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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7,000년 전의 팥 흔적 첫 발견

노촌魯村 2014. 10. 15. 20:33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7,000년 전의 팥 흔적 첫 발견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강순형)는 ‘식물고고학을 통한 선사 시대 경화 연구’의 하나로, 강원도 양양군에 있는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의 협조를 어 시행한 ‘양양 오산리 출토 토기 압흔(壓痕, 눌린 흔적) 조사’에서 농경과 관련된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시대의 팥 흔적을 발견하였다.

(학명: Vigna angularis)의 압흔은 신석기 조기(8000~6500년 전)와 중기(5500~4500년 전)에 각각 1점이 확인되었다. 팥 압흔의 크기는 각각 2.2㎜, 2.8㎜ 정도로 현재의 팥(4~8㎜)보다는 작다. 팥 압흔이 확인된 토기 표면의 탄화유기물을 미국 베타연구소(Beta Analytic)에서 연대 측정한 결과, 7314~7189년 전으로 나왔다.

지금까지 한국, 중국, 일본에서 팥을 이용한 시기로는 5000년 전이 가장 이른 것으로 추정됐는데, 이번 조사 결과로 인하여 2000년 더 이른 시기에 팥이 이용됐을 가능성이 확인되었다. 특히, 신석기 조기부터 중기에 걸쳐 팥이 이용되는 과정에서 크기가 점차 커지는 재배화(栽培化, Domestication syndrome) 경향까지 확인되어 농경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재배화: 야생식물이 인간의 개입으로 유전적 형질과 외형적 형태에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종으로 바뀌는 과정

  

이외에도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송전리에서 발견된 점토 덩어리에서는 신석기 중기에 해당하는 곤충의 압흔이 확인되었다. 농업 해충으로 알려진 노린재목(학명: Hemiptera)에 속하는 곤충으로, 선사 시대 농경과 관련해서 확인된 것은 번이 처음이다.

노린재목 곤충: 노린재, 장구애비, 매미 등이 속하는 곤충강의 한 목으로, 노린재목의 곤충들은 뾰족한 주둥이를 갖고 있어 식물의 즙이나 동물의 체액을 빨아먹는 것이 특징

 

특히, 곤충 압흔이 발견된 점토 덩어리와 함께 토기에서는 다량의 조, 기장, 들깨 압흔 등도 확인되었다. 이는 신석기 중기에 와서 조, 기장 등의 잡곡과 들깨까지 직접 재배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신석기 시대 식생활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조사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번 조사에서, 정밀사진 확보를 위한 주사전자현미경(SEM) 촬영을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에서 시행하였다. 특히, 식물과 곤충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오바타 히로키 교수(小畑弘己, 일본 구마모토대학교)와 이경아 교수(미국 오리건대학교), 이승환 교수(서울대학교), 이원훈 학예연구사(농림축산검역본부) 등 관련 전문가의 조언을 받았다.

 

한편, 이번에 조사 대상으로 선정된 양양 오산리와 송전리 유적은 지난 2006년 (재)예맥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가 시행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신석기 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주거지, 야외노지, 저습지 등이 확인되면서 중부 동해안 지역 신석기 시대 문화상 연구의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 곳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앞으로 이러한 선사 시대 농경과 관련된 조사․연구를 지속하여 종합연구보고서와 고고식물자료집 등을 2015년에 발간할 예정이다.

 

 

 

 

 

 

 

유 적 개 요

 

□ 송전리유적(襄陽 松田里遺蹟)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송전리 23–1에 위치한다. 유적은 해안선을 따라 가평리에서 송전리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해발 6m 높이의 사구(砂丘)지대에 입지한다. 남쪽으로는 석호(潟湖)인 쌍호(雙湖)가 위치하고, 서쪽으로는 해발 20∼40m 높이의 낮은 구릉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뻗어 있다.

 

송전리 유적은 1980년대 이래로 각종 지표조사를 통해 알려졌고, 2006년 발굴조사에서 신석기 시대 주거지 2기와 야외 노지 3기, 수혈 유구 2기를 비롯해 청동기 시대 토광묘 1기가 조사되었다.

 

1호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말각장방형이며 주거지의 주축은 북동남서 방향이다. 주거지의 규모는 남동북서로 길이 9.95m, 북동남서로 너비 8.14m, 깊이 0.4m이다. 주거지의 중앙부가 파괴되어 노지의 유무는 확인할 수 없으며, 바닥은 별도의 시설이 확인되지 않았다. 주거지의 북벽·서벽을 따라 기둥과 관련된 목탄의 흔적이 남아 있으나 기둥구멍은 확인되지 않았다.

 

유물은 주거지의 북벽과 동벽 주변으로 갈판·갈돌과 석부, 다양한 크기의 어망추 및 어망추 제작용 석재들이 집중적으로 확인되었다. 주거지의 남벽 아래에서는 반파된 옹형토기의 동체부가 바닥면에 정치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토기류의 구연부 문양은 단사집선문, 횡주어골문, 능격문, 격자문, 삼각집선문, 제형집선문, 능형집선문, 단사선문 등이며, 동체부는 문양 없이 정면하거나 횡주어골문을 전면에 시문한 것이 대부분이다. 구연부종속문은 일부에서 확인되는데 주로 거치문이나 삼각집선문의 변형된 형태이다. 저부는 평저형, 첨저형, 원저형이 확인되었다. 석기류는 갈판·갈돌, 석부 등의 가공용 석기와 끌, 지석 등의 공구용 석기, 석촉류, 어망추 등이 출토되었다.

 

2호 주거지는 1호 주거지에서 남쪽으로 4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평면 형태는 말각방형이다. 주거지의 규모는 동서 4.8m, 남북 4.9m, 깊이 0.35m이다. 바닥은 별도의 시설없이 모래바닥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노지는 주거지 중앙에 반타원형의 위석식 노지를 설치하였다. 노지의 크기는 동서 0.9m, 남북 0.65m이다.

  

유물은 주거지 중앙의 노지 주변에서 3개체분의 대형 토기편과 함께 탄화된 도토리가 출토되었다. 도토리와 대형 토기류가 노지를 중심으로 북동쪽에 밀집되어 있어 이 유물들이 도토리 저장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토기의 구연부 문양은 단사집선문이 대부분이나 종주어골문도 소량 출토되었다. 구연부종속문은 삼각집선문과 거치문의 변형된 형태나 종주어골문을 시문하였으며, 동체부에는 전면에 횡주어골문을 시문하였다. 저부는 첨저형만 출토되었으며 방사상의 사선문을 시문하였다. 석기류는 석촉·어망추와 같은 수렵·어로용 석기와 갈판·갈돌 등의 가공구, 석부·지석 등의 공구류가 출토되었다.

 

송전리 유적의 중심연대는 신석기 시대 중기에 해당된다. 1호 주거지는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3080∼3340년, 2호주거지는 기원전 3420∼3520년으로 2호 주거지가 1호 주거지에 선행하는 주거지로 확인되었다. 출토된 토기의 문양에서도 1호주거지에서는 남해안식의 태선침선문계토기와 구분문계토기가 일부 공반 출토된 반면, 2호주거지에서는 구분문계토기들출토되어 신석기 시대 중기 전반에는 구분문계토기만 확인되다가 중기 후반에 남해안식 토기가 나타나는 강원 동해안 지역 신석기 시대 중기의 특징이 재확인되었다. 석기류는 수렵·어로용 석기류 73%, 채집·가공용 석기류가 16%, 공구용 석기가 7%인데 반해 경작용으로 볼 수 있는 석기는 확인되지 않았다. 이러한 양상은 이 시기에 어망추를 사용한 어로활동과 함께 도토리 등 견과류의 채집이 생계유지의 주요수단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된다.(이수진, (재)예맥문화재연구원)

 

참고문헌

양양 송전리유적(예맥문화재연구원, 2008),

강원도사(강원도사편찬위원회, 2010)

 

<글 사진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