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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황복사지에서 드러난 신라 왕실사원의 위엄

노촌魯村 2018. 1. 31. 13:00

()황복사지에서 드러난 신라 왕실사원의 위엄

-경주 낭산 일원 발굴현장 설명회 개최 / 2018.1.31. 오후2-

 

문화재청(청장 김종진)의 허가를 받아 ()성림문화재연구원(원장 박광열)발굴조사를 하고 있는 경주 낭산 일원(사적 제163)에서 신라 왕실사원의 위엄을 보여주는 대석단(大石壇) 기단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기단의 건물지와 회랑(回廊, 지붕이 있는 긴 복도)지가 발견되었고, 연못 등에서 금동입불상과 보살입상 7점 등 1,000여점의 유물이 나왔다.

* 발굴현장: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184번지 황복사지 삼층석탑 남쪽 일원

* 대석단(大石壇): 크고 정교하게 가공한 돌로 조성한 건물의 단

 

황복사(皇福寺)삼국유사에 의하면 654(진덕여왕 8)에 의상(義湘)대사(625~702)29세에 출가한 곳으로, 1942년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 해체 수리할 때 나온 황복사탑 사리함(舍利函)에서 확인된 명문 종묘성령선원가람(聖靈禪院伽藍)’을 통해 신라 왕실의 종묘적 기능을 한 왕실사원일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이다. 당시 삼층석탑의 해체수리 과정에서 금제여래입상(국보 제79), 금제여래좌상(국보 제80)도 확인되어 주목을 받았다.

 

문화재청은 () 황복사지(皇福寺址)의 실체 규명과 유적의 보존정비를 위해 20166월부터 2017년 4월까지 경주시 구황동 100번지 일대의 과수원과 경작지(4,628)를 대상으로 1차 발굴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효성왕(재위 737~742)을 위한 미완성 왕릉과 통일신라 시대 건물지, 도로 등을 확인하였다.

 

20178월부터 시작한 2차 조사에서는 ()황복사지 삼층석탑 동쪽으로 약 30m 떨어진 경작지(4,670)를 대상으로 했는데, 조사결과 통일신라 시대 십이지신상 단 건물지, 대석단 기단 건물지와 부속 건물지 그리고 회랑 터, 담장 터, 배수로, 도로, 연못 등 신라왕실 사찰임을 확인할 수 있는 대규모의 유구를 발견했.

 

이번 발굴조사에서 왕실사원의 위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물지는 대석단 기단 건물지이다. 서쪽의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에 덧붙여 조성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남쪽 면에는 돌을 다듬은 장대석(長臺石), 북쪽 면에는 자연석을 쌓아 약 60m에 이르는 대석단을 구축한 후 전면 중앙부 북쪽에 돌계단을 설치하였다. 대석단 기단 건물지는 내부를 회랑을 돌린 독특한 구조로 이는 현재까지 경주지역에서 확인되지 않은 가람배치 방식이다. 이러한 특징을 통해 특수한 용도의 건물이거나 ()황복사지의 중심 건물일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십이지신상 기단 건물지는 십이지신상 4((, 토끼), (, ), (, ), (, ))조각된 석재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놓여 있으며, 대석단 건물지와 함께 ()황복사지의 중요 전각지로 보고 있다. 십이지신상은 신라 왕릉에서 확인된 십이지신상 탱석과 비교했을 때 더 발달한 형태를 보이며 김유신묘(사적 제21) 십이지신상과 더불어 조각미가 뛰어나다. 이 탱석의 도상(圖像)은 김유신묘와 헌덕왕(809~826) 능의 십이지신상보다 앞서며, 제작 연대는 8세기 중후반으로 추정한다. 축조 당시 십이지신상 탱석은 다른 왕릉에서 옮겨와 건물지의 기단석으로 다시 사용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 탱석(撑石): 면석과 봉토가 붕괴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돌

 

한편, 출토된 1,000여 점 이상의 유물은 대부분 토기와 기와이다. 대체로 79세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장식이 화려한 신장상 화상석, 치미, 기와 등을 통해 당시 격조 높은 건축물이 들어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금동불입상과 금동보살입상 등 7점의 불상 유물은 ()황복사지가 7~10세기까지 신라 왕실사원으로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 신장상(神將像): 부처를 비롯한 불자들을 수호하는 신장(사천왕 등)의 조각상

* 화상석(畫像石): 장식으로 신선, , 짐승 따위를 새긴 돌

* 치미(鴟尾): 지붕의 장식기와로, 건물의 용마루 양 끝에 올려 건물의 위엄을 높이고, 귀신을 쫓는 역할을 함

 

또한, 1차 조사와 더불어 이번에 확인된 건물의 배치나 도로 등을 볼 때, 낭산의 동쪽에 해당하는 지금의 보문동 지역도 통일신라 시대의 도시계획의 하나인 방리(坊里制, 바둑판 모양으로 도시를 설계)에 의한 계획도시임을 알 수 있다.

 

번 발굴조사 성과는 2018년 1월 31일 오후 2시에 열리는 발굴현장 설명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더 자세한 내용은 ()성림문화재연구원(김희철, 054-741-2831)으로 문의하면 된다.

 

이번 2차 발굴조사는 통일신라 시대 왕실사원과 신라왕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문화재청은 경주시와 함께 앞으로도 황복사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노력을 꾸준히 이어갈 계획이다.


<글. 사진 출처 : 문화재청>


발굴 前의 (傳)황복사지

 

 경주구황리삼층석탑(慶州九黃里三層石塔 국보  제37호 )

신라 신문왕이 돌아가신 후 그 아들인 효소왕이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황복사지석탑’으로 불리기도 한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며,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이나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에 비해 작아진 규모이다. 기단의 양식은 두 탑과 거의 비슷하나, 기단의 각 면에 새겨진 가운데 기둥이 3개에서 2개로 줄어들어 있다. 탑신부도 여러개의 돌로 짜맞추는 대신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어, 달라진 석탑의 양식을 보여준다. 지붕돌은 윗면이 평평하고 네 귀퉁이가 살짝 올라가 경쾌하며, 밑면에는 5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의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효소왕 1년(692)에 세워진 탑으로, 이후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즉위한 지 5년만인 706년에 사리와 불상 등을 다시 탑안에 넣어 앞의 두 왕의 명복을 빌고, 왕실의 번영과 태평성대를 기원하였다. 1943년 탑을 해체하여 수리하면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는데, 그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 탑을 건립하게 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어 탑의 건립 연대와 조성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면서도 전기 석탑양식의 변화과정이 잘 담겨져 있어 소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땅속에 묻힌 12지상

 

 

 

 귀부

귀부

 황복사지 동편의 무덤의 석재

 황복사지 내에 있는 우물

 

 당간지주(절단이 되어 아래 부분이 남아 있음)

 

國寶 79호 경주 구황리 금제 여래좌상

통일신라 성덕왕 5년(706)에 사리함 속에 순금으로 된 아미타상을 넣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이 아닌가 추측된다.

國寶 80호 경주구황리금제여래입상

연화대좌(蓮華臺座)에 푸른 녹이 있을 뿐

광배와 온몸에는 금빛이 찬란하다.

제작은 신라(新羅) 성덕왕(聖德王) 2년(706)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