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최첨단 비밀병기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11점 출토 -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에서 조선 시대 군사 시설 발굴 / 현장설명회 2018년 11월15일 오후 2시 - |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의 허가를 받아 호남문화재연구원(원장 윤덕향)이 발굴조사 중인 사적 제346호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에서 조선 시대 훈련청과 군기고로 추정되는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또한, 화약 무기인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11점, 자기류, 기와류도 함께 출토되었다. 호남문화재연구원은 2018년 11월 15일 오후 2시 발굴현장에서 이번에 출토한 유물들을 공개하고, 현장설명회를 개최한다.
* 발굴 현장: 전북 고창군 무장면 무장읍성길 45(성내리 149-1, 읍성 내 객사)
* 군기고(軍器庫): 무기를 넣어 두는 창고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 발굴조사는 고창군(군수 유기상)에서 2003년 복원정비 기본계획을 수립한 후 연차적으로 진행하고 있는데, 현재까지 건물지와 시설물, 성벽, 문지, 해자(垓子) 등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성과와 고지형 분석을 바탕으로 읍취루, 동헌의 담장과 삼문, 연지(蓮池, 연못)와 정자 등이 복원되었으며, 북·서벽의 정비 등도 꾸준히 시행 중이다.
* 해자(垓子): 성벽 주변에 인공으로 땅을 파서 고랑을 내거나 자연하천을 이용하여 적의 접근을 막는 시설
이번 발굴조사에서는 훈련청과 군기고로 추정되는 건물지를 비롯하여 10여동의 건물지와 수혈(竪穴, 구덩이), 도로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1호 수혈에서는 조선 시대에 발명된 우리나라 최초의 시한폭탄이라고 할 수 있는 비격진천뢰가 출토되었으며, 바로 인접하여 포대(砲臺) 시설도 확인되었다.
이번 조사에서 나온 비격진천뢰는 모두 11점으로 비교적 온전한 상태이며, 크기는 지름 21㎝, 무게 17~18㎏ 정도로 비슷한 상태다. 현재까지 보고된 비격진천뢰는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인 보물 제860호를 비롯하여 모두 6점에 불과하다. 이번에 발견된 11점은 그 수가 상당히 많고, 새롭게 출토된 점에서 주목된다.
비격진천뢰는 조선 선조 연간에 발명되었으며, 목표물에 날아가서 천둥번개와 같은 굉음과 섬광, 수많은 파편을 쏟아내면서 폭발하는 작렬(炸裂) 시한폭탄으로, 완구(碗口)라는 화포에 장전해서 사용하였다.
* 작렬(炸裂): 포탄 따위가 터져서 쫙 퍼짐
* 완구(碗口): 조선 시대에 만든 화포 가운데 하나로, 대완구·중완구·소완구의 세 가지가 있음
또한, 비격진천뢰가 나온 구덩이 주변에서는 포사격 시설로 추정되는 포대(砲臺)가 조사되었다. 평면이 원형형태로 규모는 지름 170㎝이다. 돌을 편평하게 깔아 견고하게 만든 후 흙을 다져 바닥면을 마련하였다. 또한, 포의 거치대로 추정되는 2개의 기둥구멍이 포대 남쪽에서 확인되었다.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은 1417년(태종 17년)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축성되었다. 조선 시대 읍성 가운데 제작연대가 정확하게 알려진 읍성으로, 행정과 군사의 요충지 역할을 담당했다.
호남문화재연구원은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이 왜구의 방어를 위해 축성된 점으로 보아, 훈련청‧군기고 등 건물지, 비격진천뢰와 포대시설 등은 무장읍성의 군사적인 성격을 고고학적으로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글.사진 출처 : 문화재청>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高敞 茂長縣 官衙와 邑城)
고창무장객사(高敞 茂長客舍)
고창 무장현 관아와 읍성(高敞 茂長縣 官衙와 邑城.사적 제346호.전북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149-1번지 외)
무장읍성은 1417년 무장진의 병마사에 마을을 다스리는 기능을 주어 무장진 병마사 김노(金蘆)가 쌓은 길이 약 1.2km의 평지성이다.
읍성의 남문인 진무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2층 건물이며, 동문터도 잘 남아 있다. 성 주위를 둘러싼 물길인 해자는 폭 4m·길이 574m 정도로 그 흔적만 남아있다. 성 안의 건물로는 객사·동헌이 있다. 『문종실록』에 의하면 읍성의 둘레는 1,470척(약441m)·높이 7척(약2m)이며, 해자의 둘레는 2,127척(약638m)이고 문은 2개가 있으며, 성의 규모를 넓혀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1991년 2월 26일 사적 346호로 지정된 무장읍성은 1417년(태종 17) 무송현(茂松縣)과 장사현(長沙縣)을 합쳐 그 중간 지점에 무장현을 두고 축조한 건물이다. 남문과 동문 등 2개의 성문이 있었으며, 그중 남문인 진무루(鎭茂樓)는 복원되어 있다. 성내에는 취백당(翠白堂)의 동헌과 송사지관(松沙之館)이란 현판이 붙어 있는 객사가 자리하고 있다.
무장읍성은 행정적인 기능보다 군사적인 거점 지역으로서의 기능이 더 강한 읍성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무장현의 설치와 함께 무장진(茂長鎭)의 병마사가 현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무장진은 1417년 왜구 방어를 위해서 전라병영을 광산현(光山縣)에서 강진현(康津縣)으로 옮기면서 방어 지역의 중첩을 피하기 위해 기존의 흥덕진(興德鎭)을 부안진(扶安鎭)으로, 목포진(木浦鎭)을 무장진으로 옮겨 설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종 이후 현감이 파견되면서 무장진은 폐지되었다.(출처: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철비
동치 5년(同治 五5年.1866)이라 한 비는 고종 10년 병인년에 당시 환곡還穀의 폐단을 개정하는 조목을 정해 놓은 것이다. 동치비 좌대에 오목오목 파인 것은 아낙네들이 접시불을 켜고 치성을 드린 흔적이라한다.
고창무장객사(高敞 茂長客舍.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전북 고창군 무장면 무장읍성길 45 (성내리) )
이 건물은 조선시대 무장현의 객사로 쓰이던 것으로 선조 14년(1581)에 건립하였다. 객사는 궐패를 모셔 두고 현의 수령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배례하는 정청과 왕명으로 지방에 내려오는 벼슬아치들의 숙소로 쓰이는 좌·우현으로 구성된다. 이 객사의 정청은바로 위까지 내려와 있다. 눈썹은 초승달처럼 갸날프게 처리되어 있고 눈은 반쯤 뜨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홑처마 맛배지붕 건물로 초석의 석재하부는 네모지게 상부는 반구형으로 다듬고 그 위에 두리기둥을 세운외에 별다른 특징이 없다.
우현은 정청보다 지붕을 낮게 꾸미어 건물의 격식을 낮추었다. 이 밖에 외대문 중문과 좌우량이 있었으나 남아 있지 않다. 석축에 오르 내리는 돌계단등에도 호랑이·구름무늬 등을 양각해 놓아서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건물 정면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객사의 건물은 면사무소로 사용하면서 일부 형질을 변경했던 것을 1990년 원형대로 복원하였다. (출처:문화재청)
취백당(동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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