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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남평문씨본리세거지-충선공(忠宣公)문익점(文益漸). 인흥사지. 돌담길과 능소화-

노촌魯村 2024. 7. 6. 01:37

인흥원

문익점(文益漸. 1329-1398)

문익점은 고려후기 목화 종자를 도입하고 재배하여 전국에 보급한 문신이자 학자이다. 1329년(충숙왕 16)에 태어나 1398년(태조 7)에 사망했다. 1363년(공민왕 12)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귀국할 때 몰래 목화씨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 우왕 때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에 반대하다가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목화종자 도입, 시험재배 성공, 전국적 보급, 목화섬유를 이용한 의료제조 등 그 공이 매우 커서 1440년(세종 22)에 영의정과 부민후에 추증되었고 이후 도천서원과 월천사우에 사당이 세워졌다.

목화
붓. 목화송이.목화 씨앗 조형물
인흥사지 석탑

본리리 인흥사 터(本里里 仁興寺 터.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본리리 인흥사(仁興寺) 터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의 남평 문씨 본리 세거지(南平文氏本里世居地) 일대에 조성되었으나,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인흥사의 창건 연대와 창시자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본리리 인흥사 터에서 옮겨져 현재 경북 대학교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있는 인흥사 터 삼층 석탑의 안내판에 의하면, 원래는 인홍사(仁弘寺)였으나 일연 선사(一然禪師)가 1274년(충렬왕 즉위년)에 중수하여 인흥사(仁興寺)로 개칭하였으며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어 폐사되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으로만 보면 이미 16세기경에 폐사가 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여지도서(輿地圖書)』 성주목(星州牧) 불우조(佛宇條)에 인흥사에 관한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18세기까지는 존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남평 문씨(南平文氏)가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 마을에 들어온 시기로 보아서는 정확한 폐사 시기를 추정하기 어렵고, 사찰의 운영 시기는 석탑과 유물의 양상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서 조선 후기로 추정된다.

남평 문씨가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 마을에 터전을 잡은 것은 문익점(文益漸)의 18세손인 인산재(仁山齋) 문경호(文敬鎬)[1812~1874] 때이다.

문경호는 풍수에 조예가 깊어 문씨만의 마을을 만들 계획을 하고, 대찰인 인흥사가 있던 자리에 터를 잡아 정착하고 오늘날의 인흥 마을을 열었다.

본리리 인흥사 터라고 추정되는 곳에는 현재 남평 문씨 세거지가 조성되어 있어 절터와 관련된 유물은 많지 않다.

현재 인흥사 터에는 탑제들과 주춧돌·돌 유구 등이 산재해 있다.

인흥사 터에 있던 2기의 석탑 중 1기는 경북 대학교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있고, 1기는 현재의 수봉 정사(壽峰精舍) 앞 과수원에 미완성의 상태로 세워져 있다.

수봉 정사 앞에 있는 탑은 마모 상태가 심하여 잔존하는 석재의 명칭을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층 기단 갑석 일부와 상층 기단 우주, 갑석 부분을 보수한 상태이고, 일부는 결실되어 전체 형태를 정확히 알 수 없다. 한편 남평 문씨 종택에는 당시 인흥사에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물과 석조(石槽)[돌로 만든 통]가 함께 남아 있고, 1910년(순종 3)에 초가인 용호재(龍湖齋)를 헐고 광거당(廣居堂)을 지을 당시 사용된 기단석과 초석들은 이 부근 절터에서 나온 석재들이다. 또 부근에서 밭을 경작하면서 출토된 수막새 기와를 살펴보면, 통일 신라 시대의 유익사자문(有翼獅子紋) 기와[와당(瓦當)]와 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귀목문(鬼目紋)과 주위에 단엽의 연화문 기와들이 동시에 출토되고 있어, 통일 신라 전후에 사찰이 창건되었고 이후에도 중수와 중창이 거듭되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남평문씨본리세거지(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3길 16) : 화원읍 본리리 옛 인흥사 절터에 이루어진 전통민속마을로 문익점의 18대손인 문경호가 19세기 초 정전법에 따라 구획을 정리하고 집을 지었다. 대표적인 건물로 광거당, 수봉정사, 인수문고를 들 수 있으며 조선시대 마을의 구성과 근대 한옥의 건축적 특성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토담길 따라 분홍빛 능소화와 하얀 접시꽃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정경을 자랑한다.

능소화

덩굴나무로서 줄기 마디에서 생겨나는 흡착 뿌리를 돌담이나 건물의 벽 같은 지지대에 붙여서 그 지지대를 타고 오르며 자란다. 여름에는 나팔처럼 벌어진 연한 주황색의 꽃송이들이 덩굴 가지의 중간에서부터 끝까지 연이어 매달려 보통 그 무게로 인해 아래로 드리운다. 담장 넘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들은 화려하지 않지만 우아하고 아련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예로부터 양반집 규수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꽃이 한 번에 피었다가 지는 게 아니라 꽃이 지고 나면 계속해서 또 피고, 또 피고 하기 때문에 개화기간 내내 싱싱하게 핀 꽃을 감상할 수 있다.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에 병충해 걱정을 할 필요가 없으며, 햇볕을 좋아하긴 하지만 비교적 음지에서도 잘 자라는 편이다.[2] 봄이 오기 전(2월 경) 적당한 비료와 그 이후 물만 충분히 준다면 여름에 정말로 흐드러지게 핀 능소화를 감상할 수 있다.

다만 능소화가 물을 엄청 좋아하긴 하지만 뿌리에 물이 고이면 괴사할 수 있어서, 습기가 있는 흙이라도 배수가 어느 정도는 되는 곳에 심어야 한다. 또한 개화기간 내내 바닥에 떨어진 꽃 때문에 지저분해 보이기 쉬워서 청소를 자주해야 하는 편이다. 물론 떨어진 꽃을 그대로 놔 두는 것도 나름 멋이 있기 때문에 주변 환경과 어울린다면 굳이 치울 필요는 없다.

한반도의 남부지역에서 꽃은 6월 말에서 8월까지 무성하게 피지만, 꽃 자체는 추위에 약하기 때문에 중부지역에서는 기온에 따라 좀 더 빨리 진다. 기온이 내려가는 9월부터는 생기를 잃어버리고 잎이 떨어지며 결국 앙상한 줄기만 남는다. 꽃은 그 다음해 새로운 줄기에서 금방 자라 나오기 때문에, 줄기만 남아 있는 이때에 가지치기를 적극적으로 해서 원하는 방향을 잡아 주는 것이 좋다. 여러 방향으로 길게 뻗어 있는 가지들을 겨울에 보게 좋게 잘라야 그 다음해에 꽃과 줄기도 보기 좋게 모양이 잡힌다.

덩굴 나무이긴 하지만 수명이 매우 긴 식물로서 관리만 잘 한다면 몇 백년을 넘게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옛 선비들은 능소화 꽃이 질 때 송이째 품위 있게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래서 '양반꽃'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능소화는 조선시대의 과거시험 장원급제자에게 임금이 관모에 꽂아주는 어사화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까닭에 평민들은 능소화를 함부로 키우지 못했다고 한다.

꽃말은 명예와 영광, 그리움, 기다림이다.(출처 :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