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인왕동 사지」 사적 지정 |
문화재청(청장 나선화)은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는 ‘경주 인용사지’(慶州 仁容寺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0호)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533호「경주 인왕동 사지」(慶州 仁旺洞 寺址)로 지정한다.
경주 인왕동 사지는 신라 태종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원찰(願刹)인 인용사(仁容寺) 터로 추정되어 1991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경주 인용사지’로 지정되었다.
* 원찰(願刹): 소원을 빌거나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하는 절
2002년부터 2011년까지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인왕동 사지는 중문‧쌍탑‧금당‧강당‧회랑을 기본으로 하는 신라의 전형적 가람배치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다른 신라 사찰과 비교되는 독특한 건축구조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중문 자리에는 유례가 드문 ‘아(亞)’자형 건물지가 있고, 쌍탑은 여느 사찰과 달리 금당의 좌우측면 남북축선 안쪽에 위치한다. 또한, 백제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는 와축기단(瓦築基壇 기와를 쌓아 만든 기단)을 구축였으며,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 양식을 보여주는 석탑은 팔부중(八部衆)이 명확하게 조각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다.
* 팔부중(八部衆):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대중을 교화하는 여덟 신
10년간의 발굴조사를 통해 자기류, 전돌류, 토기, 목간, 금속유물, 지진구(地鎭具) 등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 중 기와는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는데 완성도 높은 통일신라 시대 기와가 대부분이다.
지진구는 건물을 지을 때 좋지 않은 땅의 기운을 누르기 위해 묻는 의례용 유물로, 인왕동 사지에서 확인된 지진구는 신라 시대 지진구를 묻는 방식에 대한 연구 범위를 확대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가치가 높다. 아울러 출토된 청자, 백자 등 중국 자기를 통해 신라와 당나라의 교역에 관한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발굴조사에서는 절의 이름이 새겨진 명문(銘文)기와 등 인용사(仁容寺) 터임을 밝힐 수 있는 유물은 출토되지 않아 지정명칭을「경주 인왕동 사지」로 하였다.
문화재청은 앞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등과 협력하여 이번에 사적으로 지정된 ‘경주 인왕동 사지’를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여 시행할 계획이다.
지 정 개 요 |
□ 지정명칭: 경주 인왕동 사지(慶州 仁旺洞 寺址)
□ 지정종별: 사적 제533호
□ 소 재 지: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42번지 일원
□ 지정면적: 35,282㎡(문화재구역)
□ 관리단체: 경상북도 경주시
□ 지정가치
ㅇ 경주 인왕동 사지는 신라의 전형적인 평지 이탑식 가람배치(중문‧양탑‧금당‧강당‧회랑)를 기본구조로 하면서 ‘아(亞)’ 자형 건물지 등 독특한 유구가 확인되었으며, 통일신라 시대 전형적인 석탑 양식인 쌍탑에 모두 팔부중이 조각되어 있고 자기류, 전돌류, 토기, 목간, 금속유물, 지진구 등의 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 사찰건축 등의 연구자료로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뛰어남.
<글.사진 출처 : 문화재청>
인용사지(仁容寺址)
인용사(仁容寺)는 신라통일의 일익을 담당하였던 김인문(金仁問)을 위해서 지은 절이다. 김인문의 자(字)는 인수(仁壽)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둘째 아들이다. 즉, 삼국통일의 대업을 성취시킨 제30대 문무왕(文武王)의 동생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에 능통(能通)하여 유교서적(儒敎書籍)은 물론, 노장(老莊)이나 불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설(敎設)을 섭렵하였고 예서(隸書)와 사어(射御)에도 능했다. 23세 때 당나라에 건너가서 청장년기(靑壯年期)를 그 곳에서 보냈는데 벼슬이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에까지 이르렀다. 즉천무후(則天武后) 때 사망하였는데 당의 황제는 그의 영구(靈柩)를 본국인 신라에까지 호송하게 하였다. 효소왕(孝昭王)대에 그는 대각간(大角干)으로 추증(追贈)되었다.
그가 활약했던 시기는 신라의 정세가 매우 위태롭던 시기였다. 신라는 문무왕 8년(668)에 통일의 대업(大業)을 완수하였다.
그러나, 비록 국토를 통일했다고는 하지만 안으로는 백제와 고구려 유민(遺民)의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밖으로는 당군(唐軍)의 위협이 가중되는 어수선한 정세가 계속되었다. 특히, 백제유민(百濟遺民)의 반란은 집요한 것이어서 사비성(泗沘城)과 웅진(熊津) 등을 중심으로 하는 반란은 백제가 멸망한 지 50 년이 지나도록 계속되었다.
한편, 반란군을 진압시킨다는 구실로 백제의 유지(遺地)에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고구려의 유지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신라의 영지(領地)에는 계림도독부(鷄林都督府)를 설치하여 신라마저도 저들의 손아귀에 넣고자 획책하였다.
이러한 당의 야욕은 상원(上元) 원년(元年. 674) 2월에 고구려를 정벌한 대장군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총관(鷄林道摠管)으로 삼아 신라를 치게 한 사건으로 노골화되었다. 당군의 대병(大兵)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는 유격전으로 맞싸웠고, 김유신(金庾信)의 아들 원술(元述)이 빛나는 전공(戰功)을 세운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이러한 어려운 시구(時局) 속에서 김인문(金仁問)은 당의 황제를 무마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고, 또 불가피한 경우에는 본국에 당의 내침을 알리기도 하는 등 조국의 수호를 위해 진력(盡力)하였다.
그러나, 번번이 싸움에 패한 당고종(唐高宗)은 김인문을 불러 “너희들이 우리 군사를 청해서 고구려를 멸망시켰으면서도 우리를 침해(侵害)하다니 무슨 까닭인가?”라고 트집을 잡아 김인문을 옥에 가두고, 50만 대병으로 신라를 병합(倂合)할 준비에 바빴다.
이에 신라에서는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짓고 비법(秘法)으로 그들을 물리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망덕사(望德寺)가 당황실의 만수(萬壽)를 빌기 위해 세워진 절이라는 보고를 받은 당황제(堂皇帝)는 크게 기뻐하여 신라와의 화해를 서둘렀다. 이 때 김인문의 형 문무왕은 외교문서의 작성에 능한 강수(强首)에게 명하여 인문을 놓아 달라는 내용의 표문(表文)을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인문을 석방하고 위로해 보냈다는 것이다.
(1) 인용사의 관음도량(觀音道場)
인문이 옥(獄)에 있을 때 신라사람들은 그의 안녕(安寧)을 빌기 위해 인용사(仁容寺)라는 절을 짓고 관음도량(觀音道場)을 설치했다. 그러다가 인문이 해로(海路)로 귀국하다 해상에서 세상을 하직하자 그 도량을 미타도량(彌陀道場)으로 고쳐서 그의 명복(冥福)을 빌었다.
도량을 설치하는 풍습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직후부터 성행되었다. 도량은 보리도량(菩提道場)이라고도 하는데, 불(佛). 보살(菩薩)이 성도(聖道)를 얻기 위해 수행하는 곳을 말한다. 우리 나라에서 이것은 팔관회(八關會)나 연등회(燃燈會)와 같이 법회의 성격을 띄고 발전되어 고려 때에는 의식의 극대화로 국가 재정의 파탄을 초래(招來)하기도 하였다.
진흥왕 12년(551) 신라로 망명한 고구려 사문(沙門) 혜랑(惠亮)이 팔관회(八關會)와 백좌도량(百座道場)을 베푼 것이 도량의 효시었고, 이 후 황룡사(黃龍寺). 사천왕사(四天王寺). 흥륜사(興輪寺) 등은 도량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도량은 김인문을 위해 지은 인용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복(祈福)의 형태에 따라, 또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 당시 사회의 신앙형태를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의 역할도 한다.
옥에 갇힌 인문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대자대비(大慈大悲)의 화신(化身) 관음(觀音)께 그 안녕을 빌고, 그가 타계한 후에는 서방정토(西方淨土)에 왕생(往生)하기를 빌며 미타도량(彌陀道場)으로 고쳤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은 이러한 관점에서 무척 우리의 관심을 끄는 기사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신라의 민간신앙 중에 가장 일반적이며 지배적인 신앙이 관음(觀音). 미타(彌陀). 미륵(彌勒) 등의 신앙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인용사의 관음.미타도량은 주목의 대상이 된다.
인용사지는 남천의 동쪽, 즉, 현재 인왕동에 있는 반월성을 돌아 흐르는 남천가의 월정교 건너편에 있다. 그 곳에는 초석(礎石) 3기와 폐탑 2기가 남아 있다. 삼층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폐탑 중 동편의 것은 탑신.옥개 등이 비교적 파손되지 않은 형태로 남아 있고 서편 곳은 기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동남산의 마지막 계곡인 불곡의 기슭에 자리잡은 인용사지의 남쪽에 국립경주박물관이 있고, 그 부근에는 일정교(日精橋). 월정교(月精橋)를 비롯해서 김유신이 살았다는 재매정(財買井) 등의 고적이 옛 전설을 지니고, 찾은 이의 감회를 새롭게 한다.
인용사지 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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