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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우현서루(友弦書樓) 옛터

노촌魯村 2011. 7. 30. 19:42

 

우현서루(友弦書樓)는 현 대구은행 북성로 지점의 터에 민족시인 이상화의 조부인 금남 이동진 선생이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 민족지사양성을 위해 사재(私財)를 털어서 세우고, 그의 장자인 소남 이일우 선생이 운영한 곳이다. 우현서루의 옛 터는 지금의 서성로와 북성로가 교차되는 지점의 서북지역 일부분인 약 7백여평의 대지였다고 한다. 우현(友弦)의 의미는‘역사적인 현자(賢子)들과 벗을 삼는다’는 뜻으로 일제시대 초기 민족지사를 길러내기 위한 사설학원이었다. 영남일대에서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뜻을 품은 지사들이 많이 모여들어, 이곳을 거친 사람만 150여명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장지연,박은식, 이동휘, 조성환, 금지섭등이 있었다. 이곳에 많은 민족지사들이 모여들자, 이를 위협으로 여긴 일제가 1911년에 강제로 폐쇄시켰다고 한다.
폐쇄 후에도 이일우선생은 낙담하지 않고 그 자리에 다시 강의원(講義院)을 세우고, 한편으론 애국부인회를 조직하여 신여성 계몽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한-일 야구시합 끝에 터진 패싸움에 연루된 것이 들통나면서 또 폐쇄당하였다. 이후에는 홍주일,김영서, 정운기등과 의기투합하여 교육기관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현재의 대륜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교남학교이다. 우현서루에서 보관했던 책의 일부분인 '사부총관’등 3천 937권은 후손의 기증으로 경북대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다. 한글 서적들의 일부는 일제에 의해서 강탈 또는 유실되었고, 그 중 일부만 이 이천동의 고서점에 있었다고 하는데, 서점주인 사망이후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지역정보 포털 에서)

위치는 현 서성로와 북성로가 교차되는 지점의 서북 일각을 차지한 7백여평의 대지이다. 우현서루는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란 일제침략의 통분을 느낀 李莊家門의 錦南 李東珍 (대륜중.고등학교 교가 작사자인 이상화 시인의 조부) 선생이 사재로 창설하여 그 의 장자인 小南 李一雨 선생이 운영하였다. 우현이란 중국의 萬古志士 현고를 벗삼는다는 뜻이다. 이 서루는 뜻있는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논하고 나라를 걱정하고 義氣를 기르던 志士養成所였다. 우현서루는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정신계발을 통한 항일투쟁과 신교육 신문화운동의 온상지였으며, 근대화 성취의 노력을 다한 요람지였다. 또한 중국 등지에서 일만수천권의 서적을 수입해 비치하였으니 학문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영남일대에서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청운의 뜻을 품은 지사들이 모여들었고, 이들 지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여 면학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韓末志士로서 우현서루를 거친 분은 150여명이 넘었다. 장지연, 박은식, 이동휘, 조성환 제 선생과 金祉燮열사들이 이 곳을 거쳐 나간 것먼 보더라도 그 업적의 찬연함을 알 수 있고 근대 우리 민족 정기의 본원지였음을 알 수 있다. 한일합방 직후 일제는 1911년 드디어 우현서루의 폐쇄를 단행하였다. 이는 민족정기,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선고의 유지를 이어받은 소남 이일우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아니하고 강의원 애국부인회를 설립하고 무료교육기관으로 사용하게 하면서 애국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삼일운동후 교남학교(대륜중.고등학교 전신)가 설립되자 초창기 교사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재경 대륜 동창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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