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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피리를 소개합니다.
옥피리에는 바람을 불어 넣는 취공吹孔과 떨리는 소리가 나는 청공淸孔이 있고,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아 음률을 만드는 지공指孔이 있습니다. 1706년 경주부윤 이인징이 아홉 구멍이 뚫려있고 둥글고 곧은 것은 대나무를 본 뜬 것이라고 쓴 것을 보면, 아마도 이 검은색 옥피리를 말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X선으로 촬영한 결과, 검은색 옥피리는 부러진 곳을 은으로 두 군데, 동으로 한 군데 감싼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두 점의 옥피리는 지금의 대금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연두색 옥피리의 경우 칠성공의 수가 많고, 옥피리 두 점 모두 취공은 타원형이 아니라 둥근 원을 그리고 있어서, 대금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 안내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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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과 옥피리
신라의‘만파식적萬波息笛’은‘온갖 풍파를 잠재우는 피리’입니다.『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재위 681~692)이 감은사感恩寺에 행차한 뒤 이견대利見臺에 들렀는데 이 때 해룡海龍이 나타나 흑옥대黑玉帶를 바쳤다고 합니다. 이 해룡의 말에 따라 바닷가에 떠 있는 산 위의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의 천존고天尊庫에 소중히 보관하였습니다. 그 뒤 적군이 쳐들어오거나 병이 났을 때, 또는 큰 가뭄이 들거나 홍수 및 태풍이 불었을 때, 이 대나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 등 모든 일이 평정되었으니 이 피리를‘만파식적’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문인들은 이 옥피리를 신라의 보물, 즉‘만파식적’으로 여겼습니다. 조선 연산군(재위 1494~1506) 때 편찬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99)에는 동해의 용이 신라왕에게 이 옥피리를 바친 것으로 적혀 있습니다. 또한 한문건(韓文健, 1765~1850)은‘고려 태조가 이 옥피리를 갖고 싶어 했으나 조령鳥嶺을 넘자 소리가 나지 않는다’하여 신라에 대한 충절을 나타내는 기물로 여겼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 경주 사람들은 옥피리를‘만파식적’과 같은 신물神物로 생각하였습니다. 옥적이 조령을 넘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신라 지역을 벗어나지 않으려는 옥피리의 충절로 여긴 것입니다. 심지어는 옥피리가 바로 만파식적이며 경주를 한발자국도 벗어난 적이 없다고까지 생각하였습니다. 이처럼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만파식적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옥피리가 고스란히 이어받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경주박물관 자료)
옥피리보관함 길이 59.5cm, 국립경주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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