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운궁慶運宮
현판으로 보는 대한제국 황궁의 역사
1897년 2월, 1년여 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렀던 고종이 경운궁慶運宮(지금의 덕수궁德壽宮)으로 돌아왔다. 고종은 환궁을 준비하며 1896년부터 경운궁 조영을 시작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잠시 거처했고,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했던 곳이지만 200년이 넘도록 조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적없었던 조용한 정릉동 행궁이 제국의 황궁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 해 10월 고종은 경운궁 태극전太極殿(즉조당卽阼堂)에서 황제 즉위와 대한제국 설립을 선언하였고, 경운궁은 근대도시로 변화 해가는 한성의 중심이자 근대화된 제국의 황궁에 걸맞은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1904년 4월의 대화재로 공들여 건설했던 황궁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1904~1905년에 걸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1905년 중명전重明殿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상실하면서 대한제국의 운명과 함께 경운궁의 운명도 기울었다. 화재 이후 대대적인 중건을 통해 다시 궁궐의 모습을 만들어 나갔으나, 1907년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뒤이어 황제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경운궁은 황궁의 기능을 상실하고 퇴위당한 고종의 거처인 덕수궁이 되었다.
일제강점기들어 축소되기 시작한 덕수궁은 1919년 고종의 서거로 주인을 잃게 되자 빠르게 해체되었다. 1910~20년대에는 중명전구역과 왕실 제향 영역인 선원전璿源殿 일곽이 먼저 일반에 매각되어 덕수궁 궁역에서 제외되었고, 태평로 개설과 확장으로 덕수궁 동쪽 영역도 크게 축소되었다. 또한 1932년부터 덕수궁을 도심공원으로 만들려는 계획에 따라 중화전中和殿과 함녕전咸寧殿 등 주요 전각만 남기고 많은 건물들이 옮겨지거나 헐려나갔다. 광복 후에도 태평로 확장으로 대한문과 궁궐담이 이동하는 등 서울 도심에 위치한 덕수궁은 변형을 피할 수 없었다. 경운궁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축 속에서도 대한제국을 근대화된 자주 독립국가로 세우려했던 각고의 노력과 그 아쉬운 실패의 현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경운궁 내에 세워졌다 옮겨지고 사라진, 크고 작은 문과 건물의 이름을 새겨 걸었던 현판들이 남아 있다. 이 현판들로부터 근대기 나라의 운명을 함께 겪었던 경운궁의 역사를 읽어낼 수 있다.
1. 경운궁 궁역宮域과 문門
경운궁 조영이 시작된 1896년 당시 경운궁이 자리 잡은 정동貞洞은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 서구 각국의 공사관이 모여 있던 곳이었다.
이들 공사관에 둘러싸인 경운궁은 황궁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원 공간인 즉조당 일원을 중심으로 주변의 민가와 외국인 거주지를 매입해가며 궁역을 넓혀나갔다. 또한 몇 차례의 화재와 재건, 일제 강점기 때의 궁역 축소를 거치면서 경운궁의 궁궐 담장과 문은 여러 차례 변화와 이동을 겪게 되었다
인화문 현판
인화문은 경운궁 남측에 위치하여 본래 정문으로 사용되었던 문이다. 고종이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할 때 인화문을 거쳐 궁으로 들어갔다. 국가의례를 거행하거나민중들이집회를여는등정문역할을했으나1902년 경운궁의 법전法殿인중화전中和殿과 그 문인 중화문中和門 건립을 위해 궁궐 영역을 남쪽으로 확장하면서 철거되었다. ‘인화仁化’는 임금의 덕으로 백성을 교화敎化한다는 의미로, 가운데에 ‘化(화)’자를 넣는 조선시대 궁궐정문 이름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현판의 글씨는 민병석閔丙奭(1858~1940년)이 썼다.
대안문 현판
대안문은 경운궁의 동문東門으로, 1897년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도로 접근성이 좋아 인화문仁化門을 대신하여 경운궁의 정문 역할을 하였다. 1904년의 대화재 이후 경운궁 중건이 마무리되어가던 1906년 4월 25일에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현판은 1899년 3월 1일부터 1906년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뀔 때 까지 걸려있던 현판이다. ‘대안大安’은 ‘크게 편안하다’는 의미로 현판의 글씨는 민병석閔丙奭(1858~1940년)이 썼다.
포덕문 현판
포덕문은 경운궁 담장 동북쪽에 있던문으로,1 896년(고종33)에 건립되었다.고종이 종묘 등 외부에 출궁할 때 주로 이용하였다. 1914년 태평로 개설을 위해 덕수궁 담장이서쪽으로 밀려나면서 본래위치에서 서쪽으로 대한문 북쪽에 옮겨졌다. 1938년 이후 어느 때인가 다른곳으로 옮겨지거나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포덕布德은 ‘은덕을 널리 베푼다’는 의미이다. 현판의 글씨는 김철희金喆熙(1845~1922년)가 썼다.
2. 경운궁 전각殿閣
파란 많은 역사를 겪은 경운궁에는 짧은 기간에도 많은 전각들이 세워지고 사라졌다. 즉조당과 구성헌은 경운궁 조영이 시작될 당시에도 존재했던 건물이다. 즉조당과 영복당, 흠문각은 1904년 대화재 때 소실되었다
재건되었으며, 의효전은 1904년 순명효황후가 승하했을 때 조성한 혼전으로 경복궁 문경전을 옮겨다 지은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로는 구여당이 있다. 이 전각들은 즉조당을 제외하고는 일제강점기 덕수궁의 축소 및 공원화 과정에서 옮겨지거나 철거되었다.
중화전 현판
1898년부터 1902년까지 즉조당卽阼堂이 중화전中和殿이라는 명칭의 정전으로 사용 될 때 걸었던 현판이다. 즉조당卽阼堂은 1623년 인조가 즉위했던 경운궁의 원 공간으로, 1897년 10월 고종의 황제 즉위 시에는 태극전太極殿이라 불렸다가 1898년 2월부터 중화전中和殿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902년 중층의 새로운 중화전이 지어진 후에는 다시 즉조당이 되었다. 1904년 대화재 때 소실되었다가 같은 해 재건되었다. ‘중화中和’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을 뜻하는 것으로, 이는『중용中庸』에서 유래한말이다.
구성헌 현판
구성헌은 지금의 석조전石造殿 뒤쪽에 위치했던 2층의 서양식 건물로, 건물의 전면과 측면에 베란다가 설치된 구조였다. 주로 고종이 외국 공사를 접견하는 외교공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대화재 때불 타지않고 살아남았고, 1907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이 구성헌을 사용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1907년 이후 구성헌 자리가 석조전 부지에 포함되면서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구성九成’이란 “소소簫韶의 음악 아홉 곡을 연주하니 봉황이 와서 춤을 춘다[九成 鳳凰來儀]”는『서경書經』의글에서온말이다. 구성헌 현판의 글씨는 송대宋代 대가大家인 소식蘇軾(1037~1101년)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였다.
영복당 현판
영복당은 고종의 후궁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엄씨嚴氏(1854~1911년)의 처소였다. 엄씨의 거처는 1904년 대화재 때 소실되었는데, 그 해 12월 덕언당德言堂을 헐어 영복당을 재건하였고 1905년 7월 현판을 걸었다고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1907)에 기록되었다. 1911년 7월 엄귀비가 승하하였을 때 혼궁魂宮으로 사용되었고1933년경 덕수궁을 공원화하는 과정에서 철거되었다. 재건 당시 부속 건물로 함께 지어진 유호실攸好室의 현판도 남아있다.
흠문각 현판
흠문각은 고종의 어진을 모셨던 건물이다. 원래 함녕전咸寧殿 서쪽에 있었으나 1904년의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같은 해 수옥헌漱玉軒(중명전) 영역으로 자리를 옮겨 재건하고 고종의 어진과 순종의 예진을 봉안하였다. 이 현판은 1904년에 재건한 흠문각 건물에 걸었던 것이다.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1907)에 따르면 흠문각에는 ‘흠문각’, ‘계명각繼明閣’, ‘집녕실輯寧室’의 현판 세좌坐를 제작하여 걸었다.
의효전 현판
의효전은 1904년에 당시 태자비였던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 민씨閔氏(1882~1897년)가 승하한 후 신위神位를 모셨던 혼전이다. 위치는 경운궁 영성문永成門 안 선원전 구역의 맞은편, 현재의 덕수초등학교 자리였다. 1921년 3월 순명효황후의 신주와 의효전 건물이 창덕궁의 신선원전新璿源殿 영역으로 옮겨졌으며, 현재는 의로전懿老殿으로 불리고 있다. 이 현판은 1904년 의효전이라는 전호가 정해진 당시부터 순종과 순명효황후의 신
주가 종묘에 부묘된 1928년까지 걸려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영왕서실 현판
영친왕이 8세 때인 1904년 ‘영왕서실英王書室’이라고 쓴 현판이다.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황태자를 제외한 고종의 아들들은 친왕親王으로 책봉되었다. 고종과 순헌황귀비 엄씨의 아들인 이은李垠은 1900년 7월 영친왕英親王에 봉해졌으며, 영친왕부는1902년 2월 7일 경운궁 내에 신설되었다. 서실書室이라고 하였으므로 영친왕부 내 서재에 걸렸을 것으로로 추정되나 구체적 장소는 확인되지 않는다.
구여당 현판
1913년 함녕전咸寧殿 뒤편에 세워진 2층 건물인 구여당의 현판이다. 퇴위 후 덕수궁에 유폐되 다시피 했던 고종의 휴식 장소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1919년 고종 승하 이후에는 순종이 덕수궁에 방문했을 때 거처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 덕수궁의 공원화 과정에서 철거되었다.
3. 경운궁 궐내각사闕內各司
궐내각사闕內各司는 국왕이나 세자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거나 궁궐 시설을 관리하고 궁중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등 궁궐 안에 위치하여 그 역할을 하는 관서들을 말한다. 경운궁의 경우 정문인 대안문大安門과 그 북쪽의 평장문平章門, 그리고 포덕문布德門을 들어서면 바로 만나는 구역, 즉 경운궁의 동쪽과 북쪽 담장 안 일대에 궐내각사에 해당하는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경운궁 궐내각사의 구성은 갑오개혁과 대한제국 설립을 거치며 크게 바뀐 관제에 따라 궁내부宮內府와 원수부元帥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궐내각사闕內各司는 국왕이나 세자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거나 궁궐 시설을 관리하고 궁중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등 궁궐 안에 위치하여 그 역할을 하는 관서들을 말한다. 경운궁의 경우 정문인 대안문大安門과 그 북쪽의 평장문平章門, 그리고 포덕문布德門을 들어서면 바로 만나는 구역, 즉 경운궁의 동쪽과 북쪽 담장 안 일대에 궐내각사에 해당하는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경운궁 궐내각사의 구성은 갑오개혁과 대한제국 설립을 거치며 크게 바뀐 관제에 따라 궁내부宮內府와 원수부元帥府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회계원 현판
궁내부宮內府에 소속되어 왕실 경비의 예결산 등 재부財簿를 담당한 관서인 회계원의 현판이다.
회계원이 존속했던 1895~1905년 사이에 경운궁 궐내각사 내 궁내부 청사 안에 걸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내부는 1894년 갑오개혁 당시 왕실 관련 업무를 의정부의 행정 업무와 분리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인데, 대한제국이 설립되면서 황제의 명을 직접 집행하는 기관으로 역할이 확대되었다. 궁내부 청사는 원수부 북쪽, 포덕문布德門으로 들어서면 남쪽에 위치했는데, 현존하는 배치도에 따르면 중정형中庭形 평면의 목조건축 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육군법원 현판
원수부元帥府 검사국 소속 대한제국 육군법원의 현판이다. 원수부는 고종황제가 대원수로서 중앙과 지방의 육·해군을 직접 총괄 지휘하기 위해 1899년 설치한 관서이다.
육군법원은 1900년 9월 제정된 육군법률陸軍法律에 의거하여 한성과 지방의 각군대와 군인의 민사·형사 사건, 포로범죄 등을 심판하고 감옥을 관장하였다. 원수부는 대안문大安門 오른편에 궁장과 연결된 2층 벽돌조 건물에 위치하였다. 이 현판은 육군법원이 존속한 1900년부터 원수부가 폐지된 1904년까지 원수부 건물 안에 걸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글.사진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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