <선원제전집도서(禪源諸詮集都序)>에서 선교합일의 이론을 정립하여, 마치 원수처럼 등을 지고있던 종래의 선교양종에 대하여 선교합일 회교귀선(會敎歸禪)이라는 우리나라 불교의 특수한 종지를 창도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이라는 결사문에서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로 전환될 수 있음을 천명하였고, 그 방법은 정(定)과 혜(慧)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에 있다고 하였다. 이 정과 혜의 두가지는 일심위에 통일되어 늘 균형을 지녀야 된다고 본 것인데, 이것은 한 부처의 가르침이 선교양종․정혜이파(定慧二派)로 분열되어, 정과 혜가 한마음 위에 통일될 때 온전한 불교공부가 된다는 것을 망각한 채 시비를 일삼고 적을 삼아왔던 당시 불교계 수행법에 대한 깊은 자각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결사운동은 정법불교에로의 복귀작업이었고, 결사문은 부패하고 타락된 당시의 불교현장을 이념적 또는 형태적으로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일대 선언서였다. 10여년 동안 송광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선풍을 일으키다가 1210년 3월 27일 대중들과 함께 선법당(善法堂)에서 문답을 끝낸 뒤 주장자로 법상(法床)을 두세번 치고 "천가지 만가지가 모두 이 속에 있다."는 말을 남긴 다음 법상에 앉아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권수 정혜결사문> 1권, <직심직설(眞心直說)> 1권,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1권, <원돈성불론> 1권, <화엄론절요> 3권,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1권, <염불요문(念佛要門)>1권, <상당록(上堂錄)> 1권 등이 있다. 입적 후 국사(國師)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탑호(塔號)는 감로(甘露)이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한국불교 인물사상사>(불교신문사편. 1990), <동사열전>(광제원. 1994).

 

부처님이 된 도둑들 - 설화

청통면 신원리에는 국보 제14호로 지정된 거조암 영산전이 있다. 영산전 안에는 526분의 나한님이 봉안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지금부터 1천 수 백 년 전에 이 암자에는 도를 터득한 스님이 한 분 살고 계셨다. 사람의 그림자도 없는 심산에 오직 바람과 짐승과 나무들과 이야기를 하며 생활하던 스님은 평야가 그리워 하루는 인가가 있는 마을 쪽으로 하산하였다. 때는 가을이라 엷은 빛살을 닮은 오곡이 파도처럼 출렁이고 소슬한 바람은 객기마저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몇 번인가 고개를 흔들며 속된 생각을 떨치려고 염불을 외우며 마음을 달래었다. 그럴수록 하늘은 여인의 얼굴처럼 맑고, 바람은 풋솜처럼 가슴을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스님은 다시 한 번 눈을 감으며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침 앉은 곳이 탐스럽게 여문 조 밭이었다. 스님은 조 이삭을 어루만지며 또 염불을 외고 있었다. 그런데 일은 여기서부터 벌어지고 말았다. 정신없이 염불을 외고 일어서려는데 앉은자리에 조이삭 세 개가 꺾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여느 사람 같으면 아무런 느낌도 없었겠지만, 중생을 인도하려는 성직자의 마음은 살생으로 생각하여 가슴 아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땀과 정성으로 온 여름을 가꾸어온 농부에게도 크게  마음이 걸렸다. 스님은 결국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 다시 앉아 속죄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꺾여진 조 이삭은 어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농부에게는 무엇인가 보상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스님은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무릎을 치며 일어났다. 그 길로 농부를 찾아 동네로 들어갔다. 동네어귀에서 스님은 주문을 외어 커다란 황소로 변신하여 조이삭 3개 대신 농부집에서 3년 간 일을 해주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황소의 방문에 농부는 무척 당황하였다. 말 못하는 짐승이라 돌려보낼 방법도 없고해서 우선 마굿간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는 동네는 물론 인근 마을까지 소를 잃어버린 사람을 수소문하였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소를 잃었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주인이 나타나지않자 농부를 소를 열심히 길렀으며, 소 역시 주인 못지않게 열심히 일하며 유순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영리하였던지 고삐도 필요 없고 일거리도 시킬 필요가 없을 정도로 스스로 일하고 처리하는 것이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소문이 떠돌자 하루는 험상궂은 사람이 찾아와 자신의 소라며 소를 몰고 가겠다고 하였다. 천성이 착한 농부는 두 말 하지 않고 그 동안 얼마나 걱정을 했느냐고 위로를 하면서 선선히 소를 내주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소가 움직이지 않았다. 달래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였으나 장승처럼 굳어져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오랜 시간을 버티다가 그대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왔다. 그러나 역시 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찾아온 사람이 500명도 넘었지만 소는 꿈쩍도 않았다. 농부는 부처님께서 내려준 선물이라 생각하고 이제는 찾아오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3년의 세월이 흘러 가을이 가까워 오자 소는 가끔씩 흐느껴 울기 시작하였다. 농부는 소에게 병이 생긴 것이라 여겨 쉬게 하였으나, 소는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다. 안스러워진 농부가 몰래 새벽 일찍 밭에 나가면 소가 미리 알고 먼저 나와 기다릴 정도였다. 가을이 무르익어 어느덧 3년 전 조 이삭 세 개를 꺾고 스스로를 응징하기 위해 소로 변신하여 농부 집으로 들어간 며칠 전날이었다. 아침나절 밖으로 나가려는 주인을 향해, “주인님 이제 헤어져야할 날이 온 것 같습니다. 모(某)일날 제 품삯을 주시는 셈치고 큰 잔치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리고 인근 동네까지 알려 많은 사람이 모이게 해 주십시오.”소가 낭랑한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었다. 주인은 크게 당황하여 얼떨결에 그 자리에 부복하고 부들부들 떨며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짐승이 말을 하니 육신은 짐승이오 혼은 사람이라, 바꾸어 말하면 짐승도 아니오 사람도 아니라 분명 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농부는 어떻게 된 연유냐고 물었고, 소는 지나온 자초지종을 소상하게 이야기하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 동안 무례가 많았습니다.”농부는 정중히 사과를 하고 소의 부탁이 아니라도 헤어지게 됨을 아쉬워하며 큰 잔치를 준비하였다. 마침 잔치날이 되자 풍악이 울리고, 술잔이 돌고, 모인 사람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때 마굿간에 누워있던 소가 일어나 짙은 안개를 내뿜는 것이었다. 안개는 삽시간에 앞사람마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집안을 덮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안개는 차츰 걷히자 마굿간의 소는 간 곳이 없어지고, 붉은 장삼을 걸친 스님 한 분이 점잖게 걸어 나오는 것이었다. 모인 사람들은 의외의 사실에 넋을 잃고 부복을 하자 마당 가운데 정좌한 스님은, “내가 소로 있을 때 자기네 소라고 이 집을 찾아온 사람은 앞으로 나오너라.”위엄어린 음성이 떨어지자 좌중의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엉금엉금 앞으로 기어왔다. 모두가 526명이었다. “나는 실수로 조 이삭 3개를 꺾고 그 죄 값으로 소가 되어 이 집에서 3년을 일해 주었는데, 너희들은 마음에 병이 들어 남의 소를 갈취하려 하였으니 무엇으로 죄 값을 치르겠느냐? 너희들은 한결같이 산적임을 내 이미 알고 있거늘 그 죄는 헤어날 수 없느니라. 나처럼 소가 되어 죄 값을 치르겠느냐? 아니면 나를 따라가 득도하여 성불을 하겠느냐?”이에 모두가 스님을 따를 도를 깨우치겠다는 약속 하에 입산을 하였는데 그 곳이 바로 이 거조암인 것이다. 결국 도를 닦은 526명은 성불하여 나한상이 되어 스스로 자리를 차지하여 앉게 되니 바로 오백 나한절의 주인으로 오늘날까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출처 : 지역정보포털 자료)

목조건축으로 느끼는 선조들의 숨결(고려시대 목조 건축물-국보) : http://visit.ocp.go.kr/visit/cyber_new/serv03.j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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