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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 지정 별서정원 11개소 역사성 검토 결과 공개

노촌魯村 2021. 9. 4. 12:26

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지난 2019년 명승으로 지정된 별서정원 ‘성락원(현재 서울 성북동 별서)’의 만든 이와 변화과정에 대한 역사성 논란 이후 명승 지정 별서정원 22개소의 역사성 검토를 위한 전수조사를 진행 중이다.

 

문화재청은 현재까지 명승 별서정원 22개소 중 예천 선몽대 일원을 비롯한 11개소 정원의 만든 이와 소유자, 정원의 변화과정, 정원 명칭의 유래 등을 고증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몇몇 정원의 지정가치와 역사성에 대한 중요한 정보들을 새롭게 밝혀냈다.

 

먼저, 예천 선몽대 일원,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 구미 채미정 등 3개소에 대해서는 정원의 만든 이와 소유자를 새롭게 밝혀냈다.

▲ 예천 선몽대를 만든 이는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 1538~1591)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의 부친인 이굉(李宏, 1515~1573)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은 그간 소유자가 불분명하여 다양한 가설이 제시된 정원이었으나, 이번 역사성 검토를 통해 19세기 경화세족(京華世族)이었던 애사(靄士) 홍우길(洪祐吉, 1809~1890)이 백석동천 일대 백석실(白石室)을 소유한 사실을 밝혀냈다.

▲ 구미 채미정은 야은 길재를 모시기 위해 조성된 정자로만 알려져 있었으나, 영조 44년(1768) 선산부사 민백종(閔百宗, 1712~1781)이 지역 유림들과 뜻을 모아 건립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 경화세족(京華世族): 대대로 서울에 살며 벼슬을 하던 집안

 

정원은 오랜 시간을 거치는 동안 화재나 목부재의 부식 등으로 중수나 중건 등이 불가피하다. 이번 역사성 검토를 통해 정원의 형태나 위치가 변경된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정원의 역사성 측면에서 중요하다.

 

이번에 중수나 중건이 새롭게 확인된 사례는 순천 초연정 원림, 예천 초간정 원림 2개소다.

▲ 순천 초연정 원림은 헌종 2년(1836) 청류헌(聽流軒) 조진충(趙鎭忠, 1777~1837)이 초가로 지은 것을 그의 아들인 만회(晩悔) 조재호(趙在浩, 1808~1882)가 고종 원년인 1864년에 기와지붕으로 중건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 예천 초간정 원림은 선조 15년(1582)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정자를 지은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죽소(竹所) 권별(權鼈)이 인조 4년(1626) 중수한 뒤에도 화재로 불에 타 그대로 둔 것을 영조 17년(1741) 후손인 권봉의(權鳳儀)가 기존의 터가 좋지 않다고 여겨 현재의 자리로 옮겨 중수한 것이 전해지고 있다.

 

정원의 유래가 새롭게 확인된 곳은 담양 소쇄원, 거창 수승대, 담양 식영정 일원 등 3개소다.

▲ 담양 소쇄원은 만든 이인 양산보(梁山甫, 1503∼1557)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 ‘소쇄’라는 이름은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3)이 ‘맑고 깨끗하다’라는 뜻으로 지어준 것이다.

▲ 거창 수승대의 이름은 퇴계 이황의 제명시(수승대에 부치다, 寄題搜勝臺)를 따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수승대에 앞서 ‘수송대(愁送臺)’라는 명칭이 삼국 시대 옛 신라와 백제의 사신이 이곳에서 송별할 때마다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수송이라 일컬었다는 설과 뛰어난 경치가 근심을 잊게 한다는 설이 전해지면서 조선 시대에는 수승대와 수송대가 혼용되어 불렸다. 오랫동안 불려왔던 명칭의 연원을 확인함에 따라 지정명칭을 개칭 이전의 원래 명칭인 ‘수송대’로 변경하기로 하였다. 또한,

▲ 담양 식영정 일원은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이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을 위해 지어준 정자로 알려져 있으나, 김성원이 정자를 짓고 그의 장인인 임억령이 ‘식영(息影)’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으로 확인되었다.

 

문화재청은 명승 별서정원의 지정가치와 역사성 검토 결과에 따라 고시문과 국가문화유산포털에 게재한 내용을 9월 6일 정정하고, ‘거창 수승대’의 지정명칭 변경에 대해서는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각계의 의견을 수렴한 후, 검토할 계획이다. 또한, 나머지 11개소의 별서정원에 대해서도 올해 고문헌 고증 등 역사성 검토를 실시하여, 명승으로 지정된 모든 별서정원의 진정성 확립을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ㅇ 지정사유 및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정 필요

      

① 예천 선몽대 일원(명승 제19호 / 2006.11.16.)

구분 당초 내용 조정(안)
고시문 ‧선몽대 일원은 예천읍지에 수록된 약 450여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곳으로, 한국의 전통적 산수미를 보여주는 내성천 유역의 대표적 경승지의 하나임
‧지형은 풍수상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으로 내성천의 백사장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으며, 이 곳에 위치하는 선몽대 숲은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은 숲으로 수해방비림·방풍림·수구막이숲 및 비보림의 역할을 해 옴
선몽대는 가묘, 재실, 정자와 단, 비각, 비 등의 시설물과 퇴계 선생의 친필인 선몽대 현판을 비롯하여 곳곳에 서애 류성룡, 약포 정탁, 김상헌, 이덕형 등의 친필시가 남아 있는 등 선인들의 유교적 전통공간으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큰 경승지임



(생략)


















선몽대는 퇴계 이황의 조카이자 기린도 찰방을 지낸 이굉(李宏, 1515~1573)이 창건하고 그의 아들인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 1538~1591) 공이 이어받은 정자로 선몽대글자는 퇴계 선생의 친필로 알려져 있으며, 곳곳에 서애 류성룡, 약포 정탁, 김상헌, 이덕형 등의 친필시가 남아있는 등 선인들의 유교적 전통공간으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큰 경승지임
국가문화유산포털 (생략)
선몽대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며 문하생인 우암(遇巖) 이열도(1538~1591) 공이 1563년 창건한 정자로 “선몽대”글자는 퇴계 선생의 친필로 알려져 있으며, 정자 내에는 당대의 석학인 퇴계 이황,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의 친필시가 목판에 새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어 선인들의 유교적 전통공간으로서 의미가 큰 곳이다.






(후략)
(생략)
선몽대는 퇴계 이황의 조카이자 기린도 찰방을 지낸 이굉(李宏, 1515~1573)이 창건하고 그의 아들인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 1538~1591) 공이 이어받은 정자로 ‘선몽대’ 글자는 퇴계 선생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정자 내에는 당대의 석학인 퇴계 이황,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의 친필시가 목판에 새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어 선인들의 유교적 전통공간으로서 의미가 큰 곳이다.
(후략)

        

② 순천 초연정 원림(명승 제25호 / 2007.12.7.)

구분 당초 내용 조정(안)
고시문 ‧초연정은 순조9(1809) 조진충이 중창하여 옥천조씨의 제각으로 사용하던 것을 이후 조진충의 아들인 조재호가 1880년에 중건하였으며 고종 25(1888) 송병선이 초연정이라 개칭한 정자임






‧초연정의 외원이라 할 수 있는 모후산 자락의 계곡이 초연정과 어우러져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며, 산간계곡에 지어진 별서와 인접한 계원(溪園)으로서 전통적인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사례로 조경사적 가치가 큰 명승지임
‧초연정은 헌종 2(1836) 청류헌(聽流軒) 조진충(趙鎭忠, 1777~1837)이 초가로 지어 옥천조씨의 제각(祭閣)으로 사용하던 것을 이후 조진충의 아들인 만회(晩悔) 조재호(趙在浩, 1808~1882) 고종 원년(1864) 기와지붕으로 중건한 고종 25(1888) 송병선이 초연정이라 개칭한 정자임
(후략)









고시문/
국가문화유산포털
『순천 초연정 원림』은 “초연정 정자와 정자 주변의 외원(外苑)을 함께 일컫는 것으로, “초연정”은 순조9(1809)
조진충이 중창하여 옥천조씨의 제각으로 사용하던 것을 이후 조진충의 아들인 조재호가 1880년에 중건하였으며 고종 25(1888) 송병선이 초연정이라 개칭한 정자이다.



왕대마을 모후산의 자연계곡을 외원(外苑)으로 삼고 있는 초연정은 우리나라 정자가 대부분 풍경이 수려한 강변이나 구릉에 건축하여 확트인 경관을 감상하는 게 목적인데 반해 마을 뒷산의 깊은 자연계곡을 이용하여 지어져 있어 매우 드문 예의 정자라 할 수 있다. 특히 초연정에서는 나무에 가려 계곡은 보이지 않으며 맑은 물소리만 들리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후략)
순천 초연정 원림은 “초연정 정자와 정자 주변의 숲을 함께 일컫는 것으로, “초연정”은 헌종 2년(1836년) 청류헌(聽流軒) 조진충(趙鎭忠, 1777~1837) 초가로 지어 옥천조씨의 제각(祭閣)으로 사용하던 것을 이후 조진충의 아들인 만회(晩悔) 조재호(趙在浩, 1808~1882)가 고종 원년(1864)에 기와지붕으로 중건한 하였으며 고종 25(1888) 송병선이 초연정이라 개칭한 정자이다.
왕대마을 모후산의 자연계곡을 외원(外苑)으로 삼고 있는 초연정은 우리나라 정자가 대부분 풍경이 수려한 강변이나 구릉에 건축하여 확트인 경관을 감상하는 게 목적인데 반해 왕대마을 모후산의 깊은 자연계곡 속에 위치한 독특한 사례이다. 특히 초연정에서는 숲에 가려 계곡은 보이지 않으며 맑은 물소리만 들리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후략)

 

③ 안동 백운정 및 개호송 숲(명승 제26호 / 2007.12.7.)

구분 당초 내용 조정(안)
고시문 (생략)
‧백운정은 귀봉 김수일(1528~1583)이 선조 1(1568) 세운 정자로 내앞마을과 개호송 숲이 한폭의 그림과 같은 경관으로 조망되는 언덕 위에 위치하여 전통적 유교문화 경관을 체험할 수 있는 탁월한 조망점임
(후략)
(생략)
‧백운정은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이 선조 1(1568) 세운 정자로 내앞마을과 개호송 숲이 한 폭의 그림과 같은 경관으로 조망되는 언덕 위에 위치하여 전통적 유교문화 경관을 체험할 수 있는 탁월한 조망점임
(후략)
국가문화유산포털 (생략)
‧“백운정(白雲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75)”은 귀봉 김수일(1528∼1583)이 그의 아버지 청계 김진으로부터 땅을 받아 조선 선조 1(1568) 세운 정자로 반변천 강 언덕 위에서 내앞마을과 개호송 숲이 한폭의 경관으로 조망되는 지점에 위치하여 전통적 유교문화 경관을 체험할 수 있는 탁월한 조망점 역할을 하고 있는 정자이다.
‧“내앞마을”은 의성김씨 씨족 촌락 마을로 의성김씨 종택을 비롯하여 보물 2점과 고택이 잘 보전되어 있으며, <택리지>에 전통 씨족 촌락으로 소개되어 있고,
약300년 전에 제작된 이종악의 <허주산부군수화첩(虛舟山府君水畵帖/半邊川十二景)>에 ‘운정풍범(雲亭風帆)’이라는 제목으로 마을 풍광 그림이 남아 있는 등 500여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후략)
(생략)
‧백운정(白雲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75)은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이 그의 아버지 청계(淸溪) 김진(金璡, 1500~1580)으로부터 땅을 받아 조선 선조 1(1568) 세운 정자로 반변천 강 언덕 위에서 내앞마을과 개호송 숲이 한 폭의 경관으로 조망되는 지점에 위치하여 전통적 유교문화 경관을 체험할 수 있는 탁월한 조망점 역할을 하고 있는 정자이다.
‧“내앞마을”은 의성김씨 씨족 촌락 마을로 의성김씨 종택을 비롯하여 전적 등 다수의 보물과 고택이 잘 보전되어 있으며, 정약용의 택리지 발문에 전통 씨족 촌락으로 소개되어 있고, 약300년 전에 제작된 이종악의 허주산부군수화첩(虛舟山府君水畵帖/半邊川十二景)에 ‘운정풍범(雲亭風帆)’이라는 제목으로 마을 풍광 그림이 남아 있는 등 500여 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후략)

 

④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명승 제36호 / 2008.1.8.)

구분 당초 내용 조정(안)
고시문 백악산(북악산) 뒷자락에 북한산을 정면으로 자연 경관이 수려한 백사골에 조성된 동천(洞天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으로 주변에 흰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백석동천이라 불린다고 함
‧주변 자연경관이 비교적 잘 남아있어 자연경관적 가치가 뛰어나며, 전통조경 양식의 연못, 정자 터, 각자 등이 잘 보존되어 있어 별서정원으로의 가치 또한 큼
백석동천 일대는 19세기 경화세족의 한 사람인 애사(靄士) 홍우길(洪祐吉, 1809~1890) 소유했던 곳으로, 백석실(白石室), 백석곡(白石谷)이라 불렸으며, 인근 주민들은 백사실이라 부르기도 함
(후략)





국가문화유산포털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은 1800년대 도성에 인접하여 조성되었던 별서 관련 유적으로 주변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건물지(사랑채, 안채 등)와 연못 등이 남아있으며, 인근에 “백석동천(白石洞天)”‧“월암(月巖)” 등의 각자(刻字)바위가 위치하고 있다.




























백악산(북악산) 뒷자락에 북한산을 정면으로 자연 경관이 수려한 백사골에 조성된 동천(洞天 :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의 하나로 주변에 흰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백석동천이라 불린다고 전하며, ‘백석이란 중국의 명산인 백석산(白石山)’에서 비롯것으로 백석산백악산(북악산)’에서 착안된 것으로 풀이 된다.
(후략)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은 1800년대 경화세족의 한 사람인 애사(靄士) 홍우길(洪祐吉, 1809~1890)이 소유했던 곳으로, 백석실(白石室), 백석곡(白石谷)이라 불렸으며, 인근 주민들은 백사실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주변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건물지(사랑채, 안채 등)와 연못 등이 남아있으며, 인근에 “백석동천(白石洞天)”‧“월암(月巖)” 등의 각자(刻字) 바위가 위치하고 있다.


‧한편, 백석실, 백석정 등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면, 이광려(李匡呂, 1720∼1783)의 시문에는 허씨의 간정료(看鼎寮)가 있었다고 전하며,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완당전집(阮堂全集)?에는 그의 별서(북서, 北墅)에 백석정 옛 터가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이후 조면호(趙冕鎬, 1803∼1887)의 시에 백석실은 계합상공(桂閤相公)의 별업(別業)이었으나, 당시 홍우길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백악산(북악산) 뒷자락에 북한산을 정면으로 자연 경관이 수려한 백사골에 조성된 동천(洞天 :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의 하나로 주변에 흰 돌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다고 하여 백석동천이라 불린다고 전하며, ‘백석이란 중국의 명산인 백석산(白石山)’에서 비롯된 것으로 백석산백악산(북악산)’에서 착안된 것으로 풀이 된다. (후략)

 

⑤ 담양 소쇄원(명승 제40호 / 2008.5.2.)

구분 당초 내용 조정(안)
고시문 ‧조선 중종 때 문인인 양산보(1503∼1557)가 은둔하며 경영한 별서정원으로 현재 남아있는 조선시대 별서정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으며, 「소쇄원도」 목판본과 김인후의 「소쇄원사십팔영」 등 정원 조성 고문헌이 전하는 등 조경사적 가치가 큰 정원유적임












‧계류를 따라 정자, 담장, 화계, 연지 등이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조성되어 자연의 경관미를 극대화한 우리 선조들의 정원 조성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정원 명승지임
‧조선 중종 때 문인인 양산보(梁山甫, 1503∼1557)가 은둔하며 경영한 곳으로 조선시대 별서정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남아있음
‧양산보는 스승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정원을 지었는데,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3)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의 ‘소쇄(瀟灑)’라는 이름을 지어줌
「소쇄원도」 목판본과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의 「소쇄원사십팔영」 등 정원 조성 고문헌이 전하는 등 조경사적 가치가 큰 정원유적임
(후략)
국가문화유산포털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 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양산보(1503-1557)는 스승인 조광조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의 정원인 소쇄원을 지었다.






‧정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로 되어 있다. 4.060의 면적에 기능과 공간의 특성에 따라 애양단구역, 오곡문구역, 제월당구역, 광풍각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원 내에는 대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들로 된 숲이 있다. 주위에는 흙과 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는데 ‘애양단’, ‘오곡문’, ‘소쇄처사양공지려’의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소쇄원 안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을 목판에 새긴 그림이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생략)


‧양산보(梁山甫, 1503∼1557)는 스승인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가 유배되자 세상의 뜻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정원을 지었는데,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 1493~1583)맑고 깨끗하다뜻의 소쇄(瀟灑)’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정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로 되어 있다. 4,060의 면적에 기능과 공간의 특성에 따라 애양단구역, 오곡문구역, 제월당구역, 광풍각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후략)

 

⑥ 예천 초간정 원림(명승 제51호 / 2008.12.26.)

구분 당초 내용 조정(안)
고시문
/
국가문화유산포털
‧초간정은 조선 선조 때 학자인 초간 권문해(1534~1591)가 오랜 관직생활과 당쟁에서 벗어나 자연을 즐기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창건한 정자로 맑은 계곡과 푸른 소나무림 사이의 암석 위에 위치하고 있음.




















‧조선시대 사림의 은일(隱逸)생활과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바탕으로 하는 선조들의 자연관을 보여주는 명승지로 바위를 휘돌아 흐르는 계류가 시원한 운치를 자아내는 등 경관적 가치가 큼.
‧초간정은 조선 선조 때 학자인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 1534~1591)가 오랜 관직생활과 당쟁에서 벗어나 자연을 즐기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선조 15(1582) 창건한 정자로 맑은 계곡과 푸른 소나무림 사이의 암석 위에 위치하고 있음.


창건 이후 임진왜란 중 소실되었고 아들 죽소(竹所) 권별()이 인조 4(1626) 중수하였으나 다시 화재로 불에 타 그대로 두었다가 후손인 권봉의(權鳳儀)가 여러 후손들에게 부탁해 영조 15(1739) 중수를 도모하였고 영조 17(1741) 기존의 터가 좋지 않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중수하였음.


(후략)







 

⑦ 구미 채미정(명승 제52호 / 2008.12.26.)

구분 당초 내용 조정(안)
고시문
/
국가문화유산포털
‧채미정은 고려에서 조선의 왕조 교체기에 두 왕조를 섬기지 않고 금오산 아래 은거한 야은길재(1353~1419)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영조 44(1768)에 금오산 아래 건립한 정자임.




‧채미정은 멀리 바라보이는 금오산과 채미정 전면의 맑은 계류와 수목들이 채미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경관미가 뛰어난 명승지임.
‧채미정은 고려에서 조선의 왕조 교체기에 두 왕조를 섬기지 않고 금오산 아래 은거한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영조 44(1768)선산부사(善山府使) 민백종(閔百宗, 1712~1781) 현지 유림(儒林)들과 의논하여 금오산 아래 건립한 정자임.
(후략)





 

⑧ 거창 수승대(명승 제53호 / 2008.12.26.)

구분 당초 내용 조정(안)
지정명칭 거창 수승대 거창 수송대
고시문
/
국가문화유산포털
‧수승대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영남 제일의 동천으로 쳤던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하나인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 위치하는 화강암 암반으로 깊고 긴 계곡과 주변 임야와 어우러져 탁월한 자연경관을 보여줌










수승대명칭과 관련하여 퇴계 이황의 개명시와 갈천 임훈의 화답시가 전하고, 수승대 양쪽에 위치하는 요수정과 관수루 등이 잘 남아 있어 요산요수하는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산수유람 문화가 결합된 장소적 상징성이 큰 명승지임
‧수송대(愁送臺)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영남 제일의 명승 ‘안의삼동(安義三洞)’ 중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 위치한 화강암 암반으로 깊고 긴 계곡과 주변 임야와 어우러져 탁월한 자연경관을 보여줌
수송대라는 명칭은 옛 신라와 백제의 사신이 이곳에서 송별할 때마다 근심을 이기지 못하여 수송이라 일컬었다는 설과 뛰어난 경치가 근심을 잊게 한다는 설이 전해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중종 38(1543) 수송대란 명칭이 좋지 않다고 느껴 수승대(搜勝臺)로 이름을 고쳤다고 술회한 시와 갈천 임훈의 화답시 등이 전함
(후략)

 

⑨ 담양 식영정 일원(명승 제57호 / 2009.9.18.)

구분 당초 내용 조정(안)
고시문
/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 명종때 서하당(棲霞堂) 김성원이 그의 장인 석천(石川)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로, 이곳에서 송강(松江) 정철이 성산별곡, 식영정 20영 등 한시와 가사 및 단가 등을 남겨 송강문학의 산실이 되었고, 우리나라 고전문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곳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곳임








‧식영정(息影亭)은 주변 무등산과 광주호 등이 있어 자연환경과 조화미가 뛰어나고 주변의 소나무 고목과 송림, 배롱나무 등이 있어 아름다운 경승지임
‧조선 명종 15(1560) 서하당(棲霞堂) 김성원(金成遠, 1525~1597)이 정자를 짓고 그의 장인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1568)식영(息影)’이라는 이름을 지어줌
‧이곳에서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이 성산별곡, 식영정 20영 등 한시와 가사 및 단가 등을 남겨 송강문학의 산실이 되었고, 우리나라 고전문학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곳으로 역사·문화적 가치가 있는 곳임


(후략)

 

ㅇ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정 필요

          

① 보길도 윤선도 원림(명승 제34호 / 2008.1.8.)

구분 당초 내용 조정(안)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 곳은 조선시대 시인인 고산 윤선도(1587~1671)가 제주도로 가다가 보길도의 자연에 감동하여 머물며 만든 원림이다. 그는 51세이던 인조15(1631)부터 13년 간 이 원림을 만들어 머물며 ‘어부사시사’ 등 많은 글을 남겼다. ‧ 이 곳은 조선시대 시인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가 제주도로 가다가 보길도의 자연에 감동하여 만든 원림으로 51세이던 인조 15(1637)부터 이곳에 머물며 ‘어부사시사’ 등 많은 시문을 남겼다.

 

② 서울 성북동 별서(명승 제118호 / 2020.9.2.)

구분 당초 내용 조정(안)
국가문화유산포털 1) 지정가치 : (생략)
2) 현황
‧서울 지역에 드물게 남아있는 조선시대 정원으로서, 전통 정원 요소의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있고 경관적으로도 보존할 가치가 있는 명승이다.
‧시냇물을 따라 앞뜰, 안뜰, 바깥뜰로 나눌 수 있는데, 앞뜰에는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로 모이는 쌍류동천(雙流洞天)이 있다. 안뜰을 감싸주는 용두가산(龍頭假山)에는 200~300년 되는 엄나무를 비롯하여 느티나무,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다래나무, 말채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안뜰의 영벽지(影碧池) 주위에는 인수위소지(引水爲小池), 장외가(檣外家), 청산일조(靑山壹條) 등의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고 바깥뜰의 고엽약수 등과 함께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경관을 보이고 있다.
‧별서를 만들기 전부터 오랫동안 경승지로 이용되어왔던 곳이며, 조선 고종 때 내관이자 문인인 황윤명(黃允明, 1844∼1916)이 조성한 별서이다. 육교시사(六橋詩社) 시회(詩會)가 열리기도 했으며,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의 피난처가 되었고, 의친왕 이강(李堈, 1877~1955)이 별궁으로 사용한 역사적 가치도 있다.
1) 지정가치 : (생략)
2) 현황
‧서울 지역에 드물게 남아있는 조선시대 정원으로서, 전통 정원 요소의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있고 경관적으로도 보존할 가치가 있는 명승이다.
‧시냇물을 따라 앞뜰, 안뜰, 바깥뜰로 나눌 수 있는데, 앞뜰에는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로 모이는 쌍류동천(雙流洞天)이 있다. 안뜰을 감싸주는 용두가산(龍頭假山)에는 200~300년 되는 엄나무를 비롯하여 느티나무, 소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다래나무, 말채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안뜰의 영벽지(影碧池) 주위에는 인수위소지(引水爲小池), 장외가(檣外家), 청산일조(靑山壹條) 등의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고 바깥뜰의 고엽약수 등과 함께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경관을 보이고 있다.
‧별서를 만들기 전부터 오랫동안 경승지로 이용되어왔던 곳이며, 조선 고종 때 내관이자 문인인 춘파(春波) 황윤명(黃允明, 1844∼1916)이 조성한 별서이다. 육교시사(六橋詩社) 시회(詩會)가 열리기도 했으며, 갑신정변 당시 명성황후의 피난처가 되었고,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1877~1955)이 별궁으로 사용한 역사적 가치도 있다.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