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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성주

동방사지칠층석탑(東方寺址七層石塔)

노촌魯村 2020. 8. 25. 22:03

동방사지칠층석탑(東方寺址七層石塔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0호. 경북 성주군 성주읍 예산리 269-10번지)

동방사터에 남아 있는 7층 석탑으로, 원래는 9층이었다고 전한다. 절터는 성주읍내에서 왜관으로 가는 국도를 따라 약 1㎞ 떨어진 도로변에 자리잡고 있는데,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절이 모두 불타버리고 현재는 이 석탑만 남아 있다.

기단(基壇)의 네 면과 탑신(塔身)의 각 몸돌에는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으며, 특히 1층 몸돌에는 문(門)모양을 깊게 새겼다. 1 ·2 ·3층 지붕돌 네 귀퉁이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으로, 고려시대의 자유로운 조각양식이 엿보인다.

탑이 자리하고 있는 성주지역의 지형은 소가 누워서 별을 바라보는 형상으로, 이 때문에 냇물이 성주읍을 돌아 동쪽으로 빠져 나가는 것으로 보아, 성주 땅의 기운이 냇물과 함께 빠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이 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성주 땅의 기운을 보호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일명 ‘지기탑(地氣塔)’이라 부르기도 한다.(출처 : 문화재청)

 

성주읍에서 왜관으로 나오는 국도를 따라서 1km 가량 가면 우측 하 천변 수전(水田) 가운데 유존하는데 탑의 구조는 일층의 작은 기단 위에 칠층탑을 올린 양식으로 탑신, 탑개부가 각각 단석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초층탑신에는 조그만한 감실을 마련했고, 각층 탑신에 는 우주를 각출했다. 각층 실개는 추녀가 짧고 중후하며 우주의 전 각부에 사변의 연화문을 양각하여 중앙에 소공을 뚫어 풍탁(風鐸)을 걸도록 했다. 그리고 옥개 받침은 3단으로 각출했다. 신라 석탑에서 볼 수 있는 강경성이나 직선적인 것은 보이지 않고 옥개 추녀가 중후하고 기단이 왜소하여 안정성이 없는 점 등은 고려시대 석탑양식 을 대표하는 것이라 하겠다.(참고 자료 : 문화재관리국, 1977, <<문화유적총람>> 중, 298. : 경상북도)

 

동방사지 칠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0호)은 현재 높이 10.4m이며, 1974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3단의 지대석 위에 단층기단이 있고, 그 위에 7층의 탑신이 올려져 있는 모습이다. 3단의 지대석은 각 단별로 4매, 6매, 5매의 장방형 석재를 엇물려쌓은 것이며, 각 단의 높이는 36~38㎝이다. 최상단의 상면에는 호형 2단의 괴임이 있다. 기단면석은 4매의 석재를 결구한 것 인데, 각 면석의 형태가 다르다. 서쪽의 면석은 우주 2주, 탱주 1주의 온전한 면석 형태이고 북쪽, 남쪽의 것은 탱주 1주와 우주 1주를 새긴 것, 동쪽의 면석은 탱주 1주만

을 새긴 것이다. 높이는 160㎝이다. 기단갑석은 1석이며, 상면에 괴임은 없고 하면에 1단의 부연이 있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 1석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7층 옥개석 상면에는 우주가 있는 석재 1매가 올려져 있다.

이 석재로 인하여 앞서 언급한 일제강점기 자료에는 ‘八重塔’으로 보고되기도 하였으며, 이를 탑신석으로 인식하여 원래 9층탑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1층 탑신 남면에는 감실이 뚫려 있으며, 내부가 깊게 파여 있다.

감실 상부에는 인방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되는 단이 새겨져 있다. 한편 1층 탑신의 남면을 제외한 나머지 면과 2층 탑신 각 면에는 1주씩의 탱주가 새겨져 있다.

옥개석은 각각 3단의 옥개받침과 물끊기홈을 갖추고 있으며, 상면에 괴임은 없다. 전각부는 다소 두꺼우며, 모서리의 반전은 심하다. 모든 옥개석의 각 모서리에는 풍탁공이 있는데, 특히 1층 옥개석 풍탁공 주변에는 연화문이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

이 석탑은 단순한 기단부의 형태, 질서가 파괴된 부재의 결구수법, 형식에서 벗어난 장엄 등의 요소로 보아 고려중기 이후에 제작된 석탑으로 판단된다.(한국의 사지 下 성주군 동방사지p133)

           

초층탑신에는 조그만한 감실을 마련했다
1층 옥개석 풍탁공 주변에는 연화문이 도드라지게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