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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수로왕릉(首露王陵) 신도비

노촌魯村 2011. 4. 2.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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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왕릉 중건 신도비명(太祖王陵重建神道碑銘) 병서

太祖王陵重建神道碑銘 幷序태조왕릉 중건 신도비명 병서

原文.譯文 1995년 三賢派譜,

參考;1991年京派統合譜解釋 ; 2006. 12. 14.海外에서 金順大

 

泰和元氣之會 鍾爲麟鳳 此先儒 所以讚美后稷而 言其神人之生 有以異乎人也 謹稽 大駕洛國太祖王之篤生 其蹟 尤異於后稷則世之秉筆者 復將何以稱焉

호연한 큰 기운이 모여 기린 봉황이 된다하였으니 이는 옛 선현들이 후직[1]을 찬미한 말이다. 말하자면 신인의 탄생은 일반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으니, 대 가락국 태조왕의 탄생한 자취가 더욱이 후직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세상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장차 어떻게 더 칭송할 수 있겠는가.

[1]后稷; 중국의 순(舜)임금 때에 농사 일을 관장하던 벼슬 이름

駕洛古記 盖曰漢光武皇帝建武壬寅三月三日 駕洛 我刀干汝刀干等九干 率衆喫飮于水于 望見龜旨峯 有異氣 空中 又有聲 有紫纓 係金榼垂空而下 金色六卵 在榼中 若日輪

가락고기에서 이미 말하기를, 한나라 광무황제 건무 임인(42년)3월3일에 가락의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등의 9간(九干)들이 여러 무리를 거느리고 물가에 모여 있었는데, 구지봉(龜旨峯)에 이상한 기운이 일고 공중에서 소리가 나며 난데없는 금합이 붉은 줄에 매달려 공중에서 내려와서 금빛나는 알 여섯이 함중에서 해와 같이 빛났다.

乃奉置我刀家 翌日 九干 咸會 復啓榼 六童子 各剖卵而出 容貌奇偉 日就岐嶷 歷十餘日 身長 九尺 衆皆異之 是月望日 九干等 推戴其首出者一人 立以爲王 睿聖仁勇 其知如神 以金榼故 姓金氏 首出故 稱首露 國號 駕洛 設都盆山之陽 定版圖 營宮室建宗廟 分封五人于五伽倻

우선 아도가에 맡겼더니 이튿날 9간이 모두 모여 함을 열어보니 여섯 동자가 각각 알을 깨고 나왔다. 용모가 기이하고 날이 갈수록 숙성해서 10여일을 지내니 신장이 9척이라 모두 이상히 여겼다. 그달 보름날 9간들이 그 중에서 먼저 난 이를 추대해 왕으로 삼으니, 아는 것이 깊고 거룩하고 어질고 용맹하여 신과 같았다. 금합에서 태어나 성은 김(金)으로 하고, 먼저 나왔으니 수로라 칭하였다. 국호를 가락이라 하고 분산(김해)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의 영역을 정해 궁실과 종묘를 세우고 다섯 사람을 5가야에 봉했다.

王 理國之七年秋七月 迎許氏 爲后 初 九干等 奏曰 王未有配 請選入處子 王曰朕 降于玆天命也 配亦天必命之 母慮焉 至是七月七日甲寅 有緋帆茜旗之大舶 浮于西南海 媵臣男女數十 侍一公主而至 王 設幔帳而迎之 自言 妾 阿隃陀國王女 姓 許 名 皇玉 年十六 父夢 上帝命曰駕洛元君 無配 宜遣王女 父乃送妾 因置石塔于船 以鎭風濤 妾 以故 得達

왕이 나라를 다스린지 7년 가을 7월에 허씨를 맞아 왕후를 삼았다. 일찍이 9간 등이 아뢰기를 왕의 배필이 없으니 청컨대 처녀를 간택하소서. 왕이 말하되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니 배필도 또한 하늘이 명할 것이니 염려하지 말아라 하였다. 7월 7일 갑인이 되어 비단 돛대에 주황기를 꽂은 큰 배가 서남쪽의 바다로 떠오고 시종인 남녀 수십인이 한 공주를 모시고 이르렀다. 왕이 장막을 설치하고 맞이하니 그녀가 말하되 “첩은 아유타국 왕의 딸로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황옥이고 나이는 16살입니다. 부친의 꿈에 상제가 명하기를 가락원군이 배필이 없으니 마땅히 왕의 딸을 보내라하여 부친이 첩을 보내었고 석탑을 배에 실어 바람과 파도를 잠잠하게 해 첩이 무사히 건너왔습니다.” 하였다.

及爲后 媲德匹休 有內助之美 王 旣定婚姻之禮 又明宗支之分 置九干 以定官制 立太子 以重國本 闢鴻荒宣人物 開物成務 疆土日廣 惠{血+邑部字}四窮 黎民太康

마침내 왕후가 되어 부덕이 넉넉해서 내조에 공이 많았다. 왕이 혼인의 예를 정하고 종지(宗支)의 구분을 분명히 하여, 9간을 두어 관제를 정하고 태자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굳게하고 황무지를 개척해서 만물을 이루게 하고 강토를 넓혀 4궁(환과 고독)을 돌보니 백성들이 태평을 노래했다.

百濟之滅箕氏也 興師問罪 島夷之侵新羅也 以書退兵 神化洋溢 威德遠被 奄有弁韓故地 馬韓五十四國 盡入版圖 東至黃山河 北至大良州 西南 至大海 西北 至居陁州 山南諸小國 皆歛衽而來朝 漢桓帝延熹壬寅 王 在位一百二十年也 自以倦勤 傳位于太子居登 築宮于知品川之方丈山中 與許后 移居而修鍊 自號曰普州皇太王 后曰普州皇太后 其山曰太王山 宮曰太王宮 越二十八年 許后薨

백제(百濟)가 기씨(箕氏)를 치니 군사를 보내어 죄를 묻고, 왜인이 신라에 침입함에 글을 보내 군사를 물리치니, 교화를 크게 행해 위엄과 덕망이 멀리 뻗히어 변한의 옛 땅과 마한 54국이 모두 나라에 흡수되었고, 동쪽으로는 황산강과 북쪽으로는 대양주와 서남쪽으로는 큰 바다에 이르렀고 서북쪽으로는 거타주에 이르러 산남의 여러 소국들이 모두 옷깃을 여미고 와서 내조하였다. 한나라 환제 연희 임인(162년)년 왕이 왕위에 오른지 120년에 스스로 나이가 든 것을 근심해서 왕위를 태자 거등에게 물려주고 지품천 방장산중에 궁실을 지어 허왕후와 함께 이거(移居)해 수련(修鍊)하고 스스로를 보주황태황, 왕후는 보주황태후라고 하고, 그 산을 태왕산 궁은 태왕궁이라 하였고, 그 후 28년에 허후가 별세했다.

后 生子男十人 長 卽太子也 后臨薨 語王曰 妾 受天命奉父敎 來侍大王 妾於東土 客也 妾沒 不傳姓 是爲悲 王 悲其意 命二子 從母姓爲許

후가 아들 열을 두었는데 맏이는 곧 태자이다. 후가 임종할 때 왕에게 말하기를 “첩이 천명과 부친의 가르침을 받들어 대왕을 모셨으나, 첩은 이 나라에 손님으로서 그 성을 전할 곳 없음을 슬퍼하나이다.”하니 왕이 그 뜻을 측연히 여겨 두 아들에게 어머니의 성을 따라 허씨성을 명했다.

後十年己卯三月二十三日 王 薨 漢獻帝建安四年也 壽一百五十八 在王位一百二十年 在太王位三十八年 陵在龜旨峯南子坐原 曰納陵 后陵 在其北二里許 亦子坐

그 후 10년 기묘(199년) 3월 23일에 왕이 별세하니 한나라 헌제 건안 4년이고 나이는 158세 이고 왕위에 있은지 120년이고 태왕위에 있은 지 38년이다. 구지봉 남쪽 자좌(子坐)에 능을 봉하니 납능이라 하고, 왕후의 능은 그 북쪽 2리 쯤에 있으며 역시 자좌이다.

太子卽眞 是曰 道王 傳成王麻品 德王居叱彌 明王伊尸品 神王坐知 惠王吹希 莊王銍知 肅王鉗知 至讓王仇衡 新羅强盛 數侵伐 人民多死 王 嘆曰吾 不欲以養人者 害人 且不忍見宗社之自我淪喪 乃讓位于王弟仇亥 率太子妃嬪 抱祭器文物 遯于方丈山太王宮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도왕이고, 성왕 마품, 덕왕 거질미, 명왕 이시품, 신왕 좌지, 혜왕 취희, 장왕 질지, 숙왕 겸지를 지나 양왕 구형에 이르러 신라가 강성해서 자주 침범하여 백성이 많이 죽었다. 왕이 탄식하되 “내가 다스리는 사람들이 해를 입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또 종사가 나에 이르러 망함을 차마 보지 못한다.” 하고 자리를 아우 구해에게 물려주고 태자 비빈을 거느리고 제기와 문물을 가지고 방장산 태왕궁에 은둔했다.

仇亥降新羅 封爲金官國主 後授大角干 以其地 爲金官郡 凡十世十一王 四百九十一年 然 見于史乘者不一 讓王 傳位于太子世宗 世宗 傳于弟武力 武力 傳國于新羅 晋文帝天嘉壬寅也 眞興王 待以賓禮 後以駕洛 爲金官小京 封食邑 奉先祀 拜新州大摠管 後至角干 實十一世十二王 五百二十一年云

구해가 신라에 항복하니 금관국주에 봉해지고 뒤에 대각간에 임명되어 그 땅을 금관군을 삼으니 10세 11왕에 491년이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이 같지 아니하니 양왕이 태자 세종에게 전하고 세종은 아우 무력(武力)에게 전하고 무력이 나라를 신라에게 바쳤으니, 진나라 문제 천가 임인(임오=562년)이었다. 진흥왕이 손님의 예(賓禮)로 대접하였고 뒤에 가락을 금관소경으로 고쳐 식읍으로 봉해서 선조의 사당을 받들고 신주 대총관으로 임명했다가 각간에 이르니 실제로는 11세 12왕 521년이었다고 한다.

武力 子 都督舒玄 舒玄 子 太角干金庾信也 自是厥後 歷羅麗鮮三朝 近二千載之間 金許兩姓 將相勳業 道德文章及節行之士 指不勝數 輝暎史冊 玆豈非 太祖王 樹功積德之餘麻也歟

무력의 아들은 도독 서현이요 서현의 아들은 대각간 김유신이니 이 뒤로 신라 고려 조선의 근 2000년간에 김씨와 허씨의 두 성의 장군과 재상들과, 공훈과 업적과 문장과 절행의 선비가 헤아릴 수 없이 역사책에 빛나니 이 어찌 태조왕이 쌓은 공덕과 음덕이 아니랴?

昔眞興王 詔曰駕洛太祖 生民之始王 闢鴻濛據山海 爰及許后 刱業垂統 神德偉功 熙輝千秋 今其二陵 俱在故都 不可使草萊 蕪沒 香火明滅 命于州修治 賜田二十頃 文武王 以王外裔 命修二陵而致祭

전에 진흥왕이 하교하되 가락 태조는 본인의 조상이다. 황무지를 열어 나라를 세워서 허후와 같이 대업을 이루니 신명한 덕화가 천추에 빛났다. 지금 그 두 능이 옛날의 도성에 있으니 짐승에게 풀을 뜯게 하는 것을 금하고 향화(제사)를 끊임이 없게하라 하고 고을에 명해 묘소를 손보고 밭 20경을 주었다. 문무왕은 왕의 외손으로 두 능을 수리해 제사를 올렸다.

高麗文宗壬寅 卽 王御極之舊甲 命知金州事金良鑑 修陵寢備祀事 良鑑 仍撰碑文고려문종 임인(1062년)은 왕의 등극한 갑년이다. 지금주사 김양감(金良鑑)[1]에게 명해서 능침을 수리하고 향사를 갖추게 하니 양감이 비문을 지었다.

[1]원 駕洛國記는 高麗 文宗30년(1076)에 金官 知州事가 지었다고 하였을 뿐 지은이의 이름이 없으나 1884년 허전(許傳)이 찬한 숭선전 신도비명에는 김양일(金良鎰)이 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근래 일부 문헌에는 김양감(金良鑑)이라는 이름이 보이고 있다.

至朝鮮中葉 典禮尙多未遑 邦人 以爲神聖之君 不敢不享 每於冬至一祭 後裔義城縣令金係錦 文愍公 金馹孫 盡誠於追報之節

조선 중엽에 이르러 제사를 모시는 예가 무너졌으나, 나라 사람들이 신성한 임금에게 제사를 모시는 것이 옳다하고, 매번 동지에 한차례 제사를 지냈고, 후손인 의성현령 김계금(金係金)과 문민공 김일손(金馹孫)이 정성을 다해 수호했다.
宣祖庚辰 觀察使許曄 重修二陵 以備祭儀 壬辰 島夷犯陵 爲神兵所滅 於是邦人 共起而封築之 仁祖丁亥 巡察使許積 增修而建碑 嗣其後 眉叟許穆 又撰二陵碑文

선조 경진(1580년)에 관찰사 허엽(許曄)이 두 능을 중수해서 제의를 갖추었으나, 임진(1592년)왜병이 능을 파헤치다가 신병에게 함몰하니 사람들이 다시 봉축했다. 인조 정해(1647년)에 순찰사 허적(許積)이 다시 수리해 비를 세우고, 그 뒤를 이어 미수 허목(許穆)이 또 두 능의 비문을 지었다.

英宗乙丑 敎以二陵一體祭享 丁卯 改修隨域及祭閣 自己巳 至甲午凡三祭焉 正祖前後下敎 可見崇報之義逈出尋常 劃祀田修祭閣 立監降香諸般儀文 一依三聖祠 崇靈殿 崇德殿成規 後復再致祭 壬子八月 又遣金海府使致祭 其文 曰維聖啓土 維天作合 歆我肇禋 祉我熙洽 因以爲常享祝 賜土田 釐牲牢 儀制一刱 薰其事者 裔孫金世黙也

영종 을축(1745년)에 하교하되 두 능을 일체로 제향하라 하고, 정묘(1747년)에 다시 능과 제각을 수리하고, 기사(1749)년에서 갑오(1774)년까지 세차례 제사를 지냈다. 정조임금의 전후말씀은 그 정성이 보통을 지났다. 제전을 두어 제각을 수리하고 제반 의식을 삼성사 숭령전 숭덕전의 규모를 따르게 했다. 임자(1792년) 8월에 또 김해부사를 시켜 제사를 지내게 했으니 그 글에 “성군이 나라를 세우니 하늘의 뜻에 부합했습니다. 이 정성 받으시고 이 나라 보살피소서.” 하였다. 제사와 축문이 일상화 되고 토지 제육으로 의식의 제도가 분명했으니 그 일에 정성을 들인 사람은 후손 김세묵(金世黙)이었다.

高宗戊寅 因大護軍許傳疏 仝令廟黨禀定 改建寢廟 賜號曰崇善殿 享如舊儀 置郞官 以金許兩姓 迭代薦授 庚辰 遣本府使金益成致祭 甲申 竪神道碑 許傳所撰也 隆熙皇帝己酉南巡時 遣金海郡守李是哲致祭 後十五年甲子 現任參奉金瀅斗 協謀於本郡守李章善 又廣詢諸宗族 大修陵寢興役 經年 事繁費鉅而凡在 納陵之後裔 無不殫誠而勤力 至有自擔象設之具者 於是乎 陵上大小石儀煥然改觀焉

고종 무인(1878년)에 대호군 허전(許傳)의 상소와 묘당의 품의서로 를 받아들여 침묘를 재건하고 액호를 내리니 곧 숭선전이다. 당관을 두되 김허 두성으로 번갈아 맡게 하였다. 경진(1880년)에 본 부사 김익성(金益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갑신(1884년)년에 신도비를 세우니 글은 허전이 지었다. 융희황제 기유(1909)년에 남쪽 지방을 순행할 때 김해군수 이시철(李是哲)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 후 15년 갑자(1924년)에 현재 묘소를 관리하고 있는 참봉 김형두(金瀅斗)가 본 군수 이장선(李章善)과 협의해서 여러 종족과 상의해서 능침을 크게 수리하고 해가 지나 일과 경비가 아주 거대하게 되어, 납능의 후예가 정성을 다해 움직이고 개개인이 부담하니 이에 능 뒤에 크고 작은 석물이 환연히 고쳐졌다.

窃嘗論之 駕洛 處濟羅之交 太祖王受命之初 壤地褊小 若{月+泰}之間齊楚 然 拓土而增殖 固圍而自强 崇仁義尙禮樂 文質 彬彬可觀 百姓 寧謐 享國延長 周文王之由方百里而興者 庶幾近之 鳴呼 殆天之命吏 銘曰

곰곰이 생각해 보건대 가락이 백제 신라에 끼여 태조왕의 초기에는 그 땅이 한쪽에 치우치고 작아서, 이는 등나라가 제(濟) 초(楚)에 낀 것과 같았다. 그러나 토지를 개척하고 국경을 굳게하고 스스로 강해졌으며, 인의 예악을 숭상하고 내외가 빛나니 백성은 편안하고 나라는 태평해서, 주나라 무왕이 백리의 나라로 흥하게 됨과 같으니 장하다. 하늘이 보낸 성군이로다. 새겨 으르되

上古帝王 牛首蛇身 未聞其生 不由人倫 金卵發祥 何如其神 金官無君 特降異人

상고의 제왕중에 쇠머리 뱀 몸이 출생처를 모르거니 인륜을 어찌할까금알에 나신 분은 신인이 분명하니 금관에 임금없어 이인이 내려왔네

帝眷南顧 樹牧于民 化如循蜚 俗因古淳 克勤匪康 國不患貧 熊繹於楚 公劉於邠

사방에 살펴보아 백성을 기르시니 벌레도 교화받아 풍속이 순후했다.이토록 근고하니 가난이 없어졌네 초나라 웅역인가 빈땅에 공유로다

揮戈拓疆 功業日新 羅始附庸 濟實疆隣 梗我奮勇 弱我施仁 悉直音汁 令罔不遵

창검이 있는 곳에 공업이 새롭더라 신라는 미약하나 백제는 강했으니 용맹은 늘어가고 인정도 베풀었네 실직과 음즙은 명령을 복종하되

漢祗伏辜 敢傲尊賓 弁馬之地 何國非臣 譬服不氏 惡獸皆馴 雖過耄期 萬機躬親

한지부 거만하여 귀빈을 몰라보네 변마의 땅이여 함께 굴복하니모두가 백성이요 맹수도 길들였네 춘추가 팔구십에 만기를 살피시다.

亦資內贊 匹美塗莘 偕躋壽域 治化己臻 漸覺堯倦 乃止舜巡 方丈修鍊 有慕仙眞

내조에 큰힘은 도탄을 건져내고 다같이 수명하니 덕화가 극진하다.갈수록 피곤하여 자리를 물려주고 방장산 수련하여 신선을 본받았네

瓜瓞綿綿 蠢羽振振 炳十二葉 延五百春 歷代崇報 俎豆常陳 萬歲千秋 永享明禋

복록이 면면하고 자손은 진진하니 십이세 선한잎이 오백년 봄이었네역대가 추모해서 제향을 베푸노니 만천년 가는세월 이정성 흠향하소.

駕洛紀元後一千八百八十六年 丁卯八月 日

가락기원후 1886(1927)년 정묘 8월 일

外裔 前經筵參贊官 礪山 宋榮大 撰

외예 전경연참찬官 여산 송영대[1] 찬

崇祿大夫前判敎敦寧院事 海平 尹用求 書

숭록대부전판교돈녕원사 해평 윤용구 서

嘉善大夫奎章閣副提學 延安 李炳觀 篆

가선대부규장각부제학 연안 이병관 전

[1]송영대(宋榮大) 신해1851~ , 자(字) 계창(季昌) 본관(本貫) 여산(礪山) 거주지(居住地) 경(京) 고종(高宗) 22년 (을유, 1885년), 별시(別試) 병과29(丙科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