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경기도

신라 경순왕릉

노촌魯村 2009. 3. 10. 20:28

 

 

 

 

 

위치 및 지형


경순왕릉은 신라의 여러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경기도 내에 있는 것으로 고랑포 나루터 뒤편의 남방한계선과 인접한 나지막한 구릉의 정상부 쪽에 단독으로 위치한다.

유적 현황

봉분은 원형으로 32매의 호석을 두르고 있으며 곡장을 두르고 있다. 규모는 직경 630㎝, 높이 200㎝이다. 봉분전면에는 410㎝의 간격을 두고 2단의 계체석을 갖추고 있다. 하단의 계체석에 상석(너비 103㎝, 폭 44㎝, 두께 23㎝)과 네 면에 사각 화창(火窓)과 팔각지붕형의 옥개를 얹은 장명등(높이 160㎝)이 직선상에 놓여져 있고 장명등 좌우에는 석양1쌍(좌측 높이 52㎝, 길이 123㎝, 우측 높이 60㎝, 길이 115㎝), 망주석 2기(높이 좌측 160㎝, 우측 145㎝), 능표 등의 석물들이 놓여있다. 능표(비좌높이 104㎝, 너비 47㎝, 두께 17㎝)는 비좌와 월두형의 비신을 갖추었으며 묘표전면에 종1열로 “新羅敬順王之陵”의 비문이 있다. 이는 모두 조선후기의 양식이며 화강암재질이다, 묘가 위치한 구릉 좌측하단에는 경순왕의 것으로 추정되는 비가 비각 내에 있으나 훼손되어 판독이 불가능하다. 경순왕(敬順王, 927~935; 재위)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 성은 김(金), 이름은 부(傅)이며 신라 문성왕의 후손이다. 경순왕이 경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할 당시에는 각처에서 군웅이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영토는 날로 줄어들고 있었다. 이에 민심도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하는 것을 막고자 신하들과 큰아들 마의태자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 준 후,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때 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고 막내아들 범공은 화엄사에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귀부한 후, 경순왕은 태자의 지위인 정승공에 봉해지는 한편 유화궁을 하사받고 경주를 식읍으로 받아 최초의 사심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태조 왕 건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43년 후인 고려 경종 3년(978년) 세상을 떠났다. 고려 경종 3년(978)에 승하한 후, 신라 유민들에 의해 경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고려 조정에서 “왕의 구(柩)는 백리 밖으로는 나갈 수 없다”하여 이곳 장단 고랑포 성거산에 왕의 예에 준하여 장례를 모셨다. 그 후 임진왜란 등으로 실전(失傳)되었다가 영조 23년(1747)에 후손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또 다시 실전된 것을 1973년 이곳을 방어하던 육군장병에 의해 발견되어, 수차례의 정비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비각과 재실은 1987년 다시 건립 된 것이다.(연천군청 자료

 

능표(비좌높이 104㎝, 너비 47㎝, 두께 17㎝)는 비좌와 월두형의 비신을 갖추었으며 묘표전면에 종1열로 “新羅敬順王之陵”의 비문이 있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총탄 흔적이 있다.

 

 장명등(높이 160㎝)

석양1쌍(좌측 높이 52㎝, 길이 123㎝, 우측 높이 60㎝, 길이 115㎝)

 

 경순왕릉의 신도비(추정) 비각

 

 경순왕릉의 신도비(추정)

 

 

 경순왕릉의 재실

 경순왕의 영정

'경기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1.21무장공비침투로  (0) 2009.03.14
연천지역 항일독립운동  (0) 2009.03.11
숭의전지(崇義殿址)  (0) 2009.03.10
영릉(英陵 세종대왕릉)(2)  (0) 2008.12.11
영릉(英陵)(세종대왕릉)(1)  (0) 2008.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