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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정선鄭敾 필筆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국립대구박물관 특별전 -

노촌魯村 2023. 4. 10. 18:46

정선鄭敾 필筆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2023.4.10 국립대구박물관 특별전)
정선鄭敾 필筆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2023.4.10 국립대구박물관 특별전)

정선鄭敾 필筆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국보.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6가,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 화가인 겸재 정선(1676∼1759)이 비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크기는 가로 138.2㎝, 세로 79.2㎝이다.

  직접 인왕산을 보고 그렸는데, 비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상적 순간을 포착하여 그 느낌을 잘 표현하였다.

  산 아래에는 나무와 숲, 그리고 자욱한 안개를 표현하고 위쪽으로 인왕산의 바위를 가득 배치하였다.

  산 아래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그리고, 산 위쪽은 멀리서 위로 쳐다보는 시선으로 그려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주고 있다.

  비에 젖은 뒤편의 암벽은 거대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데, 이를 위해 먹물을 가득 묻힌 큰 붓을 반복해서 아래로 내리긋는 대담한 필치를 사용하였다.

  좀 더 가까이에 있는 능선과 나무들은 섬세한 붓질과 짧게 끊어 찍은 작은 점으로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조선 영조 27년(1751)에 그려진 이 그림은 이제까지의 산수화가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그린 것에 반하여 직접 경치를 보고 그린 진경산수화일 뿐만 아니라 그 화법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의 산수가 너무나도 잘 표현되어 있다.

  정선의 400여점의 유작 가운데 가장 큰 이 그림은 그의 화법이 잘 나타난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를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된다.(출처 : 문화재청)

정선鄭敾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원백(元伯), 호는 겸재(謙齋), 겸초(兼艸), 난곡(蘭谷)이다.

  조선 후기에 조선의 실경을 그렸던 화가로, 도봉 서원의 실제 모습을 그린 「도봉 서원도」가 있다.

  정선은 생전에 미리 경치 좋은 곳으로 정해 두었던 양주(楊洲) 해등촌면(海等村面) 계성리(鷄聲里)[현 서울특별시 도봉구]에서 영면(永眠)하였다.

  정선의 집안은 사대부 가문인데 증조할아버지인 정창문(鄭昌門)이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해 조락하기 시작하였다.

  집안의 장토(庄土)는 후손들에게 분배되면서 영세화되었고, 정선이 14세가 되던 1689년에 정선은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적 스승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은 1680년의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몰락하면서 낙향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선은 과거로 벼슬길에 나갈 희망을 버리고 화도(畵道)에 입문하게 되었다.

  정선은 타고난 예술가적 기질과 더불어, 김창흡을 중심으로 하여 백악산과 인왕산 아래 세거하던 서인 자제들이 일으켰던 삼연학풍(三淵學風), 즉 학예(學藝)를 겸수하며 진경 시문학(眞景詩文學)의 학풍의 영향을 받아 진경 산수화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정선은 어려서부터 백악산 아래 살면서 화흥(畵興)이 일면 문득 산을 대하여 사생했다고 한다.

  거기에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서인계 학풍의 사상적 기반 아래 조선 중화 의식(朝鮮中華意識)을 과감하게 실천하기 위해 일체의 선입관에서 벗어나 자연을 관조(觀照)하고 거기서 체득한 이치를 체계화시키면서 진경 산수화풍을 완성하였다.

  정선은 김창집(金昌集)의 도움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왕세자를 호위하는 위수(衛率), 1729년에는 한성부 주부를 지냈고, 1734년에는 청하 현감을 지냈다.

  경상도 동해변 청하현은 정선의 진경 산수화풍을 완결 지을 수 있는 관동 팔경을 마음껏 사생할 수 있는 장소로, 청하 현감직을 제수한 것은 영조의 배려였다. 이후 자연 현감과 하양 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며, 1740년경에는 훈련도감 낭청(訓練都監郎廳)을 거쳐, 1740년부터 4년여 간 양천 현령을 지냈다.

  1754년에 사도시 첨정(司䆃寺僉正), 1755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1756년에 종2품 가선대부 지중추부사(嘉善大夫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정선은 지방 관직으로 나가 있을 때에도 화도 정진(畵道精進)을 쉬지 않아 전국에 화명(畵名)을 떨치게 되었다.

  정선은 사대부 출신의 화가였기 때문에 조선 시대의 다른 화가들보다는 기록이 많으며, 남아 있는 작품 수도 상당하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금강전도(金剛全圖)」,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등이 있다.

  도봉 서원의 모습을 그린 「도봉 서원도」 역시 정선의 작품인데, 그 소장처와 작품이 그려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서인계 학자들과 긴밀히 교류하고 있던 그의 교유 관계를 고려해 볼 때 정선은 서인계 학자들의 수학처(修學處)였던 도봉 서원과도 깊은 관계를 맺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그런 인연으로 도봉 서원에 머물면서 그곳을 사생(寫生)했을 것으로 보인다.

  1759년 인곡정사(仁谷精舍)에서 84세로 세상을 떠난 정선은 양주 해등촌면 계성리[현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안장되었다.

  이곳은 정선이 생전에 마련해 둔 경치 좋은 곳이었다. 정선의 손자인 정황(鄭榥)이 그린 「양주 송추도(楊洲松楸圖)」를 통해 정선 묘소의 모습을 추측해 볼 수 있다.

  80세 이상 관원에게 내려주는 관직인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종2품의 품계에 올라 있던 정선은, 사후 13년 만인 1772년에 효행의 표본이라는 명목으로 품계가 다시 정2품에 올랐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