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진봉평리 신라비전시관
울진봉평리신라비전시관 앞 비석거리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국보 제242호.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
삼국시대 신라의 비석으로, 1988년 봉평리 논 객토작업으로 2-3개월 방치되어 있던 것을 마을 주민(권대선)이 발견하고 신고하였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에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나, 원래의 형태를 잘 간직하고 있다. 비는 자연돌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전체적인 모양은 사다리꼴에 가깝다. 비문은 한쪽 면에만 새겨져 있는데, 글자수는 400자 정도이다. 글씨는 중국 남북조시대에 북조의 영향을 받은 해서체이나, 예서체의 모습도 보인다. 내용은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라 신라식의 독특한 한문체를 사용하여 파악이 어렵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만하다. 기본 줄거리는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들어감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이 일어나자, 신라에서는 육부(六部) 회의를 열고 대인(大人)을 보내어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신라가 동북방면으로 진출하면서 건립한 비로,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신라 사회 전반에 걸치는 여러 면들을 새롭게 검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다. 또한 법흥왕 때의 율령반포와 육부제의 실시, 왕권의 실태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울진봉평신라비는 오랜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까닭으로 비문의 일부가 마멸되어 정확한 판독이 어려우나 신라 법흥왕 11년(524)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라가 영토확장으로 동해안지역에 실직주(悉直州)를 설치하고 이곳 지역을 새로 편입함에 따라 주민들의 항쟁사태가 일어나자 신라에는 이를 응징하기 위해 육부회의(六部會議)를 열고 대인(大人)을 파견하여 벌을 주고, 다시 대항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비의 크기는 길이가 204cm, 글자가 새겨진 부분의 위폭 32cm, 아래폭 54.5cm이다. 비는 사각장방형의 자연석 화강암에 한면을 다듬어 비문을 새겼는데, 규모는 작지만 형태는 고구려 장수왕 2년(414)에 세운 광개토왕비와 유사한 고구려계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 비를 통하여 신라 육부제(六部制) 실시와 법흥왕의 율령반포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입증 등 사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다.(문화재청 자료)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 발견 현장에 전시 상태.문화재청 사진)
울진 봉평리 신라비(蔚珍 鳳坪里 新羅碑. 발견 현장의 비각에 본존 당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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