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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두사충(杜師忠)의 모명재(慕明齋).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杜漢弼)의 명정각(命旌閣)

노촌魯村 2012. 2. 16. 00:03

 

모명재(慕明齋)는 1912년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2월 건물이 너무 낡아 중수하였다. 모명재라고 한 것은 고국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이고 대문에 달려 있는 만동문(萬東門) 역시 백천유수필지동(白川流水必之東)이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이 것 또한 그 '근본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문에 걸린 만동문(萬東門) 현판

이순신장군은 수만리 길을 멀다 않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나와 도와준 감사한 마음에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 라는 詩를 지어 두사충에게 마음을 표했다.

 '북으로 가서는 고락을 함께하고(北去同甘苦)
동으로 와서는 생사를 함께하네(東來共死生)
성 남쪽 타향의 달빛 아래 (城南他夜月)
오늘 한잔 술로써 정을 나누세(今日一盃情)'

僕射: 射(쏠 사.벼슬이름 야) .僕射(복야)는 진(秦)나라 때 처음 둔 벼슬. 본시 활쏘는 일을 맡았으나 당(唐)나라 이후에는 상서(尙書)의 다음 벼슬로 되어 실권(實權)을 장악하였으므로 사실상의 재상(宰相)이었음

봉정(奉呈,捧呈,蓬征) : 삼가 받들어 올리다, 문서 따위를 삼가 받들어 올림

 

 

 

   

대구 시내에서 경산으로 통하는 대로변 오른쪽 형제봉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모명재(募明齋)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후손이 선조를 위해 세운 것이다. 두사충은 중국 두릉(杜陵)사람으로 임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과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나왔다.

그가 맡은 일은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라는, 지세를 살펴 진지를 펴기 적합한 장소를 잡는 임무였다. 따라서 그는 이여송의 일급참모로서 항상 군진을 펴는데 조언해야 했고 조선과의 합동작전을 할 때 조선군과도 전략 전술상의 긴밀한 협의를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그는 당시 우리나라 수군을 통괄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도 아주 친했다. 임란이 평정되자 두사충은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그의 매부인 진린(陳璘)도독과 함께 우리나라로 나왔다. 이때 두사충은 충무공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충무공은 우리나라 장수도 아닌 외국사람이 수만리 길을 멀다 않고 두번씩이나 나와 도와주자 감격하여 두사충에게 한시를 지어 마음을 표했다.

한문으로 쓴 그 시의 뜻은 다음과 같다.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

'북으로 가서는 고락을 함께하고(北去同甘苦)
동으로 와서는 생사를 함께하네(東來共死生)
성 남쪽 타향의 달빛 아래 (城南他夜月)
오늘 한잔 술로써 정을 나누세(今日一盃情)'

시의 내용을 보면 충무공이 두사충을 아낀 내용이 잘 드러난다. 이후 정유재란도 평정되자 두사충은 압록강까지 매부 진린을 배웅한 후 자기는 조선에 귀화했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두사충에게 대구 시내 중앙공원 일대를 주고 거기서 살도록 했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두사충은 그 땅을 내어놓고 계산동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는 두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는데 두씨들은 계산동으로 옮기자마자 주위에 많은 뽕나무를 심었고 그 때문에 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 부르게 됐다.

그러나 사람이 늙으면 누구나 고향이 그리운 법, 수만리 떨어진 타국에서 편안한 생활을 하는 두사충이었지만 고국에 두고온 부인과 형제들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두사충은 최정산(最頂山=현재의 대덕산)밑으로 집을 옮겨 고국인 명나라를 생각하는 뜻에서 동네 이름을 대명동(大明洞)이라 붙이고 단을 쌓아 매일 초하루가 되면 고국의 천자쪽을 향해 배례를 올렸다고 한다.

이후 나이가 더 많아지자 어느 날 자기가 젊었을 때 대구 근교를 샅샅이 뒤져잡아 둔 묘터를 아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가마를 타고 묘터가 있는 고산(孤山)으로 향했다. 그러나 워낙 쇠약한 몸이라 도저히 고산까지 가지 못하고 담티재에서 되돌아오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두사충은 아들에게 오른쪽의 형제봉을 가리키면서 저 산아래 계좌정향¹으로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할 것이라 예언했다.

따라서 그의 사후 자손들은 두사충이 잡아둔 명당까지 가지 못하고 묘소를 형제봉 기슭에 쓰게 되었고 두사충이 잡아둔 묘터에는 나중에 고산서원(고산서당)이 들어섰다. (대구광역시 수성구청 자료에서)

※ 주(註)
계좌정향(癸座丁向) : [집터나 묏자리 따위가]계방(癸方)을 등지고 정방(丁方)을 향해 좌향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남 수군통제사 이인수(李仁秀)가 지은 두사충의 묘소앞에 있는 비문을 별도로 다시 새겨 모명재 앞뜰에 신도비를 다시 세웠다.

 

 

 

 

 

모명재 옆의 명정각(命旌閣)(두사충의 후손 두한필의 효자각)

두사충의 재실이 있는 서쪽 100m 지점에 붉은 벽돌담에 둘러싸인 아담한 효자각이 명정각이다. 이 효자각은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杜漢弼)의 효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 조정에서 정려(旌閭)을 내린 것이다.

두한필의 호는 소남(小楠)으로 1823년(순조23년)에 태어난 1893년(고종30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어릴 때부터 부모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였다. 나중에 조정에까지 소문이 퍼져 그의 사후에 정려(旌閭)가 내려오고 종3품 관직인 통훈대부 규장각직각(通訓大夫 奎章閣直閣)을 증직하였다.

현재의 명정각은 1912년 두사충의 재실인 모명재를 지을 때 함께 건립한 것이다. 이후 1966년 후손들이 모명재와 함께 보수 하였다.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杜漢弼)의 묘

 

두한필의 호는 소남(小楠)으로 1823년(순조23년)에 태어난 1893년(고종30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어릴 때부터 부모에 대한 효행이 지극하였다. 나중에 조정에까지 소문이 퍼져 그의 사후에 정려(旌閭)가 내려오고 종3품 관직인 통훈대부 규장각직각(通訓大夫 奎章閣直閣)을 증직하였다.

 

고산서당 (孤山書堂.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5호. 대구 수성구 성동 산22)

퇴계 이황(1501∼1570)과 우복 정경세(1563∼1633)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서당이다. 처음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이곳에서 이황 선생과 정경세 선생이 강의하였던 곳이라하여 1500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숙종 16년(1690)에는 서당 뒤편에 사당을 지어 서원이라 하였다. 고종 5년(1868)에는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고종 16년(1879)에 서원 옛터에 강당만을 다시 지어 고산서당이라 하였다. 그 뒤 1964년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규모는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현재 사당 자리에는 이황·정경세 선생의 강학유허비가 서 있다.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