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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유적지

가슬갑사(嘉瑟岬寺)터

노촌魯村 2009. 2. 12. 22:46

1) 가슬갑사(嘉瑟岬寺)터

청도군 운문면 신원동의 삼계리 계곡에 가슬갑사터가 있다. 이 유적지는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세속오계(世俗五戒)의 계율을 전수하여 후일 삼국통일의 바탕이 되었던 화랑들의 정신적 지주가 형성된 곳이다. 가슬갑사는 고려초기에 없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13세기 말엽 일연(一然)선사께서 운문사(雲門寺) 주지로 있었다. 삼국유사는 군위군 고로면 인각사에서 저술하였으나, 삼국유사 권4의 원광서학(圓光西學)의 내용은 일연선사께서 실제로 가슬갑사의 유적지를 확인하여 서술한 것으로 보인다.

원광법사는 진평왕 때의 고승으로서 당대에 덕행과 학식이 가장 뛰어난 스님이었다. 그는 진평왕의 명으로 고구려 정벌을 위한 걸사표(乞師表)를 써서 수나라에 보내었다. 또 황룡사(黃龍寺)에서 백좌강회(百座講會)를 열어 신라불교사상 대중에 대한 교화를 행한 선구적 인물이었다. 그는 우리 나라의 승려로서는 처음으로 당의 고승전에 오를 만큼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의 명성에 비하여 그의 전기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신분상으로 6두품 출신으로 알려져 왔으며 수이전(殊異傳)에는 속성이 설씨(薛氏), 당의 속고승전(續高僧傳)에는 박씨(朴氏)로 되어 있다. 그는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기량(器量)이 넓고, 유학과 노장학 등에서도 조예가 깊었다. 국내에서의 불교수행에 한계를 느낀 원광법사는 진평왕 11년(589)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강남과 화북의 여러 지역을 두루 섭렵하고 11년만에 귀국하였다. 원광법사는 수나라에서 이미 이름을 떨치던 참이라 신라에 돌아오자 그에 대한 종교적 학문적 명성은 대단하였다.

그 때 사량부 청년 귀산(貴山)은 취항과 친구로서, 덕행이 높고 학식이 깊은 원광법사를 찾아 평생을 두고 계명을 삼을 만한 가르침을 얻고자 하였다. 원광법사는 이 때 수나라에서 돌아와서 운문의 가슬갑사에 있을 때였다. 원광법사는 이들이 출가한 중이 아님을 고려해서 보살계보다는 세속에 적합한 이른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일러 주었던 것이다.

첫째,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이요, (事君以忠)

둘째, 효성으로써 부모를 섬기는 것이요, (事親以孝)

셋째, 신의로써 벗을 사귀는 것이요, (交友以信)

넷째, 싸움터에 나가서 물러서지 않는 것이며 (臨戰無退)

다섯째, 생물을 가려서 죽이는 것이다. (殺生有擇)

귀산과 취항에게 전한 다섯 가지 계율은 화랑의 실천정신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세속오계는 우리 교유의 사상에 바탕을 두고. 유․불․선의 3교가 융합되어 표현된 것이다. 또 신라가 지닌 시대적 특수성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속오계의 정신은 삼국사기의 열전에 나타난 많은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원광법사 이전에도 많은 화랑들이 실천해 왔던 정신이다. 이 세속오계는 귀산과 취항에 의해 널리 세상에 알려졌다. 특히 귀산과 취항이 세속오계의 정신을 지키고 전사한 후, 세속오계는 은연중 모든 화랑도가 받들어 실천하던 실천계율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