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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사묘·재실 문화재 등 10건 ‘보물’ 지정- 조선시대 유교건축 8건, 지방관아 중 내아와 통일신라 석탑 각 1건 -

노촌魯村 2022. 11. 24. 15:34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경기도 유형문화재 「남한산성 숭렬전」 등 10건의 문화재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11월 25일 지정한다.

이번에 지정되는 문화재들은 사묘(祠廟)·재실(齋室)․정려각(旌閭閣) 같은 유교건축 8건, 내아(內衙)와 통일신라 석탑 각 1건이며, 지역별로 살펴보면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북도 각 1건, 전라북도와 경상북도 각 2건, 전라남도 3건이다.

* 사묘(祠廟): 선조 혹은 선현의 신주(神主)나 영정(影幀)을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

* 재실(齋室):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로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숙식과 제사음식 장만 등을 하는 장소

* 정려각(旌閭閣): 충신이나 효자에게 임금이 하사한 편액을 걸어두는 건물

* 내아(內衙): 지방 관아 건축에서 지방관의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살림집에 해당

사묘와 재실은 조선시대에 제사의례를 중요시하던 성리학이 정착되면서 확산되었고, 조상과 선현에 대한 제향이 주목적이었으나 후손에 대한 강학기능을 수행했던 곳이기도 하다. 가문의 지위를 높이며, 지역의 정치적 기반을 견고히 하려는 경향과도 관련 깊은 건축물이다.

* 강학(講學): 학문을 닦고 연구함

문화재청은 2018년부터 건조물 문화재에 대한 지정가치를 조사한 결과, 2019년에는 누정(樓亭) 문화재 10건, 2020년에는 서원‧향교 20건, 2021년에는 관아건축 8건을 보물로 지정한 바 있다. 지난해부터는 전국의 250여 건의 사묘‧재실 등을 조사했으며 이중 전문가 검토를 거쳐 이번에 8건의 유교건축(儒敎建築) 문화재를 보물로 지정하게 되었다.

이번에 보물로 지정된 8건의 유교건축 중 「남한산성 숭렬전(南漢山城 崇烈殿)」(경기도 광주시)은 병자호란을 당해 임금이 남한산성에 머물면서 백제시조인 온조왕(溫祚王)에 대해 제사를 지낸 일을 계기로 1638년에 세워진 사묘이다. 1661년 현 위치로 옮겨진 이후 정조 때에 ‘숭렬전’이란 명칭이 내려졌으며, 다른 역대 시조묘에게 올리는 격식을 따라서 제사를 거행하면서 현재까지 그 위치를 지키고 있는 곳이다. 창건 사실이 문헌을 통해 증빙되고, 17세기에 이건한 뒤에 지은 건물이 현재까지 원위치를 지키고 있으며, 제향이 계승되고 있어 역사적, 문화사적 가치가 높다. 또한 간결하고 절제된 건축 형식과 구조는 17세기에 건립된 조선시대 사묘의 전형을 따르고 있어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

「영월 창절사(寧越 彰節祠)」(강원도 영월군)는 사육신 등 열 명의 충신(忠臣)을 제향하기 위해 1685년에 건립된 곳으로 1705년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보통의 사당에 비하여 비교적 규모가 크며, 사당 외에도 유생들이 모여 학문하는 강당(講堂)과 동서재(東西齋), 배견루(拜鵑樓, 누각)를 갖추고 있어, 일반적인 조선시대 서원과 같은 구성을 보여준다. 인근에 위치한 영월장릉과 함께 영월지역에서 단종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건립되었으며, 건축물에 남아 있는 익공의 형태 등이 18세기 건축적 특징을 반영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영동 세천재(永同 歲薦齋)」(충청북도 영동군)는 충주박씨 황간파(忠州朴氏 黃澗派) 박세필(朴世弼)이 1691년에 처음 지은 재실로, 그의 부친인 박지찬(朴之燦)과 아들인 박수소(朴守素)까지 3대를 제향하는 공간이자 후손들의 강학을 위한 공간이다. 광복 후에도 독립운동가 성하식(成夏植)이 훈장을 맡아 교육했고, 초대 부통령인 이시영(李始榮)이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충청지역을 대표하는 재실 건축의 전형성과 지역성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창건 당시의 건축 부재를 포함하여 간결한 형식의 평면 구성과 장식을 유지하고 있기에 영동지역 유교문화를 연구하고 조선 중기 이후 향촌사회의 변동, 건축형식의 변화를 추적하는 데 중요한 사료이다.

「고흥 여산송씨 쌍충 정려각(高興 礪山宋氏 雙忠 旌閭閣)」(전라남도 고흥군)은 여산송씨 문중의 송대립(宋大立, 1550~?)과 그의 아들 송침(宋諶, 1590~1637)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것을 기려 조정에서 내려준 정려를 보관하는 건축물로, 1704년(숙종 30년)에 건립된 이후, 여러 차례 수리와 정비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려 건축으로서는 사례가 드문 매우 화려한 모습이며, 정려 건축의 품격과 장식성을 갖추고 있다. 고흥에서 충절인물이 다수 배출된 무반(武班) 가문인 여산송씨 가문의 상징적 기념물이자 지역의 호국충절을 대표하는 시설로, 조선후기 국가 통치수단 및 지역 향촌사회사 등 당시 시대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 정려: 충신이나 효자에게 임금이 편액을 하사하여 마을 입구에 걸어두는 건물

「강진 해남윤씨 추원당(康津 海南尹氏 追遠堂)」(전라남도 강진군)은 해남윤씨 10세(世) 윤사보(尹思甫)와 11세 윤경(尹耕) 부자를 모시는 재실로, 1649년 무렵 윤선도(尹善道)의 주도로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내부에 제사를 지내기 위한 마루가 매우 넓게 꾸며졌으며, 수준 높은 목수의 기술력과 독창적인 건축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중기 이후 지역에서 전개된 향촌과 문중의 역사를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교문화유산이다.

* 중수: 건축물 따위의 낡고 헌 것을 다시 손을 대어 고침

「강진 해남윤씨 영모당(康津 海南尹氏 永慕堂)」(전라남도 강진군)은 해남윤씨의 중시조(中始祖)인 8세(世) 윤광전(尹光琠)과 9세 윤단봉(尹丹鳳), 윤단학(尹丹鶴) 형제 등 세 사람의 신위를 모신 건물로 1737년에 건립되었고, 1813년에 크게 수리되었다.

* 중시조: 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운 조상

18세기 지방 건축 양식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며, 전체가 마루방으로 되어 있는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강당(講堂)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재실 건축 형식의 하나인 ‘강당형’의 모범사례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전주 조경묘 정묘(全州 肇慶廟 正廟)」(전라북도 전주시)는 전주 이씨의 시조(始祖)인 이한(李瀚)과 비(妃, 아내)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1771년에 건립된 이후 현재까지의 이력이 분명한 건축물로, 현존하는 사례가 적은 18세기 왕실 사묘이다. 지방에 위치하고 있는데도 창건과 관리, 운영, 제향에 국가가 깊이 개입했다는 특징이 있다.

「포항 상달암(浦港 上達庵)」(경상북도 포항시)은 조선 전기 문신인 손소(孫昭)의 묘를 조성할 때 묘소를 수호하고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목적으로 1484년에 중건된 재실 건축으로, 1595년과 1786년에 각각 수리되어 현재에 이른다.

‘ㄱ’자형 평면을 갖는 맞배지붕 건물로, 1484년 중건 당시 누마루인 화수루(花樹樓) 부분이 덧붙여져 현재 모습을 갖게 되었다. 본채의 맞배지붕에 덧댄 가적지붕의 독특한 지붕 구성은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판단되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기록과 건축 유구를 통해 재실로 변모한 역사적 전개과정을 알 수 있고, 15세기 건축적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 누마루: 다락처럼 높게 만든 마루

* 가적지붕: 맞배지붕 측면에 덧붙여진 한쪽으로 경사진 지붕

이외에, 이번 보물 지정 중 유일한 내아 건물인 「김제 내아(金提 內衙)」(전라북도 김제시)는 1749년 무렵 지어졌으며, 조선 후기 지방관의 일상을 고찰할 수 있는 드문 사례이다. 지방관아는 동헌과 내아로 이루어지는데, 동헌은 지방관이 공무를 수행하는 공적 공간이고, 내아는 지방관의 가족이 생활하는 사적 공간인 살림집이다.

‘ㄷ’자형 평면으로 가운데 본채와 좌우 날개채로 구성되었는데, 남향인 동헌과 달리 동향으로 지어져 두 영역 간 간섭을 최소화하였다. 동헌 쪽 날개채는 주택의 사랑채와 같이 구성하여 안마당을 보호하면서도 대외적인 관계를 고려했고, 반대쪽 날개채에는 안방과 부엌을 두어 살림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렇게 대청을 경계로 양쪽 날개채에 내외(內外) 개념을 적용한 것은 김제 내아의 독특한 공간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 대청: 한옥에서 몸채의 방과 방 사이에 있는 큰 마루

이번 보물 지정 중 유일한 석조문화재인 「경주 (전)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慶州 (傳)念佛寺地 東‧西 三層石塔}」(경상북도 경주시)은 통일신라인 8세기 전반에 건립된 5.85m 높이의 석탑이다. 두 탑은 모두 상, 하 2층의 기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탑신(塔身, 몸돌)과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은 각각 1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륜부는 대부분 사라지고 노반석(露盤石, 탑의 상륜부를 받치는 돌)만 남아 있다.

복원 과정에서 일부 새 부재들이 사용되었으나, 전체적인 조영 기법과 양식, 석탑 기초부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등을 고려할 때, 8세기 전반에 건립되어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과 양식사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문화재청은 앞으로도 가치가 알려져 있지 않은 건조물 문화재를 적극 조사·발굴하여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알리고 활용하는 사업을 추진할 예정이다. 또한 지역에 위치한 문화재의 사회적 가치 제고와 주변 환경 정비 등 역사문화환경 개선 사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지원할 계획이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하는 「남한산성 숭렬전」등 유교건축 8건과 지방 관아인「김제 내아」 1건, 통일신라 석탑인 「경주 (전)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 1건 등 총 10건의 문화재가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될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 소유자(관리자) 등과 적극적으로 협조할 계획이다.

□ 종 별 : 보물

□ 문화재명 : 남한산성 숭렬전(南漢山城 崇烈殿)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 717

ㅇ 구조/규격 : 단층 맞배/ 정면 3칸·측면 1.5칸

ㅇ 수 량 : 1동

ㅇ 조성연대 : 조선시대

ㅇ 소유자(관리자) : 경기도지사(남한산성세계유산센터)

ㅇ 지정면적 : 48.3㎡

□ 지정사유

ㅇ 「남한산성 숭렬전」은 병자호란을 당해 임금이 남한산성에 머물면서 백제시조인 온조왕(溫祚王)에 대해 제사를 지낸 일을 계기로 1638년 사묘가 세워졌으며 1661년 현 위치로 이전한 이후 지금까지 그 위치를 지키고 있다.

ㅇ 이후 조선 이전에 건국된 역대 시조들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확대되면서 정조 때에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본 전각에 ‘숭렬전’이란 전호(殿號)가 내려졌다. 또한 다른 역대 시조묘에게 올리는 격식을 따라서 숭렬전 제사를 거행하여왔다.

ㅇ 건축형태는 맞배지붕의 정면 3칸, 측면 1.5칸으로 전면에 퇴간을 둔 5량가 건물이다. 조선시대 관청에서 짓는 사묘(祀廟)의 형식과 체제를 충실하게 따랐다. 현재 조선시대에 지은 역대 시조묘 가운데 숭의전(崇義殿, 고려 태조)은 6.25 전쟁 후 1970년대에 복구되었고, 숭덕전(崇德殿, 신라 박혁거세)과 숭선전(崇善殿, 가락국 수로왕)은 19세기 고종연간에 고쳐짓거나 신축한 차이가 있다. 반면 숭렬전은 17세기에 이건한 뒤에 지은 건물이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ㅇ 이처럼 숭렬전은 역대 시조라는 인물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묘로서 조선시대 관청이 지은 사묘의 전형을 충실하게 간직하고 있다. 또한 건물은 상량문(上梁文) 등 여러 기록을 근거로 명확한 이건시기를 확인할 수 있으며, 현존하는 역대 시조묘 가운데 건립 시기가 조선중기로 올라가는 역사성을 간직하고 있다.

□ 종 별 : 보물

□ 문화재명 : 영월 창절사(寧越 彰節祠)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63-1

ㅇ 구조/규격 : 단층 맞배/ 정면 5칸·측면 2칸

ㅇ 수 량 : 1동

ㅇ 조성연대 : 조선시대

ㅇ 소유자(관리단체) : (재)창절서원{(재)창절서원}

ㅇ 지정면적 : 70.2㎡

□ 지정사유

ㅇ 「영월 창절사」는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육신과 김시습, 남효온, 박심문, 엄흥도 등*을 제향하기 위한 사우(祠宇)로서 숙종으로부터 ‘창절’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창절사는 1685년 창건되었으며 1705년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과 김시습(金時習, 생육신), 남효온(南孝溫, 생육신), 박심문(朴審問, 음독 자결), 엄홍도(嚴興道, 단종 시신 수습) 등 십충신(十忠臣)

ㅇ 창절사는 비교적 규모가 큰 편에 속하는 맞배지붕의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전면에 툇간을 둔 5량가 건물이다. 내부는 벽체 없이 통칸으로 되어 있고 후면쪽 벽에 붙여 10인의 위패를 모셨다.

ㅇ 창절사는 사육신 등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사당 외에도 유생들이 모여 학문하는 강학공간인 강당(講堂)과 동서재(東西齋), 누각(樓閣)을 갖추어 조선시대 일반적인 서원의 배치 구성을 보여준다. 유생이나 유림이 2층 누에 모여 회합을 하거나 시화를 열며 풍류를 즐기고 심신을 고양하는 곳으로 누문(樓門)인 배견루(拜鵑樓)가 서원의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

ㅇ 창절사는 단종과 사육신 관련하여 영월 지역이 거쳐온 역사적 과정을 증명할 수 있는 건조물이다. 현재의 창절사는 1791년 정조대에 단종 관련 유적이 대대적으로 정비되면서 형성된 건축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으며, 근래까지의 개수 과정을 겪으면서도 전면부를 중심으로 주요 구성 부재들을 유지하고 있다.

□ 종 별 : 보물

□ 문화재명 : 영동 세천재(永同 歲薦齋)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내오곡길 94-97

ㅇ 구조/규격 : 단층 팔작/ 정면 4칸·측면 3칸

ㅇ 수 량 : 1동

ㅇ 조성연대 : 조선시대

ㅇ 소유자(관리자) : 충주박씨선무랑공 문중

ㅇ 지정면적 : 147.2㎡

□ 지정사유

ㅇ 「영동 세천재」는 충주박씨(忠州朴氏) 황간파(黃澗派) 박세필(朴世弼)이 1691년에 처음 지은 재실(齋室)로서, 그의 부친과 아들까지 3대를 천향(薦享)하는 공간이면서 후손들의 강학을 위한 공간이다.

ㅇ 영동 세천재는 팔작지붕의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중앙에 대청과 좌우에 방을 둔 5량가 건물이다. 전면 툇마루에는 난간을 둘러 재실로서의 격식을 표현하고 있다. 주요 목부재의 연륜연대분석의 결과 대청 중앙의 대량과 기둥 2주가 1691년 창건 당시의 부재로 확인되어 규모와 형식이 큰 변형 없이 현재까지 보존된 건축물로 판단된다.

ㅇ 충주박씨 황간파는 16세기초 박지(朴址)가 이곳에 입향하는 것으로 시작했고, 그의 후손들이 벼슬을 하고 의열, 효행 등으로 이름을 떨치면서 충주박씨의 세거지(世居地)가 주변으로 확장되었다. 강학기능도 면면히 이어져 광복 후에도 독립운동가 성하식(成夏植)이 훈장을 맡아 교육을 했고, 초대 부통령인 이시영(李始榮)이 시국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ㅇ 세천재는 재실 건축의 전형성과 지역성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영동지역 유교문화 연구와 조선 중기 이후 향촌사회의 변동, 건축형식의 변화를 추적하는데 중요한 사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 종 별 : 보물

□ 문화재명 : 고흥 여산송씨 쌍충 정려각(高興 礪山宋氏 雙忠 旌閭閣)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륜마서길 49-6

ㅇ 구조/규격 : 단층 팔작/ 정면 3칸·측면 2칸

ㅇ 수 량 : 1동

ㅇ 조성연대 : 조선시대

ㅇ 소유자(관리자) : 여산송씨동파종중

ㅇ 지정면적 : 57.95㎡

□ 지정사유

ㅇ 「고흥 여산송씨 쌍충 정려각」은 여산송씨 출신 송대립(宋大立, 1550~?)과 그의 아들 송침(宋諶, 1590~1637)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전공을 세우고 순절한 것을 기려 조정에서 내려준 정려로, 1704년(숙종 30년) 정려각 건립 이후, 여러 차례 수리와 정비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ㅇ 본 정려각은 팔작지붕으로 정면은 가운데칸(어칸)이 약간 좁은 3칸, 측면 2칸인 5량가 건물이다. 내부에 1704년의 명정(銘旌, 관직‧성씨 등을 기록) 편액 2매와 정려중수기 등 4개의 편액이 있다. 특히 정려 건축으로서는 사례가 드문 다포(多包, 기둥머리와 기둥 사이의 공포)계 익공계열의 절충식 공포를 사용하였는데, 주상포(柱上包)는 익공계 출목이 있는 3익공으로 구성되었으며, 전면 기둥 사이에는 화반(花盤, 꽃모양의 받침대) 대신 주상포와 동일한 포를 배열하여 다포계 공포처럼 꾸밈으로써 매우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추녀를 받치는 활주(活柱)와 귀포를 받치는 활주를 이중으로 사용하여 구조적 기능과 장식적 기능을 겸하도록 하였으며, 석주(石柱)나 장초석(長礎石)을 사용하여 정려 건축의 품격과 장식성을 갖추고 있다.

ㅇ 본 정려각은 고흥에서 충절인물이 다수 배출된 무반가문인 여산송씨 가문의 상징적 기념물이자 지역의 호국충절을 대표하는 시설로, 조선후기 국가 통치수단 및 지역 향촌사회사 등 당시 시대상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화려한 공포의 사용 등 건축적 기법에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종 별 : 보물

□ 문화재명 : 강진 해남윤씨 추원당(康津 海南尹氏追遠堂)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 전남 강진군 도암면 강성길 77

ㅇ 구조/규격 : 단층 팔작/ 정면 5칸·측면 2칸

ㅇ 수 량 : 1동

ㅇ 조성연대 : 조선시대

ㅇ 소유자(관리자) : 윤삼하(해남윤씨 덕정동종중)

ㅇ 지정면적 : 187.9㎡

□ 지정사유

ㅇ 「강진 해남윤씨 추원당」은 해남윤씨 덕정동파(德井洞派)의 파시조(派始祖)인 해남윤씨 10세 윤사보(尹思甫)와 11세 윤경(尹耕) 부자를 모시는 재실로 1649년 혹은 그 직후 고산 윤선도(尹善道)의 주도로 창건한 이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른다.

ㅇ 추원당은 팔작지붕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5량가인 강당이다. 모퉁이 추녀의 좌우로 각 한 칸씩에는 출목없는 출목도리를 두어 선자서까래의 하중을 분담하고, 충량의 아래에도 도리 장여에 해당하는 긴 부재를 받쳐서 충량의 무게를 분담하는 등,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세부 기법을 가지고 있다.

ㅇ 추원당 앞으로 솟을대문을 가운데 두고 좌우 대칭으로 뻗어나가, 전체 15칸×2칸의 규모를 갖는 ㄷ자형의 행랑채를 두고 있으며, 그 부엌 상부에 환기용의 솟을지붕을 둔 것도 특색이다. 행랑채의 좌우로 우사를 두 채 나란히 둔 것은 일반적인 강당형 재실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해남 윤씨가 재실의 특징이다.

ㅇ 추원당은 재실 건축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는 강당형의 건축 구성을 잘 보여주고 있으면서도, 다른 지역의 강당형과 구분되는 해남윤씨가 특유의 건축적 특징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게다가 건립의 연기가 분명하고 시기적으로도 다른 재실 건축보다 앞선다. 이에 더하여 1702년에 간행된 해남윤씨의 족보 목판과 친족계인 보목계의 문건 등도 함께 보관하고 있어서, 조선후기 재지 사족의 공동체 형성 과정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종합 유산이다.

□ 종 별 : 보물

□ 문화재명 : 강진 해남윤씨 영모당(康津 海南尹氏 永慕堂)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 전남 강진군 도암면 해강로 577-36

ㅇ 구조/규격 : 단층 팔작/ 정면 5칸·측면 2칸

ㅇ 수 량 : 1동

ㅇ 조성연대 : 조선시대

ㅇ 소유자(관리자) : 윤재업(해남윤씨 문중)

ㅇ 지정면적 : 136.5㎡

□ 지정사유

ㅇ 「강진 해남윤씨 영모당」은 해남윤씨의 중시조(中始祖)인 8세 윤광전(尹光琠)과 9세 윤단봉(尹丹鳳), 윤단학(尹丹鶴) 형제 등 3위를 모신 건물로 1737년에 짓고, 1813년에 중수하였다.

ㅇ 영모당은 팔작지붕으로 전체가 마루방으로 되어 있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5량가인 강당(講堂)이다. 그 앞에 솟을대문을 가운데 두고 좌우로 대칭적으로 뻗어나가, 전체 17칸×2칸의 규모를 갖는 ㄷ자형의 행랑채를 두고 있다. 행랑채 바깥으로 다시 앞마당을 만들고, 그 좌우에 3칸의 우사를 갖춘 독특하고 당당한 구성을 보여준다.

ㅇ 영모당의 구성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재실 건축 형식의 하나인 소위‘강당형’의 모범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크다.

ㅇ 또한 강당의 측면에서만 공포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생기게 된 독특한 측면 보와 기둥의 짜임, 전면 화반에 있는 물고기 장식, 행랑채의 부엌 천장에 있는 환기용의 솟을지붕 등의 세부 기법이나 양식은 이 건물이 조성된 18세기의 지방 건축 양식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ㅇ 영모당은 건축이 그 묘소가 실전되었던 해남윤씨의 중시조를 모시는 재실이라는 점에서, 18세기 해남윤씨가의 문중 집단이 지역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며 대문중으로 확대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물적 증거가 된다.

□ 종 별 : 보물

□ 문화재명 : 전주 조경묘 정묘(全州 肇慶廟 正廟)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3가 91-3

ㅇ 구조/규격 : 단층 맞배/ 정면 3칸·측면 2칸

ㅇ 수 량 : 1동

ㅇ 조성연대 : 조선시대

ㅇ 소유자(관리자) : 문화재청(문화재청)

ㅇ 지정면적 : 46.0㎡

□ 지정사유

「전주 경기전(全州 慶基殿)」 뒤편에 위치한 「전주 조경묘 정묘」는 1771년 (영조 47) 전주이씨 시조 이한(李瀚)과 시조비(始祖妃)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사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조선시대에 왕실 시조묘에 대한 사당을 별도로 운영하지는 않아왔다가, 영조대에 들어 건립이 결정되었으며, 창건과 관리, 운영, 제향에 국가가 깊이 개입하고 있었던 지방의 사당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ㅇ 조경묘 정묘은 전퇴가 있는 5량가의 맞배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이며 기단 앞에 월대(月臺)가 조성되어 있다. 전퇴는 개방하고 바닥에는 모두 방전(方塼, 정사각형 벽돌)을 깔았으며 내부 중앙에는 벽에 기대어 감실을 설치하고 신위를 봉안했다. 원기둥에 이익공의 공포, 높은 기단, 월대, 지붕 양성바름(용마루, 내림마루 양쪽에 회 바름) 등은 건축물의 높은 위계와 품격을 보여준다.

ㅇ 전주 조경묘는 창건 과정에서부터 운영 및 각종 수리 기록들이 󰡔조경묘의(肇慶廟儀)󰡕 등 여러 문헌에 그대로 남아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으며, 조선 후기 사묘(祠廟)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왕조 국가에서 시조묘(始祖廟)는 나라를 창건한 창업주를 모시지만 조경묘는 전주이씨의 시조와 시조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는 점에서 독창성 있고, 지방에 세운 예제(禮制) 건축으로서도 희소성이 있다.

□ 종 별 : 보물

□ 문화재명 : 포항 상달암(浦港 上達庵)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 경북 포항시 남구 연일읍 새마을로 766번길 21

ㅇ 구조/규격 : 단층 맞배/ 정면 5칸·측면 4칸

ㅇ 수 량 : 1동

ㅇ 조성연대 : 조선시대

ㅇ 소유자(관리자) : 경주손씨대종회

ㅇ 지정면적 : 143.5㎡

□ 지정사유

ㅇ 「포항 상달암」은 양동(良洞)마을 경주손씨 입향조(入鄕祖)이자 조선 전기 문신인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43~1484)의 묘를 조성할 때 묘소를 수호하고 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목적으로 인근에 있던 분암(墳庵, 제사를 위한 시설)을 1484년에 중건한 건물이다. 이후 1595년과 1786년에 각각 중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ㅇ 재사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ㄱ’자형 평면을 갖는 3량가의 맞배지붕 건물로, 1484년 중건 당시 누마루(화수루/ 花樹樓) 부분이 덧붙여져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게 되었다. 또한 기둥 상부의 초익공 구성방식과 중앙에 설주(楔柱, 문기둥)를 두었던 흔적이 있는 창호, 가적지붕(본채의 맞배지붕에서 덧댄 지붕)의 독특한 지붕 구성은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판단되어 학술적 가치가 높다.

ㅇ 포항 상달암은 묘소 관리 및 제사를 위한 시설로 불교적 관습이 남아 있는 조선 전기의 분암에서 출발하여, 조선 중기를 거치면서 내부 평면 구성이 변화하였고 문간채와 고직사(庫直舍, 관리동)가 건립됨으로써, 유교 시설로서의 재실로 변모해 간 역사적 전개과정이 기록과 건축 유구를 통하여 확인되는 중요한 사례이다. 재사건축으로 중건 당시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높다.

□ 종 별 : 보물

□ 문화재명 : 김제 내아 (金提 內衙)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 전북 김제시 교동 8-1번지외 3필지

ㅇ 구조/규격 : 단층 팔작‧우진각 혼합/정면 5칸·측면 5칸

ㅇ 수 량 : 1동

ㅇ 조성연대 : 조선시대

ㅇ 소유자(관리자) : 김제시(김제시)

ㅇ 지정면적 : 182㎡

□ 지정사유

ㅇ 「김제 내아」는 1749년경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헌, 누각(피금각) 과 함께 보존되어 지방관의 일상을 고찰할 수 있는 드문 사례이다. 동헌이 공무를 수행하는 곳인데 반해, 내아는 지방관의 가족들이 생활하는 살림집이므로 동헌, 누각, 내아 건물은 각각 업무공간, 여가공간, 거주공간을 대표하는 수령의 일과를 구성할 때 꼭 필요한 장소이다. 세 공간은 서로 연계되면서 독립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 동헌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훼철(毁撤)되었다가 1699년 군수 이세성(李世晟)이 새로 짓고 사칠헌(事七軒)으로 이름 붙인 건물로 지금까지 전한다.

* 피금각(披襟閣)은 군수 정홍명(鄭弘溟)이 1633년에 지은 누각으로 김제 관아에서 병자호란 이전에 지어진 유일한 건축물이다.

ㅇ 김제 내아는 ‘ㄷ’자형 평면으로 가운데 본채는 5량가 팔작지붕이고 날개채는 3량가의 우진각지붕으로 구성되었다. 상량문 분석 및 대보 부재의 연륜연대 측정 결과 1749년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제 내아는 남향을 한 동헌과 달리 동향으로 지어져 상호 간의 간섭을 줄였다. 동헌 쪽 날개채는 주택의 사랑채와 같이 구성하여 안마당을 보호하면서도 대외적인 관계를 고려했고, 반대쪽 날개채에는 안방과 부엌을 두고 살림의 중심으로 삼았다. 이렇게 대청을 경계로 양쪽 날개채에 내외(內外) 개념을 적용한 것은 김제 내아 공간구성의 독특한 점이라 할 수 있다.

ㅇ 공포는 장식을 생략함으로써 소박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건축물 전체에 원기둥을 사용한 것은 전각의 형식을 준용하였으며 대청 공간에서 고주의 흘림과 대보의 규모, 포대공과 뜬장여의 사용 등이 매우 고급스럽다.

ㅇ 김제 내아는 모듈을 조립하여 공간을 구성하는 생산방식의 장단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물은 가로세로 8척 규모의 칸을 조합해서 이루어지며, 본채는 두 칸 폭인 16척의 5량가, 날개채는 한 칸 폭인 8척의 3량가로 조립되었다. 이에 따라 모든 공간의 치수는 8(척)의 배수로 설정되어 정형화된 입면의 기법이 공간의 기능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특징은 관영건축에서 조선후기 노임제의 정착에 따른 건축생산력의 향상, 건축기술자 직능의 세분화에 따른 시공기술의 발전, 민간 목재상의 대두로 인한 재료수급의 효율화가 함께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 종 별: 보물

□ 문화재명: 경주 (전)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慶州 (傳)念佛寺地 東‧西 三層石塔}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 경북 경주시 남산동 1129-3 외 4필지

ㅇ 구조/규격 : 석구조/삼층석탑

ㅇ 수 량 : 1기

ㅇ 조성연대 : 통일신라(8세기)

ㅇ 소유자(관리자) : 경주시(경주시)

ㅇ 지정면적 : 204㎡

□ 지정사유

ㅇ 「경주 (전)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이 위치한 (전)염불사지는 2003년과 2008년에 걸쳐 진행된 발굴조사를 거쳐, 8세기 초반에 창건되어 12세기에 폐사된 사찰로 추정된다.

ㅇ 동․서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인 8세기 전반에 건립된 것으로 판단되며, 높이 5.85m의 삼층석탑이다. 두 석탑은 모두 상, 하 2층의 기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탑신(塔身, 몸돌)과 옥개석(屋蓋石, 지붕돌)은 각각 1매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상륜부는 대부분 사라지고 노반석(露盤石, 탑의 상륜부를 받치는 돌)만 남아 있다.

ㅇ 동탑은 1963년에 불국사역 광장으로 이전되었던 것을 2009년 사지 정비와 함께 원위치에 이전 복원되었으며, 탑지 발굴조사 결과 서탑과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기초부를 추가로 조성하였음이 확인되었다. 기단의 받침기둥에 날개벽을 두어 면석을 끼우도록 되어 있는데, 이는 미륵사지 석탑에서 시도된 이후 신라로 계승되어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에서 확인되는 전통적 기법이다. 2층과 3층의 탑신에는 사리장치를 봉안하기 위한 사리공(舍利孔,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홈)이 있으며, 노반석은 2009년 복원시에 새로 제작하여 설치하였다.

ㅇ 서탑은 무너져 있었던 것을 2009년 사지 정비와 함께 원위치에 복원되었다. 서탑은 전체적으로 동탑과 동일한 형태로 구성되어 있으나, 옥개석의 귀마루에 장식과 풍경을 달기 위한 구멍이 없으며, 상륜부로 판단되는 부재 파편이 인근에서 출토된 바 있다.

ㅇ 이상을 요약하면, 경주 (전)염불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쌍탑으로 조성되었으며, 8세기 통일신라 석탑의 양식을 잘 구현하고 있다. 미륵사지 석탑에서 시작된 전통적 결구방식이 잘 남아 있으며, 석탑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탑의 기초부를 높인 점은 다른 석탑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다. 전체적인 조영 기법과 양식 등은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과 양식의 흐름을 파악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며, 이러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있다고 판단됨에 따라,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