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기타/각종정보

고려 고승 초상조각‘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국보로 지정 예정

노촌魯村 2020. 9. 3. 13:41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고려 시대 고승(高僧)의 실제 모습을 조각한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보물 제999호)을 국보로 지정 예고하고, 15세기 한의학 서적 ‘간이벽온방(언해)’과 17세기 공신들의 모임 상회연(相會宴)을 그린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 등 2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하기로 하였다.

 

국보로 지정 예고되는 보물 제999호「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陜川 海印寺 乾漆希朗大師坐像)」은 신라 말~고려 초까지 활동한 승려인 희랑대사(希朗大師)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초상조각[祖師像;僧像]으로서, 고려 10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 희랑대사: 구체적인 생존시기는 미상이나 조선 후기 학자 유척기(兪拓基, 1691~1767)의「유가야기(游加耶記)」에 따르면, 고려 초 기유년(己酉年, 949년 추정) 5월에 나라에서 시호를 내린 교지가 해인사에 남아 있었다고 해, 949년 이전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됨. 화엄학(華嚴學)에 조예가 깊었던 학승(學僧)으로, 해인사의 희랑대(希朗臺)에 머물며 수도에 정진했다고 전하며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도움을 주어 왕건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해인사 중창에 필요한 토지를 하사하고 국가의 중요 문서를 이곳에 두었다고 함

 

유사한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는 고승의 모습을 조각한 조사상을 많이 제작했지만, 우리나라에는 유례가 거의 전하지 않으며 ‘희랑대사좌상’이 실제 생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재현한 유일한 조각품으로 전래되고 있다.

 

‘희랑대사좌상’은 조선 시대 문헌기록을 통해 해인사의 해행당(解行堂), 진상전(眞常殿), 조사전(祖師殿), 보장전(寶藏殿)을 거치며 수백 년 동안 해인사에 봉안(奉安)되었던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가야산기(伽倻山記)」등 조선 후기 학자들의 방문기록이 남아 있어 전래경위에 대해 신빙성을 더해준다.

 

지정조사 과정에서 이루어진 국립문화재연구소(지병목) 보존과학연구실의 과학 조사 결과, 이 작품은 얼굴과 가슴, 손, 무릎 등 앞면은 건칠(乾漆)로, 등과 바닥은 나무를 조합해 만들었고 후대의 변형 없이 제작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앞면과 뒷면을 결합한 방식은 보물 제1919호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처럼 신라~고려 초에 해당하는 비교적 이른 시기의 불상조각에서 확인되는 제작기법이어서 희랑대사좌상의 제작시기를 유추하는데 참고가 된다.

*건칠(乾漆): 삼배 등에 옻칠해 여러 번 둘러 형상을 만든 기법으로, 완성하기 까지 오랜 시간과 정성이 요구됨.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유행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현존예가 많이 남아 있지 않음. 이 기법으로 만든 불상을 보통 ‘건칠불(乾漆佛)’이라 부름

 

건칠기법이 적용된 ‘희랑대사좌상’은 육체의 굴곡과 피부 표현 등이 매우 자연스러워 조선 후기에 조성된 ‘신륵사 조사당 목조나옹화상’(神勒寺 祖師堂 木造懶翁和尙, 1636년), ‘부석사 조사당 목조의상대사상(浮石寺 祖師堂 木造義湘大師像, 조선 후기)’, ‘괴산 각연사 유일대사상(槐山 覺淵寺 有一大師像, 조선 후기)’ 등 다른 조각상들과 달리 관념적이지 않고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마르고 아담한 등신대 체구, 인자한 눈빛과 미소가 엷게 퍼진 입술, 노쇠한 살갗 위로 드러난 골격 등은 매우 생동감이 넘쳐 생전(生前)의 모습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희랑대사좌상’의 또 다른 특징은 ‘흉혈국인(胸穴國人, 가슴에 구멍이 있는 사람)’이라는 그의 별칭을 상징하듯, 가슴에 작은 구멍(폭 0.5cm, 길이 3.5cm)이 뚫려 있는 것이다. 이 흉혈(胸穴)은 해인사 설화에 의해 희랑대사가 다른 스님들의 수행 정진을 돕기 위해 가슴에 작은 구멍을 뚫어 모기에게 피를 보시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고승의 흉혈이나 정혈(頂穴, 정수리에 난 구멍)은 보통 신통력을 상징하며, 유사한 모습을 ‘서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1024년, 보물 제1000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에 문헌기록과 현존작이 모두 남아있는 조사상은 ‘희랑대사좌상’이 유일하며, 제작 당시의 현상이 잘 남아 있고 실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면의 인품까지 표현한 점에서 예술 가치도 뛰어나다.

 

후삼국 통일에 이바지하였고 불교학 발전에 크게 공헌한 희랑대사라는 인물의 역사성과 시대성이 뚜렷한 제작기법 등을 종합해 볼 때, 이 조각상은 고려 초 10세기 우리나라 초상조각의 실체를 알려주는 매우 귀중한 작품이자, 희랑대사의 높은 정신세계를 조각예술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예술‧학술 가치가 탁월하다.

보물로 지정 예고한「간이벽온방(언해)[簡易辟瘟方(諺解)]」는 1525년(중종 20년) 의관(醫官) 김순몽(金順蒙), 유영정(劉永貞), 박세거(朴世擧) 등이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역병(疫病, 장티푸스)이 급격히 번지자 왕명을 받아 전염병 치료에 필요한 처방문을 모아 한문과 아울러 한글로 언해(諺解)해 간행한 의학서적이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본이며 1578년(선조 11) 이전 을해자(乙亥字)로 간행한 것이다.

* 언해(諺解): 한문을 한글(언문諺文)로 번역함

* 을해자(乙亥字): 1455년 을해년에 주조된 금속활자

 

책의 내용을 보면 병의 증상에 이어 치료법을 설명하였고, 일상생활에서 전염병 유행 시 유의해야 할 규칙 등이 제시되어 있다. 국립한글박물관 소장 ‘간이벽온방(언해)’는 ‘선사지기(宣賜之記, 왕실에서 하사했음을 증명해주는 인장)’가 찍혀 있고, 앞표지 뒷면에 쓰인 내사기(內賜記)를 통해 1578년(선조 11)년 당시 도승지였던 윤두수(尹斗壽, 1533~1601)에 의해 성균관박사 김집(金緝, 1610~?)에게 반사(頒賜)된 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이는 이 책이 늦어도 1578년(선조 11년) 이전에 간행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 반사(頒賜): 임금이 신하들에게 물품 등을 내려줌

* 내사기(內賜記): 왕실에서 간행한 서책을 개인이나 문중에게 하사하면서 날짜, 담당자 등을 기록한 문구

* 내사기의 내용: “만력6년(1578) 정월 모일 상균관박사 김집에게 간이벽온방 1건을 내리니 임금이 베푼 은혜에 대한 감사인사는 생략해도 좋음. 도승지 신 윤(수결)” (萬曆六年正月日, 內賜成均館博士金緝簡易辟瘟方一件, 命除謝恩, 都承旨臣尹[手決])

 

이러한 기록 등을 토대로 ‘간이벽온방(언해)’는 현재까지 알려진 동종문화재 중 시기적으로 가장 앞선 판본임을 알 수 있으며, 그 전래가 매우 희귀해 서지학 가치 또한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간이벽온방(언해)」는 조상들이 현대의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보여주는 서적일 뿐 아니라 조선 시대 금속활자 발전사 연구에도 활용도가 높은 자료인 만큼 보물로 지정해 보존‧관리하는 것이 타당하고 판단한다.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新舊功臣相會題名之圖 屛風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6호)」은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품으로, 선조 연간(1567~1608) 녹훈(錄勳)된 구공신(舊功臣)과 신공신(新功臣)들이 1604년(선조 37년) 11월 충훈부(忠勳府)에서 상회연(相會宴)을 개최한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 녹훈(錄勳): 공신들의 업적을 훈적(勳籍)에 기록하는 일

* 충훈부(忠勳府): 조선 시대 공신이나 그 자손을 우대하기 위한 사무를 담당한 관청

* 당시 상회연 개최는『선조실록』권181, 37년(1604) 11월 13일자 기사를 통해 확인되며,

이 때 이항복(李恒福, 1556~1618)과 유영경(柳永慶, 1550~1608)이 상회연에서 선온(宣醞, 임금이 내린 술)을 하사받은 것에 사례하는 전문(箋文)을 선조에게 올렸다고 함

 

상회연의 신‧구공신은 총 151명으로, 1590년(선조 23년) 2월 1일 녹훈된 광국〮공신(光國功臣)과 평난공신(平難功臣) 42명과 1604년(선조 37년) 6월 25일 녹훈된 호성공신(扈聖功臣), 선무공신(宣武功臣), 청난공신(淸難功臣) 109명을 말한다.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의 좌목(座目)에 적힌 공신들은 1604년 상회연 당시 생존해 있던 63명의 명단으로, 이중 5명(이산해, 류성룡, 정탁, 이운룡, 남절)은 노환(老患)으로 불참했으므로, 실제 행사에 참석한 인원은 58명이다. 좌목은 공신 명칭, 문무관 품계, 자, 생년, 본관, 이름순으로 기재되었다.

* 광국공신(光國功臣):『대명회전(大明會典)』등에 잘못 기재된 이성계의 가계를 바로잡는데 기여한 공신

* 평난공신(平難功臣): 정여립의 모반사건을 평정한 공신

* 호성공신(扈聖功臣):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한 공신

* 선무공신(宣武功臣):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공을 세운 공신

* 청난공신(淸難功臣): 이몽학의 난을 진압한 공신

* 좌목(座目): 차례나 서열 자체를 의미하나, 보통 관리들의 모임에서 참석 명단 또는 명단을 적은 목록을 일컬음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은 총 4폭으로 구성되었다. 왼쪽 제1폭은 상회연의 장면을 그린 것이고, 제2폭~제3폭에 걸쳐 참가자들의 명단을 작성한 것이며, 제4폭은 위쪽의 제목을 제외하고 내용은 비어 있다. 각 폭은 비단 2쪽을 위에서 아래로 길게 이어 붙였으며, 제2폭부터 제4폭까지 위쪽에 붉은 선을 그어 구획을 하고 그 안에 전서체로 제목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新舊功臣相會題名之圖)’을 적었다.

 

넓은 차양 아래 3단의 돌계단 위에서 공신들이 임금이 내린 술을 받는 장면이 중앙에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나무 옆에서 음식을 화로에 데우는 모습 등 준비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림에 그려진 공신들의 숫자와 실제 참석자는 58명으로 일치하며, 위에서 내려 본 부감시(俯瞰視)로 특징만 포착해 선묘로 간략하게 그린 점은 17세기 기록화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다. 원경의 눈 덮인 설산(雪山)과 앙상한 나뭇가지 표현은 상회연 개최 시기인 음력 11월 상순이라는 계절감을 전달해 주며, 필치가 매우 세밀하고 단정하다.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은 공신 관련 그림으로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알려진 작품이라는 점, 제작시기가 명확해 기년작(紀年作, 연도를 알 수 있는 작품)이 드문 17세기 회화 양식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기준작이 된다는 점에서 역사․미술사적으로 의의를 지닌 작품이므로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문화재청은 국보로 지정 예고한 보물 제999호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을 비롯해 보물로 지정 예고한 「간이벽온방(언해)」 등 2건을 포함한 총 3건에 대해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