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전남

세연정

노촌魯村 2007. 7. 25. 15:19

 보길도윤선도유적(甫吉島尹善道遺蹟  사적  제368호)

고산< 孤山 > 윤선도< 尹善道 >(1587-1671)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정치적 다툼으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가 고향인 해남< 海南 >에 있을 때 병자호란< 丙子胡亂 >의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강화도< 江華島 >에 이르렀으나, 인조< 仁祖 >는 이미 남한산성 < 南漢山城 >으로 옮겨 적과 대항하다가 항복한 후였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고산은 세상을 등지고 탐라< 耽羅 >(제주도)로 가는 길에 이곳 보길도< 甫吉島 >의 산세가 수려함에 매혹되어 머물게 되었다 한다. 보길도는 그가 영조< 英祖 > 15년(1637) 51세 때 이곳에 들어와 여러 차례 출입을 하면서 별서< 別墅 >를 짓고 13년간 글과 정서를 닦으며 어부사시사< 漁夫四時詞 > 등 시가를 창작한 국문학의 산실< 産室 >이기도 하다. 격자봉< 格紫峰 > 밑에 낙서재< 樂書齋 >를 지어 주자학< 朱子學 >을 연구하고, 이 일대에 소은병< 小隱屛 >, 낭음계< 朗吟溪 >, 오운대< 五雲臺 >, 독등대< 獨登臺 >, 상춘대< 賞春臺 >, 언선대< 偃仙臺 > 등 바위에 이름을 붙여 자연에 묻혀 자연과 대화하는 조경< 造景 >을 경영하였다. 또 낙서재의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지어 곡수당< 曲水堂 >이라 하고, 낙서재 건너 산 중턱 절벽 위에 한칸 집을 짓고 동천석실< 洞天石室 >이라 하여 독서하며 선경< 仙境 >에 노닐었다. 계곡을 따라 동북쪽으로 내려가면 계간< 溪澗 >을 판석보< 板石洑 >로 막아 계담< 溪潭 >을 조성하고 물을 돌려 방지< 方池 >를 이룩하고 방지 옆에 고산< 孤山 > 윤선도< 尹善道 >(1587-1671)는 여러 차례에 걸쳐 정치적 다툼으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가 고향인 해남< 海南 >에 있을 때 병자호란< 丙子胡亂 >의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강화도< 江華島 >에 이르렀으나, 인조< 仁祖 >는 이미 남한산성 < 南漢山城 >으로 옮겨 적과 대항하다가 항복한 후였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고산은 세상을 등지고 탐라< 耽羅 >(제주도)로 가는 길에 이곳 보길도< 甫吉島 >의 산세가 수려함에 매혹되어 머물게 되었다 한다. 보길도는 그가 영조< 英祖 > 15년(1637) 51세 때 이곳에 들어와 여러 차례 출입을 하면서 별서< 別墅 >를 짓고 13년간 글과 정서를 닦으며 어부사시사< 漁夫四時詞 > 등 시가를 창작한 국문학의 산실< 産室 >이기도 하다. 격자봉< 格紫峰 > 밑에 낙서재< 樂書齋 >를 지어 주자학< 朱子學 >을 연구하고, 이 일대에 소은병< 小隱屛 >, 낭음계< 朗吟溪 >, 오운대< 五雲臺 >, 독등대< 獨登臺 >, 상춘대< 賞春臺 >, 언선대< 偃仙臺 > 등 바위에 이름을 붙여 자연에 묻혀 자연과 대화하는 조경< 造景 >을 경영하였다. 또 낙서재의 건너 개울가에 연못을 파고 집을 지어 곡수당< 曲水堂 >이라 하고, 낙서재 건너 산 중턱 절벽 위에 한칸 집을 짓고 동천석실< 洞天石室 >이라 하여 독서하며 선경< 仙境 >에 노닐었다. 계곡을 따라 동북쪽으로 내려가면 계간< 溪澗 >을 판석보< 板石洑 >로 막아 계담< 溪潭 >을 조성하고 물을 돌려 방지< 方池 >를 이룩하고 방지 옆에 단< 壇 >을 쌓고 세연정< 洗然亭 >을 지었다. 이곳이야말로 조선시대< 朝鮮時代 > 별서조원< 別墅造園 >의 아름다운 조영< 造營 >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이야 말로 조선시대< 朝鮮時代 > 별서조원< 別墅造園 >의 아름다운 조영< 造營 >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문화재청)

 


  

  

     

 클릭하시면 원본 사진(파노라마)이 ...

 세연정 서대

 

 세연정 동대

 세연정

 세연정 현판

 

 

 

 

 자라 바위

 

 

 사투암

 

 혹약암

 

 

 비홍교

 

 

 세연정 연지의 수련

 

 

 

 

 세연정 연지의 상류

 

 판석보

··일이 자연과 마주하는 법

 

동양의 자연은 서양의 위압적이고 스케일이 큰 거대경관이라기 보다는 산수경관이라 할 만큼 인간 삶의 척도에 맞춘 휴먼스케일을 선호한다. 특히 한··일 삼국의 정원에는 자연을 대하는 태도의 같고 다름이 잘 나타난다.

중국의 대표적 강남지방 정원은 구불구불한 인공적 곡선으로 이루어진 연못이 정원의 기본 틀이다. 연못 주변 회백색의 굵은 선은 주로 기괴한 돌을 겹겹이 쌓은 태호석(太湖石)이 대표적 재료다. 그리고 중간 중간 전망 좋은 곳에 정자를 놓고 정원을 둘러보기 좋도록 기와지붕으로 된 긴 복도를 연결한다. 나무는 배경용으로 일부가 사용된다.

일본의 고산수(枯山水) 정원은 방장(方丈)의 뒷마당에 물을 사용하지 않는 직사각형의 모래정원을 만들던지, 아니면 건물 주변에 구불구불한 곡선형의 연못을 만들고 그 옆에 자갈을 넓게 깔아 해안가 같은 분위기의 침전식(寢殿式) 정원을 만든다. 그리고 연못 안에 여러 섬을 만들고 이 섬들을 다리를 통해 잇는다. 흰색 자갈들과 어울리게 잘 다듬어진 값비싼 나무와 유명한 수석을 군데군데 심는다.

한국의 별서(別墅)정원은 오래된 고목들이 숲과 함께 우거져 있고 자연 계류(溪流)가에 정자 하나가 소박하게 지어져 있으며 흘러가는 계류 일부를 돌려 연못을 조성한다. 연못은 주로 직선의 건축선을 연장시킨 방형(方形)을 띄는데 연못과 석축 이외에는 인공적인 것을 찾기 어렵다.

세 나라의 차이점을 더욱 쉽게 접근하려면 인공적인 면을 하나씩 걷어내 면 된다. 중국과 일본은 정원의 조성방법이나 재료 모두 자연을 축소한 축경식(縮景式)으로 인공적으로 조성한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정자와 석축, 연못 정도만이 인공적인 것이다. 이를 제거하고 나면 정원의 대부분을 이루는 계류와 암반 등 정원의 중심 공간 전부가 남게 된다.

이처럼 한국이 정원에 인공적 요소를 가장 적게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환경적 요인이 있겠지만 유교의 요산요수(樂山樂水), 심신도야(心身陶冶)의 수단인 자연에 대한 경외요, 자연과 나를 하나로 보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자연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하려는 유교사상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이 한국의 정원인데, 중국에서 전래된 유학을 끝까지 계승 발전시킨 나라는 조선이라는 사실을 전 세계도 인정하고 있다. 반면 중국과 일본의 정원에 인공이 많은 까닭은 중국은 도교사상이 중심이고 일본은 선불교와 가까워 신앙과 상징적인 것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가 있다.

이탈리아의 한 학자는 자연과 문화, 환경과 예술이 합일된 문화적 자연으로서 정원을 제3의 자연이라 일컬었다. 이에 따르면 한국의 정원은 제3의 자연 중에서도 가장 자연과 가까운 최고의 경지라 할 만하다.

 

이원호(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한국 100경(보길도) 

 

명저의 산실을 찾아서 : http://visit.ocp.go.kr/visit/cyber_new/serv10.jsp


'전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해진유적(淸海鎭遺蹟). 청해포구촬영장  (0) 2007.07.25
동천석실.곡수당  (0) 2007.07.25
미황사  (0) 2007.07.25
여수 돌산도 해변  (0) 2007.03.26
거북형 복원 모형  (0) 2007.03.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