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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골화(骨火 : 지금의 영천)

노촌魯村 2009. 2. 12. 22:47

2) 골화(骨火 : 지금의 영천)

경상북도 영천시 완산동(完山洞) 일대는 신라의 호국 3신에 제사하던 3산(三山) 중의 하나였다. 즉 이 곳은 신라 시대에 국가에서 대신을 보내 골화산신(骨化山神)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고 한다. 완산1동(내완산동)에서 뒷 고개를 넘어 완산2동(외완산동)으로 갈 때, 고개를 거의 다 올라갔을 무렵, 길 가 밭 가운데에 두 개의 돌기둥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돌기둥을 이 마을 부녀들은 ‘미륵’이라 섬기고, 여기에 치성을 드리면 생남한다고 믿고 곧잘 절을 했다고 한다. 높이는 약 110cm 가량으로 네모 반듯하여 인공적으로 다듬은 듯 하지만 실은 자연석이다. 이 돌기둥이 동서로 10m 간격으로 마주 서 있는 이 자리가 바로 대사(大祀) 3산(三山)의 하나로 추정되는 곳으로서, 신라인들에게는 신성시하는 곳이었다.

신라 때에는 우리 민족 고유의 신앙 형태로서, 나라의 번영과 안정을 산과 강의 토지신에게 제사 드리고 비는 것을 가장 중요한 행사로 삼았다. 명산대천에 대한 제사를 지낼 때,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의 세 구분이 있었다. 이 중 대사(大祀)는 가장 중요한 제사였다. 대사(大祀)를 지내는 3산은 내림(奈林 : 지금의 경주 낭산), 혈례(穴禮 : 청도 오리산 혹은 경주시 동해 방면)과 이 곳 골화(骨火 : 영천)였다. 골화의 호국신과 김유신에 얽힌 전설이 삼국유사 기이(記異)편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가 있다.

김유신은 18세 되던 임신년에 검술을 닦아 국선 화랑이 되었다. 이 때 백석(白石)이란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사람이 여러 해 동안 낭도 가운데 속해 있었다.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밤낮으로 계획하고 있을 때 백석이 이를 알고 “공과 내가 함께 몰래 적국을 정탐한 후에 계획하는 것이 어떻습니까?”하였다. 김유신 기뻐하며 백석을 데리고 고구려로 향하였다. 밤이 되어 고개 위에서 막 쉬고 있을 때, 어디서부터인지 두 낭자가 나타나서 유신의 뒤를 따랐다. 골화천(영천)에 이르러 유숙하는데 또 한 낭자가 홀연히 나타났다. 유신이 세 낭자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눌 때 낭자들은 맛좋은 과일을 내놓았다. 유신은 과일을 먹으면서 마음을 터놓고 친밀해졌다. 낭자들이 백석을 떼 놓고 함께 수풀 속으로 들어가면 전할 말이 있다고 했다. 유신이 함께 숲 속에 들어가자 낭자들은 갑자기 귀신의 모양으로 변하여 “우리들은 내림, 혈례, 골화 등 세 곳의 호국신인데 지금 적국 사람이 낭을 유인해 가고 있으나 낭이 이를 모르고 따라가니 안타깝소,”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유신은 이를 듣고 놀라와 엎드려 재배하고 숲을 나왔다. 골화관에서 유숙할 때 백석에게 “지금 타국에 가면서 긴요한 문서를 잊었구나, 너와 함께 돌아가서 기지고 와야겠다.”하였다. 드디어 함께 집에 돌아와서 백석을 결박하고 추궁하였다. 백석은 고구려의 첩자였다. 호국의 삼신은 후일 삼국통일의 주역이 된 김유신을 위기에서 구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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