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곡면 석장리에 석장사터가 있다.
석장사는 신라의 대 예술가 이신 영지스님이 계시던 절이다. 양지스님은 조각, 그림, 글씨, 공예 등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로서 못하는 일이 없을 만큼 많은 재주를 가졌을 뿐 아니라 불경에 있어서도 크게 통달하여 위대한 신통력이 있었다. 양지스님은 문무대왕때 지은 사천왕사의 천왕상과 탑의 기단부에 새긴 팔부신중상을 조각하였고 법림사 법당안에 모신 삼존불과 중문 좌우에 모신 금강역사상도 만들었다.
양지스님은 글씨도 명필이었음으로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을 썼다. 또 공예도 솜씨가 뛰어나서 영묘사의 무늬기와을 만들었으며 자신의 거처하던 석장사에는 삼천불을 새긴 천탑을 쌓고 정성으로 예배했다. 영묘사의 장육존상을 만들때에는 절에서 흙이 나는 곳까지 불교를 믿는 남자와 여자를 한 줄 세우고 흙덩어리를 곁에 사람에게 넘겨주고 넘겨주고하여 그 흙덩어리가 법당에 들어오면 양지스님은 그 흙을 받아 부처님을 조각하였다.
신라 사람들은 이렇게 일할 때 노래를 부르며 노래에 맞춰 일하였는데 일할 때 부르는 노래를 풍요라 했다. 양지스님은 부처를 조각할 때 새오운 풍요를 지어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오다 오다 오다서럽러라
서럽다 우리들이여
공덕 닦으로 오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근심과 걱정이 많은 완전하지 못한 세상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태어난 것은 다음에는 완전한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공덕 닦으려 온 것이다. 공덕 중에는 부처님 만드는 이 흙을 나르는 일이 제일 보람있는 일이라는 뜻이다. 착한 여자와 남자들은 풍악에 맞춰 신나게 흙을 나르므로서 635년경에 대불이 완성되었다.
양지스님은 이렇게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탁발을 할 겨를이 없었다. 양지스님은 신통력으로 자신이 짚고 다니는 석장(스님이 쓰는 지팡이) 고리에 쌀 자루를 동여매여 밖으로 내 보냈다. 석장은 저절로 신도들의 집을 찾아다니며서 문밖으로 고리를 짤랑거렸다.
석장사의 신도들은 문밖에서 쩔렁쩔렁하고 석장고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면 양지스님이 보낸 석장인줄 알고 쌀자루에 쌀을 넣어 주었다. 자루가 차면 절로 돌아왔다. 양지스님이 계신 절을 석장사라 이름한 것은 이 신기한 석장 때문이었다 한다.(고도 경주 : 경주시)
석장사지 현황 : 창건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양지스님이 선덕여왕(632~646)과 문무왕(661~680) 대에 생존한 것으로 보면 늦어도 선덕여왕 때는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동국대에서 발굴한 결과 창건기 및 중건기의 유구는 중창을 거듭하면서 재사용을 통해 교란이 심하여 원형을 알 수 없었다. 고려시대 법당지로 여겨지는 금당지 외에는 건물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다.(경주시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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