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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배론성지(舟論聖地)

노촌魯村 2011. 9. 17. 11:33

 

 

 

 

배론성지(배론聖地. 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 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623번지)

조선 순조 1년(1801)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 때부터 지금까지 천주교 신자들이 많이 찾는 천주교의 성지이다. ‘배론’이라는 이름은 이곳의 지형이 마치 배 밑바닥과 같은 모양이라해서 붙여진 것이다. 유적으로는 조선 후기 천주교도 황사영이 머무르며 ‘백서’를 썼던 토굴과 성 요셉 신학교, 최양업 신부의 묘가 있다.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은 이 토굴에서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중국 베이징에 있는 주교에게 보낼 글을 썼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성 요셉 신학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신학교로 성직자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조선 천주교사상 두번째로 신부가 된 최양업 신부는 천주교의 교리 번역 등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파되는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 배론성지는 우리나라 천주교의 성립과정에 있어 중요한 성지이다.

* 배론 이란? - 배론 이란 지명은 골짜기가 배 밑 바닥 같다 고하여 한자 새김으로 주론(舟論) 또는 음대로 배론(排論)이라고도 합니다.

* 백서 - 가로 62cm, 세로 38cm되는 흰 명주 비단에 한줄에 110자씩 122행 13,384자로 작성되었으며 원본은 로마교황청 문서보관소에 보관중입니다.


 

 

 

 최양업(崔良業)[1821~1861] : 1836년(헌종 2) 프랑스 신부인 모방(Maubant)에 의해 김대건(金大建)·최방제(崔方濟)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에서 공부하였고, 1844년(헌종 10) 김대건과 함께 부제(副祭)가 되었다. 사제 서품을 먼저 받고 페리올 주교와 함께 김대건 신부가 귀국한 이후 최양업은 여러 차례 귀국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849년(헌종 15) 상하이에서 마레스카(F. Maresca) 주교의 집전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출국한 지 13년 만인 1849년 말에 귀국하였다.

이후 10여 년간 충청도 진천의 배티를 사목 활동의 근거지로 삼고 전국에 걸쳐 있는 100여 개의 공소를 방문하면서 전교 활동에 힘썼다. 1861년(철종 12) 영남 지방의 전교 활동을 마치고 주교에게 사목 활동을 보고하기 위해 상경하던 중 문경에서 과로로 세상을 떠났다. 그해 말 베르뇌(S. F. Berneux) 주교의 집전으로 제천 배론으로 이장, 안장되었으며, 김대건 신부가 ‘피의 순교자’였던 것과 비교하여 최양업 신부는 ‘땀의 순교자’라고 일컬어졌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황사영 순교 현양탑(黃嗣永殉敎顯揚塔)

 

 

 


황사영 백서가 쓰여진 토굴

황사영(黃嗣永)[1775~1801] : 1790년(정조 14) 사마시에 입격(入格)하여 진사가 되었다. 정약종에게 교리를 배운 뒤 1790년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이후 전교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1795년(정조 19) 주문모 신부를 만난 뒤 더욱 활동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여주와 원주를 거쳐 제천 배론에 피신하여 조선 교회의 참상과 교회의 재건책을 작성하였다. 이 문건을 북경에 보내려고 하였으나 9월 29일 체포되었다. 그 뒤 서울로 압송된 뒤, 11월 5일 사형되었다.



 

황사영이 북경 주교에게 보내려던 청원서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가 있다. 백서는 필사본 1장이다. 122행 13,384자에 달하는 편지로, 62.0×38.0㎝ 크기 명주에 작성되었다. 발신자는 황심(黃沁)[토마스]으로 표기되었으나, 실제 작성자는 황사영[(黃嗣永=알렉시오]이다. 「황사영백서」를 전달하기로 예정된 사람은 옥천희(玉千禧)[요한]이며, 수신인은 구베아(Gouvea)[1751~1808] 주교였다.

백서는 황사영이 1801년 8개월간 제천 배론의 토굴에 은신해 있으면서 작성하였다. 내용에는 조선 교회가 처한 어려움을 설명하고, 특히 신유박해 동안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술하였다. 이어 교회 재건과 신앙 자유를 위한 방안을 적었다. 원본은 1801년 9월 황사영이 체포되면서 압수되었다가, 1894년 교회에 입수되었다. 그 후 1925년 조선 교구장 뮈텔(Mutel)[민덕효(閔德孝)]이 원본을 교황 비오 11세에게 선물하여, 현재 로마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백서 - 가로 62cm, 세로 38cm되는 흰 명주 비단에 한줄에 110자씩 122행 13,384자로 작성되었으며 원본은 로마교황청 문서보관소에 보관중입니다.

배론 신학교(舟論神學校)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모방 신부는 1836년(헌종 2) 서양인 신부로는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와서 방인 사제[현지인 사제]를 양성하여 그들이 교회를 운영하도록 하기 위해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를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다. 그리고 가장 짧은 시일 내에 신부를 양성하기 위해 국내에서 정하상(丁夏祥), 이재용 등 4명을 교육하였으나, 계속된 천주교 박해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신학교를 설립하려는 노력은 지속되어 1855년(철종 6)에 마침내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의 장주기 요셉 집에 우리나라 최초로 신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배론신학교는 예비 신학교의 형태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856년(철종 7) 8월에 교구장 베르뇌 주교가 푸르티에 신부를 교장으로 임명하면서 신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설립 당시 배론신학교의 학생은 6명이었으나, 1856년 푸르티에 신부가 라틴어반을 시작할 때에는 4명으로 줄었다. 이후 배론신학교는 베르뇌 주교 등 프랑스 선교사들의 노력 덕분에 사제 양성이라는 궁극의 목표를 위해 한 걸음씩 전진할 수 있었다. 이어 1861년(철종 12)에는성 요셉을 신학교의 주보로 정하였다.

하지만 배론신학교는 1866년(고종 3) 병인박해로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와 장주기가 순교함으로써 개교 11년 만인 1867년에 폐교되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배론신학교는 처음에 장주기가 신학교 살림을 돌보며 한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그를 도와 이경주 빈첸시오가 한문을 가르쳤다. 1856년 성모 승천 축일 이후에 부임한 푸르티에 신부가 한글을 배우면서 라틴어를 가르치는 한편, 1861년에는 상급반 학생들에게 수사학을 가르쳤고 1862년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부임해서 하급반 학생들을 돌보면서 철학을 강의하였다고 한다. 신학생들은 라틴어를 비롯하여 한글, 한문, 수사학, 천문학, 음악, 지리, 역사,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일반교양 과목을 배우는 한편 스콜라 철학을 비롯한 신학의 전문 지식 등 서양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다블뤼 신부가 설립하여 운영하던 예비 신학교는 점차 배론신학교를 위한 예비 신학생 양성 기관으로, 1856년 이후에는 평신도 교사가 한문 과정을 가르치는 학당 형태로 변모되었다. 배론신학교의 교장은 푸르티에 신부이고, 교사로는 프티니콜라 신부와 장주기 요셉, 이경주 빈첸시오가 있었다.

신학생들은 정규 교육을 통해서 서양의 근대 문물과 철학, 신학을 배우며 사제의 꿈을 키워 왔으나, 천주교 박해로 인해 단 한 명의 사제도 탄생시키지 못한 채 배론신학교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배론신학교 폐교 이후 신학생들에 관해서는 알려진 내용이 거의 없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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