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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김삿갓계곡. 난고 김병연 묘소 그리고 생가

노촌魯村 2006. 3. 8. 08:57

김삿갓은 안동김씨로서 본명은 병연(炳淵)이요 호는 난고(蘭皐)인데 그가 다섯 살 때 그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평안도 선천부사로 있을 때 서북인을 등용하지 않았던 조정에 불만을 품은 홍경래가난을 일으켜 선천 가산군을 수중에 장악하려하자 정시 가산 군수는 끝내 저항하다가 홍경래의 손에 죽었으나, 선천부사 김익순은 홍경래에게 항복하였던 것이 화근이 되어 김익순은 처형되고 그의 부친 김안근도 배소에서 죽었다.

  병연이 연루를 피하기 위하여 김익순의 하인이었던 김성수에 의해 그의 공향인 황해도 곡산에서 은신하여 자랐던 것이다.

  김익순의 죄는 본인에 국한하게 되자 그의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왔고 그 모친은 세상에 떳떳이 살수 없으므로 산골을 찾아 이천, 가평, 평창 등지를 전전하다가 영월 삼옥리에 와서 살게 되었다. 당시 영월은 도호부였으므로 동헌에서 백일장을 보게 되었고, 김병연은 이에 응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시제(時題)가 「정시 가산군수의 충성스럽게 죽은 것을 논하고 김익순으 죄를 규탄하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사연을 모르고 자란 김병연은 정군수를 예찬하고 김익순의 죄를 호되게 나무란 글을 써서 장원을 하였다.

  장원한 뒤 모친의 말에 의해서 김익순은 바로 자기 자신의 조부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난 후 삼옥리에서 살 수 없어서 충청도 의풍 가는 길목인 지금의 하동면 와석리 어둔의 무인촌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조상을 지탄한 죄책감과 운명에 대한 회의로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던 것이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유명한 많은 시를 지었으며 57세때 전라도 동복에서 객사한 것을 둘째 아들 익균이 자기 동네인 지금의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다 장사 지냈던 것이다.

  그 후 120년이 지남에 따라 세상에서 잊혀져 가던 것을 1982년 10월 17일 향토사학자 정암 박영국옹이 이를 찾아내서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이응수 선생은 김삿갓의 시문은 세계수준이라고 주장하였고, 일본 러시아에서도 김삿갓의 시가 크게 인기가 있다고 1985년 11월 13일자 동아일보에서 보도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김삿갓이 세계적인 시인임을 뒷받침하는 것이며 김삿갓의 유일한 유적지인 영월에서는 「시선 김삿갓 유적 보전위원회」를 구성하고, 유적 보전사업을 전개하고 있다.(영월군청에서) 

 

 

 

 

 

 

 

 

 

 

 

 

 

 

 

 

 

 

홍원빈 - 방랑시인 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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