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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미황사

노촌魯村 2007. 7. 25. 14:22

 

 자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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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대웅전(美黃寺大雄殿  보물  제947호)

미황사 사적비(事蹟碑)에 의하면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신라 경덕왕(景德王) 8년(749)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1592)으로 전화(戰禍)를 입은 후 조선 선조(宣祖) 31년(1598) 중창하였으며, 그후 영조 30년(1754) 중수하였다고 한다. 이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單層) 팔작집으로 외3출목(外三出目) 내4출목(內四出目)의 다포계(多包系) 포작(包作)집이다.

 대웅보전 내부

  


 

 



 

 

 

 

대웅보전 주춧돌

 

대웅보전 주춧돌

 대웅보전 주춧돌

 대웅보전 주춧돌

대웅보전 주춧돌

대웅보전 공포(외삼출목)

대웅보전 천장

대웅보전 천장

대웅보전 문살

 

명부전

 명부전 내부

삼성각

삼성각 내부(산신탱화)

 삼성각 내부(칠성탱화)

삼성각 내부(나반존자)

응진전

 미황사응진당(美黃寺應進堂  보물  제1183호)

달마산 기슭에 자리잡은 미황사는 우리 나라 육지 가장 남쪽에 있는 절이다. 미황사 사적비에 따르면 통일신라 경덕왕 8년(749)에 처음 지었다고 한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에 타 버려, 지금있는 응진당은 영조 27년(1751)에 지은 것이다. 응진은 부처의 또 다른 이름이며, 아라한·나한은 수행을 거쳐 깨달은 성자를 말한다. 응진당은 나한전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십육나한이나 오백나한을 모신다. 미황사 응진당에는 안쪽 벽면에 그림으로 십육나한을 모시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기둥 윗부분에는 장식이 조각되어 있는 등 조선 후기의 양식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응진전 내부

 



  

 

 

 

  

 범종각

 

 

 

 

 석조에 비친 달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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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황사 석조에 비친 달마산을 더욱 실감이 느끼도록 하기 위하여 Swishmax 프로그램으로 물결을 만들었습니다.

달마산 미황사, 세 가지 아름다움


민초 염원 품은 미황사 거북과 게 초석

 

종교는 시대를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고 사람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소통의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종교의 지도자들은 예배나 법회와 같은 모임과 다양한 강론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들을 이어주고, 사람들이 가진 저마다의 염원과 문제들에 대해 나름대로 해법을 제시하여 왔다. 이러한 모습들은 종종 종교 건축물의 벽화나 장식들에 표현된다.

전라남도 해남에 위치한 미황사(美黃寺)는 지금으로부터 약 1,300년 전인 749년에 건립된 사찰이다. 기록에 의하면 우전국(于闐國)에서 보낸 돌로 된 배가 이 곳 바닷가에 닿아, 사람들이 배에 실려 있던 법화경과 금으로 된 사람 등을 땅에 내려놓았는데, 그 날 밤 의조화상(義照和尙)은 꿈에서 소가 누웠다가 일어나는 곳에 사찰을 지어달라는 우전국의 임금의 부탁을 받게 된다. 그래서 미황사의 ()’는 소의 울음소리를 취하고, ‘()’은 금빛을 취한 것이라고 전한다. 미황사의 중심전각은 대웅보전으로, 이 건물의 초석에는 다른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조각물이 있는데, 연꽃과 거북, 그리고 게가 새겨져 있다. 수 백 년의 바닷바람을 견뎌낸 게의 길쭉한 두 눈은 부처를 모신 대웅보전 내부를 향하고 있고, 여덟 개의 다리는 선명하다. 거북 또한 부처를 향하여 예불을 드리듯 두 앞발을 뻗고 있다. 이러한 문양은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승탑에도 일부 나타나고 있다. 부처를 모신 종교건축이니 연화문(蓮華文)이 등장하는 것은 이해되지만, 거북과 게는 왜 연꽃잎을 올라타고 있는 것일까.

미황사가 위치한 곳은 토말(土末)’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사자봉의 남쪽으로 바다를 면하고 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주로 바다와 관련된 업을 하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이해가 된다. 곧 부처님의 자비를 받아, 바다로부터 풍요로운 이득을 얻고, 거친 바다로부터 가족의 안위를 지키고자 하는 일반 서민들의 염원을 불교가 받아들여 조화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불교를 받아들이게 한 것이 아니라, 불교가 사람들을 포용함으로써 사람들과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하나의 사회 속에서 서로 다른 주장과 가치들이 대립하는 요즘, 새삼 수 백 년 전 연화문 위에 일반 백성들의 뜻을 새기도록 한 스님의 혜안이 그리워진다.

한편 미황사는 정유재란 때인 1597년 모든 건물이 소실된 후 재건되는데, 대웅보전과 응진당은 17세기 중반의 건축적 특성을 지니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1727년에 그려진 괘불도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미황사가 위치한 달마산 일원은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찰 뒤에 병풍처럼 펼쳐진 기암절벽의 풍광은 수많은 등산객들이 으뜸으로 꼽는 풍경이다.

 

조상순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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