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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일두 정여창 묘역(一蠹 鄭汝昌 墓域)

노촌魯村 2016. 7. 17. 22:07


일두 정여창 묘역(一蠹 鄭汝昌 墓域.경상남도  기념물 제268호. 경남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산10-9)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은 조선 성리학사상 한훤당 김굉필과 함께 포은 정몽주의 학통을 계승하여, 정암 조광조·회재 이언적·퇴계 이황·남명 조식 등과 같은 성리학자들의 배출을 가능케 한 인물이다.
그의 묘소는 1504년 서거 직후에 일어난 갑자사화로 인해 부관참시(剖棺斬屍 :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 주검을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걸었던 형벌이다. 특히 조선 연산군 때 성행했는데, 김종직·송흠·한명회·정여창·남효온·성현 등 많은 사람들이 이 형을 받았다.)라는 처참한 역사적 현실을 겪었던 곳이다.
묘역 내에는 일두 정여창의 묘와 정경부인 완산이씨의 묘가 자리잡고 있으며 정여창 묘 앞에 선 신도비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려 하자 자결을 시도하여 청사에 이름이 길이 빛나는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41)이 지은 것이다. 동계 정온 또한 이웃 고을 출신으로 일두 정여창을 사숙하였던 인물이다.
이 비석의 頭篆은 「贈右議政文獻公一蠹鄭先生神道碑銘」이라 되어 있으며, 碑額題는 「有明朝鮮國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監春秋館事諡文獻公一蠹鄭先生神道碑銘幷序」로 되어 있다. 두전 및 비문 전체의 글씨를 쓴 사람은 이조판서를 거쳐 判敦寧府事에 이른 西谷 李正英(1616-1686)이다.
이 비석이 세워진 것은 숭정 기원후 기사(서기 1689년) 3월이며, 각자를 한 사람은 鄭元夫와 僧 三悅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와 같이 일두 정여창은 朝鮮朝 五賢의 일인으로서 조선왕조 이후 세인의 존경을 받아왔고, 그의 실천을 중시하는 학문 자세는 길이 후세인에게 훌륭한 모범이 되고 있어 그의 묘소는 인물 면으로도 그 가치가 있다. 또한 일두 정여창과 부인 정경부인 완산이씨 묘소는 조선 전기 사대부의 무덤양식을 잘 나타내주고 있으며 묘역 내 석물들도 우수한 작품으로 그 가치가 더욱 높게 평가된다. (출처:문화재청)

정여창 (鄭汝昌. 1450~1504. 조선시대) : 조선조 5현(김굉필, 조광조, 이언적, 이황, 정여창)의 한분이며 동국 18현중의 한분으로 성리학의 대가이신 선생의 자는 백욱, 호는 일두로서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다.
판전농시사를 지낸 정복주의 손자이며 한성부좌윤 정육을의 아들로서 함양군 지곡면에서 출생하였고 본관은 하동이다.
성종 21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지리산에서 4서5경과 성리학을 연구했으며 실천 철학자로서 독서를 주로하였고 도학으로는 당시 동방의 최고였다. 김굉필과 더불어 우리나라 유학의 핵심적 부분인 이기론의 꽃봉오리를 맺게 하였다.
안음(안의) 현감 재직시 도학사상을 왕도정치로 실천하여 주민들의 복지향상에 주력하였다.
1498년(연산4) 무오사화에 연좌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영면하였고 갑자사화에 다시 연루되어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1517년(중종12)에 문인으로서는 최고의 직함인 대광보국숭록대부 겸 우의정에 증직되었고 1575년(선조8)에 문헌공으로 시호를 내렸다.
1610년(광해2년)에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저서로는 무오사화때 모두 소각되었으나 후손들이 편찬한 문헌공실기등에 몇편의 글과 시만 전하여지고 있다.(출처:함양군청)

동방 18현(東方十八賢)또는 동국 18현(東國十八賢)은 문묘에서 배향하는 우리나라의 유학자을 말한다.

문창후(文昌侯) 최치원.홍유후 (弘儒侯) 설총.문성공 (文成公) 안유. 문충공 (文忠公) 정몽주. 문헌공 (文憲公) 정여창. 문경공 (文敬公) 김굉필. 문원공 (文元公) 이언적. 문정공 (文正公) 조광조. 문정공 (文正公) 김인후. 문순공 (文純公) 이황. 문간공 (文簡公) 성혼. 문성공 (文成公) 이이. 문열공 (文烈公) 조헌. 문원공 (文元公) 김장생. 문정공 (文正公) 송시열. 문경공 (文敬公) 김집. 문순공 (文純公) 박세채. 문정공 (文正公) 송준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