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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칠곡

송림사松林寺 도덕암(道德庵)

노촌魯村 2018. 8. 5. 23:29


도덕암(道德庵.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산20-5)

도덕암은 435년(눌지왕 18)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다. 968년(광종 19)에 혜거국사(惠居國師)가 대대적으로 중수하여 칠성암(七星庵)이라고 칭하였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의 병재(兵災)를 당한 후, 1620년(광해군 12)에 중수하여, 1632년(인조 10)에 나한전을 건립하였고, 1653년(효종 4)에 기성대사(箕城大師)가 중수하였다. 또한 1854년(철종 5)에 몽계당(夢溪堂) 선의대사(善誼大師)가 중수하여 도덕암이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이후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70년 이상호 주지가 나한전을 중수하면서 요사체 1동을 건립하고 관음전을 중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0년 6월 12일 종각이 증축되었고 1994년 5월 24일 요사채가 증축되었다. 2004년 9월 6일 요사채가 다시 증축되었고 2006년 11월 27일 염화실이 개축되었다.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극락보전




도덕암 몽계당 선의대사 진영(道德庵夢溪堂善誼大師眞影.유형문화재 제387호)

진영은 당시의 전형적인 진영의 구도법에 따라 전신좌안(全身左顔)을 취하고 있다. 선의대사(善誼大師)는 돗자리에 앉아 약간 측면상을 취하고 있는데, 녹색의 장삼을 입고 홍색의 천왕가사를 걸치고 왼손에는 주장자(柱杖子) 오른손에는 염주를 엄지와 검지로 쥐고 앉은 모습이다. 왼손에 들고 있는 주장자가 자로 잰 듯 일직선이다. 또렷하면서도 신비스런 눈빛과 긴 코, 꼭 다물고 있으면서도 미소를 띤 듯 입 꼬리가 약간 올라간 입 등에서 선의대사의 자애로움과 수행자로서의 면모가 느껴지는 듯하다. 진영의 제작 연대 첫 부분이 다행히도 남아있어, 1863년(철종 13)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나한전

칠곡 도덕암 나한전내 제상(道德庵羅漢殿內諸像. 문화재자료 제509호.경북 칠곡군 동명면 한티로 260)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말사인 도덕암은 신라 눌지(訥祗)18년(435) 에 창건 된 것으로 전해지고있는 사찰로서,인조 10년(1632)에 훈장선사(訓將禪師)가 나한전(羅漢殿) 내 16구 나한상 및 사자입상 2구가 각각 배치되어 봉안하고 있으며, 나한전 안에 불단이 있고 그 위에 본존은 결가부좌하고 있으나, 좌우의 보살상은 모두 두 손을 무릎 위에 놓은 형상이며 의상(倚像)인 점이 특이하다. 향우(向右)협시보살(脇侍菩薩)제화가라보살이며, 좌(向左)협시보살은 미륵보살로 전해지고 있다.삼존불은 모두 두발을 제외한 전신(전身)이 도금되어 있다.나한전(羅漢殿) 내 석가삼존불을 중심으로 좌 · 우측에 나한좌상 8구 및 사자입상(使者立像)은 직부사자이며, 향좌 입상은 감재사자로 알려져 있다. 나한 및 입상은 모두 전신(全身)에 백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눈, 눈썹, 입, 수염은 청색, 녹색 등으로 그려져 있고, 들고 있는 지물 및 안고 있는 봉황, 막대기, 호랑이, 수박이 든 소반, 책 등이 다양하며, 이에 따른 표현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사적기(寺蹟記)에 보면 인조 10년(1632)에 훈장선사(訓奬禪師)가 나한전(羅漢殿)을 건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나한전 내 제상(諸像)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선명도가 있는 것으로 보아 문화재자료로 지정하게 되었다.(출처 : 칠곡군청)

좌측 1번째 나한상은 머리, 눈썹, 수염이 모두 흰 나한으로 결가부좌하고 특별한 지물 없이 오른손은 소매 자락에 완전히, 왼손은 들어 턱밑에 대고 있어 수염을 만지작거리는듯한 모습이다. 크기는 상높이 45㎝, 무릎폭 29.7㎝이다.

좌측 2번째 나한상은 눈썹은 희고 정수리부분은 갈색으로 채색한 나한으로 결가부좌하고 왼손으로 호랑이 앞다리를 잡아 버둥거리는 새끼 호랑이 한 마리를 안은 모습이다. 크기는 상높이 46㎝, 무릎폭 30㎝이다.

좌측 3번째 나한상은 정수리부분은 갈색이고, 눈썹, 수염은 흰 나한으로 결가부좌하고 특별한 지물 없이 양손 모두를 소매 자락 안에 숨긴 모습이다. 크기는 상높이 42.5㎝, 무릎폭 29㎝이다.

좌측 4번째 나한상은 정수리부분은 갈색이고, 눈썹, 수염은 흰 나한으로 왼쪽 무릎을 양 손을 모아 당겨 안은 모습으로 얼굴은 약간 오른쪽으로 틀어 우향(右向)하고 있다. 지물은 없다. 크기는 상높이 44㎝, 무릎폭 25.7㎝이다.

좌측 5번째 나한상은 머리, 눈썹, 수염에 초록 채색을 한 나한으로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 황색의 상서로운 동물 한 마리가 버둥거리고 있는 모습이다. 양손으로 짐승의 앞다리를 잡고 있다. 크기는 상높이 44㎝, 무릎폭 27.5㎝이다.

좌측 6번째 나한상은 머리, 눈썹, 수염에 초록 채색을 한 나한으로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 오른손을 얹고 있는 모습이다. 크기는 상높이 46㎝, 무릎폭 26.9㎝이다.

좌측 7번째 나한상은 머리, 눈썹, 수염이 모두 흰 나한으로 결가부좌하고 왼손에는 휘어진 지팡이같은 나뭇가지를 잡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얹은 모습이다. 크기는 상높이 43㎝, 무릎폭 25.6㎝이다.

좌측 8번째 나한상은 머리, 눈썹, 수염에 파란 채색을 한 나한으로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 봉황 한 마리를 안고 있다. 크기는 상높이 46.5㎝, 무릎폭 25㎝이다.

2구의 시자상 은 서 있는 상으로 1구[右]는 오른손에 홀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크기는 전체높이 59.8㎝, 어깨폭 18.8㎝이다. 다른 1구[左]는 왼손에 홀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크기는 전체높이 63.5㎝, 어깨폭 15.5㎝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우측 1번째 나한상은 머리, 눈썹, 수염이 모두 흰 나한으로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 서책 1권을 들고 있다. 크기는 상높이 46.2㎝, 무릎폭 24.5㎝이다.

우측 2번째 나한상은 머리, 눈썹, 수염에 초록 채색을 한 나한으로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 새끼 호랑이 한 마리를 안고 있다. 크기는 상높이 47㎝, 무릎폭 28㎝이다.

우측 3번째 나한상은 머리, 눈썹, 수염에 파란 채색을 한 나한으로 결가부좌한 무릎 위에 수박을 올린 소반을 들고 있다. 크기는 상높이 45㎝, 무릎폭 25㎝이다.

우측 4번째 나한상은 머리, 눈썹, 수염을 흰색으로 채색한 나한으로 오른쪽 무릎을 올리고 그 무릎 위에 오른손을 얹고 있는 모습으로 약간 측면상을 하고 하얀이를 들어내고 웃고 있는 모습이다. 크기는 상높이 44.5㎝, 무릎폭 25.7㎝이다.

우측 5번째 나한상은 머리, 눈썹, 수염에 초록 채색을 한 나한으로 결가부좌한 오른쪽 무릎 위에는 상서로운 초록색 동물 한 마리가 나한의 오른쪽 옆구리에 끼인 채 앞다리를 버덩거리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고, 왼손에는 붉은색 구슬을 든 모습이다. 크기는 상높이 44㎝, 무릎폭 27.8㎝이다.

우측 6번째 나한상은 머리, 눈썹, 수염에 파란 채색을 한 나한으로 오른쪽 무릎을 세워 오른팔을 올린 모습으로 특별한 지물 없이 오른손이 가슴높이까지 올라와 있다. 크기는 상높이 44.5㎝, 무릎폭 26㎝이다.

우측 7번째 나한상은 머리, 눈썹, 수염에 초록 채색을 한 나한으로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지금은 들려진 지물이 없으나 오른손은 주먹을 쥔 모습이고 왼손은 손바닥을 바깥쪽으로 향하고 펼친 형상이다. 크기는 상높이 39.5㎝, 무릎폭 24㎝이다.

우측 8번째 나한상은 머리, 눈썹, 수염에 파란 채색을 한 나한으로 결가부좌하고 특별한 지물 없이 왼손은 소매 자락에 완전히, 오른손은 가슴춤의 법의 사이로 넣어 반쯤 가린 모습으로 이를 드러내고 웃는 모습이다. 크기는 상높이 46㎝, 무릎폭 27.5㎝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어정수(御井水)

고려시대 때 광종은 고승인 혜거대사를 왕사로 모시려고 여러 번 사람을 보내었으나, 대사는 번번이 거절을 했다. 그래서 광종이 친히 칠성암으로 오게 되었다. 대사는 한결 같이 사양하고 광종이 궁궐로 돌아가려고 하자 “이것도 속세의 인연인데, 며칠간 쉬시면서 속병을 고치시지요”라고 하였다. 마침 속병을 앓고 있었던 광종은 3일간 칠성암에서 쉬면서 절에 있던 샘물을 마셨는데, 앓고 있었던 속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로 샘물을 ‘어정수(御井水)’라 부르게 되었고 광종은 칠성암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편 칠성암은 1853년(조선 철종 4)에 도덕암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어느 날 스님의 꿈속에 대사 한 분이 나타나 “지금의 자리보다 어정수가 있는 곳이 부처님의 뜻이니라!”하여 법당을 지금의 어정수가 있는 곳으로 옮겨지었다고 한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어정수 자리는 연소혈(燕巢穴)이므로 지성을 드리면 제비가 복을 물어다 주듯이 소원을 얻는다고 전해진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구덕리 모과나무

구덕리 모과나무는 고려 광종 4년 혜거대사가 도덕암을 창건하면서 심었다고 한다. 높이 10m, 폭 8m 그리고 흉고둘레 4m인 노거수(老巨樹)이다. 2004년 7월에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현재 수간(樹幹)이 울퉁불퉁하며 많은 가지를 형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