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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자료실

경주남산 용장사지

노촌魯村 2006. 3. 5. 11:35

 용장사지 서쪽 봉우리에서 본 모양(클릭하시면 원본 사진)

1940년 보고서의 용장사지의 삼층석탑과 삼륜불대좌

  용장사지 서쪽 봉우리에서 본 모양(클릭하시면 원본 사진) 

  

 

 

 

 

 

 용장사지(茸長寺址)

소재지 :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산 1-1번지

'삼국유사'에 "유가종(법상종)의 시조 대현(大賢)이 이곳에 머물 때 석조자육(石造丈六)상이 따라서 얼굴을 돌렸다."고 하며, 경덕왕 12년에 기우(祈雨)를 위하여 이 스님을 궁중으로 불러다 금광정의 물을 솟아나게 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경덕왕 이전에 창건된 것을 알 수 있으나 폐사의 시기를 알지 못한다. 조선후기 김시습이 이곳을 거쳐를 삼고 금오신화를 집필한 것으로 미루어  이때에도 절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동서 약 70m, 남북 약 40m의 축대와 초석들이 있으며, 동쪽 능선상에는 용장시지삼층석탑(보물 제186호), 용장사지석불좌상(보물 제187호),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봄물 제913호)이 있다.(경주시사)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보물 제913호)

이 불상은 용장사지 삼륜대좌여래불의 동쪽 바위에 있다. 서쪽 계곡에는 김시습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은 곳으로 유명한 용장사 터가 있다.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머리 둘레의 두광과 몸 둘레의 신광은 이중으로 조각하였다. 얼굴은 풍만하고 머리에는 육계와 나발을 표현하였으며, 귀는 눈에서 목까지의 높이로 상당히 길게 표현하였다. 목에는 3개의 선으로 표현된 삼도가 뚜렸하다. 옷주름선은 얇게 촘촘한 평행선으로 섬세하게 처리라였는데, 오른쪽 어깨와 왼쪽 어깨에 동시에 걸친 통견 형식으로 되어 있다. 가슴 부분에는 비스듬하게 속옷을 역시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결가부좌한 발 위에 왼손이 올려져 있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가지런하게 무릎 위에서 내려 땅를 가리키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다리에도 나란히 흘러내린 옷선을 표현하였다. 연꽃대좌에는 두 겹으로 연꽃을 새겼는데, 가운데 있는 연꽃은 꽃잎 끝을 밖으로 향하게 하여 입체감을 주고 있다. 왼쪽 어깨 부분 바위면에 '태평(太平) 2년 8월'에 무엇인가를 하였다는 기록이다. 이를 조상과 관련된 기록으로 보고 이 마애불상이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런가 하면 이 글은 불상을 수리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경주시사)

 

 

 

 

 용장사지 석불좌상(보물 제187호)

이 불상은 대좌가 독특하게 조성되었다. 커다란 자연 바위의 위쪽 가운데만 살짝 가공하여 그 위에 북 모양의 돌을 얹고 그 위에 원판 모양의 대좌를 얹는 방식을 반복하여 삼층으로 대좌를 만들었다. 제일 위층은 복판의 연꽃을 돌아가면서 조성하였는데, 그 위에 불상을 안치하였다. 불상은 현재 머리를 잃었지만 몇 번 무너져 삼도가 있었야할 목도 손상을 입었고, 목 뒷쪽과 목 왼쪽 부분에 정(釘)자국이 남아 있다. 오른손은 무릎에 얹고, 왼손은 촉지인처럼 무릎 아래로 내림으로써, 보퉁 볼 수 있는 항마촉지인과는 양손이 반대로 표현되었다. 가사는 양 어깨에 걸쳐져 있어 편단우견의 변형으로 보아며, 계속 흘러 내러 연꽃대좌 앞쪽만을 덮어 수려한 현상좌(懸裳座)을 이루고 있다. 이 불상은 왼쪽 어깨 너머에서 매듭을 고정시키고 무릎까지 흘러 내리게 조성하였는데, 이러한 매듭은 냉골 입구의 머리 없는 여래좌상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불상은 흔히 '용정계 삼륜대좌불'이라 부른는데, 신라 대현스님이 주위를 돌면 따라 돌았다는 미륵상이라는 의견도 있다.(경주시사)

 

 

 

 

 

 

 용장사지 삼층석탑(보물 제186호)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삼층석탑으로 높이는 4.42m이다. 경주 남산 서편 용장사로 추정되는 옛 절터가 있는 골짜기의 정상 부근에 위치하며 단층 기단 위의 삼층 탑신부가 올려진 석탑이다. 탑은 하층 기단을 생략하고 자연 암석에 높이 약 6cm의 괴임을 1단 마련하여 상층  기단 면석을 받치게 하였다. 면석은 한 면은  한 돌이고 다른 3면은 2석씩 모두 7매의 판석으로 조림하였는데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 1개와 가운데 기둥 1개씩을 새겼다. 덮개돌은 2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는데 1단의 부연이 있고 낙수면은 약간의 경사를 두고  상면 중앙에 각형의 2단 괴임을 두었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1돌이며, 각층의 몸돌에는 모서리 기둥를 새겼으며, 1층 몸돌은 상당히 높은 편이나 2층과 3층 몸돌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붕돌은 각 층의 층급받침이 4단이고 처마선은 편평하며 낙수면은 전각에 이르러 경쾌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지붕돌 상면에는 2단의 괴임을 두어 윗층의 몸돌을 받게 했다. 상륜부는 결실되었으며 3층 지붕돌 상면에 찰주공이 남아 있다. 이 탑은 일찍이 무너지고 파괴되었던 것을 1922년에 다시 복원한 것으로 당시 조사에 의하면 2층 몸돌 윗부분에 한 변 가로 15.2cm 세로 13.1cm의 방형 사리공이 있었는데 사리장치는 없었다고 한다. 2001년도에 해체. 수리하면서 일제강점기에 잘못 복원한 부분을 바로 잡았다. 전망이 넓게 트인 산봉우리 위에 탑을 세운 것은 신라시대에 가끔 볼 수 있는 사례로 이 탑은 각 부의 조화가 아름다우며 경쾌한 수법을 보여줄 뿐 아니라 주위 자연과도 잘 조화되고 있다. 따라서 바위 위에 세운 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우수작으로 꼽힌다. 이 탑은 산봉우리 전체를 하층기단으로 삼아 산 아래에서 올렸다 보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표현하였으며 규모를 과감히 줄여 주변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천상의 탑으로 형상화시킨 신라인의 슬기를 잘 보여 주고 있다.(경주시사)

 

 

신라. 천년을 이어온 고도 경주(천년의 이상세계 경주암산-서남산 코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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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의 용장사 유회시(茸長寺有懷詩)

 

茸長山洞幽 (용장산동유) 용장산 골짜기 깊고 깊어서

不見有人來 (부견유인래) 사람이 오는 것이 보이지 않네.

細雨移溪竹 (세우이계죽) 가랑비는 시냇가 대나무를 찾아가고

斜風護野梅 (사풍호야매) 스쳐가는 바람은 들의 매화를 감싸주네

小窓眠共鹿 (소창면공록) 작은 창에서 잠드니 꿈은 사슴을 따라 나서고

枋椅坐同灰 (방의좌동회) 낡은 의자에 앉으니 몸과 마음 식은 재로다

不覺茅簷畔 (부각모첨반) 초가집에 딸린 밭두둑이 알지 못하는 사이

庭花落又開 (정화낙우개) 뜨락의 꽃밭에는 꽃이 지고 또 피고

 

김시습 : 조선 초기 학자(세종 17∼성종 24). 생육신의 한 사람.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유.불.선 3교의 영역을 넘나든 사상가요 당대 정치의 폐해와 인민의 현실에 주목했던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출세의 길을 단념한 채 전국을 방랑하며 2천여 편의 시를 남겼고, 경주 금오산에 머물던 30대 시절에는 소설 '금오신화'를 지었으며 '태극설, 십현담 요해'등 중요한 철학적 저작을 다수 저술했다.

 

 경주남산의 불적(조선총독부)에 실린 용장사지 사진

 

 

 

 

 

 

 

 

 

 

 

  

신화와 설화로 만나는 문화재 여행(유형 문화재 중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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