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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 (九里 東九陵 健元陵 丁字閣)

노촌魯村 2012. 7. 1. 10:41

朝鮮太祖高皇帝詩碑

「登白雲峰(등백운봉)」

引手攀蘿上碧峰(인수반라상벽봉)
댕댕이 덩굴을 휘어잡으며 상봉에 올라가니

一庵高臥白雲中(일암고와백운중)
큰 암자 한 채 흰구름속에 높이 누워 있네

若將眼界爲吾土(약장안계위오토)

만약에 눈에 들어오는 세상을 내 땅으로 만든다면

楚越江南豈不容(초월강남기불용)

초나라 월나라 강남인들 어찌 받아 들이지 않으리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 (九里 東九陵 健元陵 丁字閣.보물 제1741호.경기 구리시 인창동 66-10)

건원릉은 태조의 능으로서 경기도 구리에 있는 동구릉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건원릉은 고려의 왕릉인 현릉(공민왕 능)의 제도를 표본으로 태종 8년(1408)에 조성되었다. 정자각은 고려시대에도 건립되었으며 조선왕조도 건국 초기부터 왕릉에 정자각을 조성하였으므로 건원릉의 정자각도 능침의 조성과 함께 건립되었다. 정자각은 능제에 따라 능침 남쪽에 낮게 자리하고 있다. 건원릉 정자각은 태종 8년(1408)건원릉을 조성하면서 함께 지어졌다. 이후 선조 19년(1586)에 중수했다고 전하며 선조 25년(1592)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이 방화하려 했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숙종은 건원릉을 수리하려 했지만 왜란의 신기한 사연을 듣고 손대지 않았다고 숙종실록에 전한다. 그러나 1764년(영조40)건물이 크게 퇴락하여 중수도감을 설치하고 건물을 수리했다. 1784년(정조8)에도 소규모 수리가 있었으며 고종 16년(1879)에는 건원릉 외에 목릉, 휘릉, 숭릉, 혜릉, 원릉, 수릉, 경릉의 정자각을 고치면서 수리했다. 일성록에 의하면 이 때의 수리는 주로 비각과 정자각의 계단석이 기울어져서 수리했다고 하였다. 기록에 남은 건원릉에 대한 마지막 수리는 광무 3년(1899)능의 석물을 고친 기사가 있지만 이 때는 정자각은 손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조오례의』길례 단묘도설에는 ‘산릉의 침전(寢殿:정자각)은 능실(陵室)남쪽에 있는데, 북쪽에 자리하여 남쪽을 향하게 하고 모두 3칸으로써, 동쪽과 서쪽에 계단이 있고, 신좌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한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정자각의 모습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건원릉 정자각은 이와 같은 모습이다. 정자각은 홍살문 북쪽 능상 남쪽에 있다. 장방형의 기단 위에 정전 정면3칸 측면 2칸에 배위청 정면1칸 측면 2칸이 전체적으로 丁자형을 이루며 서 있다. 기단은 장대석을 4단 이상 쌓은 단정한 모습이다. 배위청 동측의 향로(香路)계단석 우석은 테두리만 조금 남고 마모가 심하여 문양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본래는 다른 정자각과 마찬가지로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었다고 추정된다. 정전은 1출목 2익공이고 살미 끝은 18세기의 조각모습을 지니고 있다. 정전은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정자각의 규모나 외관을 잘 간직하고 있다. 또한 공포부분 등 세부는 18세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서 영조 40년(1764)도감을 설치하고 실시한 중수 때의 시대 특징을 충실히 지니고 있다고 판단된다. 건원릉 정자각은 태종 8년(1408)에 건원릉과 같이 건립되었고 그 후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지만『국조오례의』길례 단묘도설과 비교해 볼 때 초창기의 기본적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조선 1대 태조의 능인 건원릉의 정자각이라는 상징적 의미 뿐 만 아니라 조선의 능침제도에서 정자각의 표준으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큰 건물이다.(문화재청 자료)

조선태조어진 (朝鮮太祖御眞.국보 제317호.전북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 어진박물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가로 150㎝, 세로 218㎝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화 1점만이 남아있다. 이 초상화는 임금이 쓰는 모자인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아있는 전신상으로 명나라 태조 초상화와 유사하다. 곤룡포의 각진 윤곽선과 양다리쪽에 삐져나온 옷의 형태는 조선 전기 공신상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또한 바닥에 깔린 것은 숙종 때까지 왕의 초상화에 사용된 것으로, 상당히 높게 올라간 것으로 보아 오래된 화법임을 알려준다. 의자에 새겨진 화려한 용무늬는 공민왕상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왕의 초상화에서 나타나고 있다. 익선관은 골진 부분에 색을 발하게 하여 입체감을 표현하였고,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음영법을 사용하여 얼굴을 표현하였다. 고종 9년(1872)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인데,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 낸 작품으로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문화재청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