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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무령왕릉(武寧王陵) 및 무덤 속의 칼. 환두대도

노촌魯村 2011. 11. 20. 12:49

 

     

   공주 송산리 고분군 (公州 宋山里 古墳群.사적 제13호.충남 공주시 금성동 산5-1)

무령왕릉을 포함한 이 일대의 고분들은 모두 7기가 전해지는데, 송산을 주산으로 뻗은 구릉 중턱의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 ·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다. 1∼6호분은 일제시대에 조사되어 고분의 구조와 형식이 밝혀졌고, 무령왕릉은 1971년 5 ·6호분의 보수공사 때 발견되었다.
먼저 1∼5호분은 모두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무덤 입구에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널방(현실)에 이르는 널길이 널방 동쪽벽에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4호분은 바닥에 냇자갈을 깔아 널받침(관대)을 만들었는데, 5호분은 벽돌을 이용하였다. 이처럼 같은 양식의 무덤이면서 구조와 규모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나는 것은 시기 차이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5호분은 원형으로 남아 있으나, 1∼4호분은 조사되기 전에 이미 도굴되었다. 이외에 벽돌무덤(전축분)으로 송산리벽화고분이라고도 불리는 6호분과 무령왕릉이 있다.
6호분은 활모양 천장으로 된 이중 널길과 긴 네모형의 널방으로 되어 있는데, 오수전(五銖錢)이 새겨진 벽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 · 일월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무령왕릉도 6호분과 같이 연꽃무늬 벽돌로 가로쌓기와 세로쌓기를 반복하여 벽을 쌓았다. 벽에는 5개의 등자리가 있고, 무덤주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지석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6호분과 무령왕릉은 현재 남아있는 백제의 벽돌무덤으로, 모두 터널형 널방 앞에 짧은 터널형 널길을 가지고 있으며 긴 배수로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벽돌무덤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벽화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무령왕릉의 경우 확실한 연대를 알 수 있어, 백제사회의 사회 ·문화상을 연구하는데 절대자료로 평가된다.(문화재청 자료)

   

    

 

 

 

       

 

 

 

 

공주시 웅진동 송산리 고분군 내에 위치한 백제 무령왕(501∼523, 재위)과 왕비가 합장된 능으로 1971년 우연하게 발견되어 발굴조사되었다. 동성왕(479∼501, 재위)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령왕은 안으로 동성왕 말년에 일어났던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여 왕권을 재확립하는 한편, 밖으로는 고구려의 침입을 막아내고, 신라 및 중국 남조의 양나라와 외교를 강화하는 등 웅진 천도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여 백제가 중흥을 이룰수 있는 기틀을 다졌다. 무녕왕릉은 송산리 6호분과 같이 벽돌로 축조한 터널형 전축분으로 직사각형 현실의 남쪽 가운데에 현실로 들어가는 짧은 연도가 달렸다. 연꽃무늬, 인동무늬, 마름모꼴무늬 등 여러 가지 무늬를 아름답게 새긴 벽돌을 각기 그 쓰일 위치에 알맞게 갖가지로 만들어 길이모 쌓기와 작은모 쌓기로 반복하면서 쌓은 현실의 벽 5곳에는 등잔을 놓았던 높이 24㎝의 보주형 등감이 있고, 등감 아래에는 창을 배치하였다. 현실의 크기는 남북 길이 4.2m, 동서 너비가 2.72m, 바닥면에서 터널형을 이룬 천정까지의 높이는 2.93m이다. 발굴 당시 왕과 왕비의 시신을 안치했던 목관이 현실 바닥에 동서로 놓여 있었고, 현실 내부와 연도에서는 금제관식, 팔찌를 비롯한 각종 금은제 장신구와 무기류, 도자기 등 108종 2,906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이 가운데 국보로 지정된 것만도 12점에 이른다. 능의 주인공이 무령왕과 그 왕비였으며, 축조 연대를 명확히 알려주었던 2장의 석판으로 된 묘지(지석)는 연도 입구 가까이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백제왕릉으로서는 최초로 주인공을 확실히 알 수 있고 또 많은 유물을 간직한 채 고스란히 발견된 무녕왕릉의 발굴 조사는 백제 문화 연구에 전환점을 마련해 주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 곳에서 발견된 유물은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으며, 무녕왕릉의 발굴 당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송산리 고분군 내에 모형 전시관을 만들어 놓고 있다.(전국문화유산총람)

 

무령왕릉 석수 (武寧王陵 石獸.국보 제162호.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 34 국립공주박물관)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때 만들어진 석수이다. 석수(石獸)란 돌로 만든 동물의 상(像)으로 좁게는 궁전이나 무덤 앞에 세워두거나 무덤 안에 놓아두는 돌로 된 동물상을 말한다. 무령왕릉 석수는 높이 30.8㎝, 길이 49㎝, 너비 22㎝로 통로 중앙에서 밖을 향하여 놓여 있었다. 입은 뭉뚝하며 입술에 붉게 칠한 흔적이 있고, 콧구멍 없는 큰 코에 눈과 귀가 있다. 머리 위에는 나뭇가지 형태의 철제 뿔이 붙어있다. 몸통 좌우, 앞·뒤 다리에는 불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날개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꼬리가 조각되어 있으며 배설 구멍이 달려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무덤 수호의 관념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발견된 것이다.(문화재청 자료)

 

 

 

 

 무령왕릉 지석 (武寧王陵 誌石.국보 제163호 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 34 국립공주박물관)

이 지석은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과 왕비의 지석으로 2매이다. 이 2매의 지석은 왕과 왕비의 장례를 지낼 때 땅의 신에게 묘소로 쓸 땅을 사들인다는 문서를 작성하여 그것을 돌에 새겨넣은 매지권으로,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될 때 함께 출토되었다.
왕의 지석은 가로 41.5㎝, 세로 35㎝이며, 표면에 5∼6㎝의 선을 만들고 그 안에 6행에 걸쳐 새겼다. 왕의 기록은『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뒷면에는 주위에 네모나게 구획선을 긋고 그 선을 따라 12방위를 표시하였는데,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서쪽 부분은 표시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왕비의 지석인데 가로 41.5㎝, 세로 35㎝이며, 2.5∼2.8㎝ 폭으로 선을 긋고 4행에 걸쳐 새겼다. 선을 그은 부분은 13행이지만 나머지 부분은 공백으로 그대로 남겨 두었다. 뒷면에는 매지문(買地文:땅을 샀다는 문서)을 새겼다. 원래 매지권은 무령왕을 장사지낼 때 만들어진 것인데 그 후 왕비를 합장하였을 때 이 매지권의 뒷면을 이용하여 왕비에 관한 묘지문을 새겼던 것이다.
이 지석은 삼국시대의 능에서 발견된 유일한 매지권으로서 무덤의 주인공을 알 수 있게 한 것으로, 여기에는 당시 백제인들의 매장풍습이 담겨져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다른 유물들과 함께 6세기 초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문화적 교류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백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문화재청 자료)

 

 

 

 

 

 

 

무령왕, 왕비의 목관은 모두 5cm 두께로 잘 다듬은 판재를 짜 맞추어 상자모양의 관을 만들고 그 위에 여러 장의 판재를 짜 맞춘 뚜껑을 덮어 마치 맞배지붕의 가옥처럼 만들었습니다. 목관 판재의 안팎에는 두텁게 옻칠을 하고 관고리와 관못에도 은꽃으로 장식하여 그 품격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왕, 왕비의 목관 모두 홈을 파서 결합하고 못의 모양이나 장식 그리고 관을 운반하기 위한 관고리가 모두 같아 기본적으로 같은 구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목관이 5장의 판재 뚜껑을 짜 맞춘데 비하여 왕비의 목관은 보다 넓은 판재 3장으로 짜 맞춘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습니다. 한편 목관의 뚜껑과 측판의 안에는 금박이 입혀진 작은 청동 못들이 각각 3열,1열씩 박혀 있어 관내부에 비단과 같은 천을 붙였음을 짐작케 합니다. 이와 같은 목관은 무령왕릉보다 약간 늦은 시기의 무덤인 익산 쌍릉에서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관못이나 관고리 장식이 같은 점 이외에, 머리 쪽이 넓고 발쪽이 좁으며 한 장의 판재로 만든 뚜껑 등은 낙랑의 목관에 많이 보입니다. 따라서 무령왕릉의 목관은 무령왕릉 목관만이 지니는 독특한 구조로 된 목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령왕 금제관식 (武寧王 金製冠飾.국보 제154호.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 34 국립공주박물관)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왕관(王冠) 꾸미개(장식) 한쌍이다. 높이는 각각 30.7㎝, 29.2㎝이고, 너비는 각각 14㎝, 13.6㎝이다. 1971년 무령왕릉이 발견·조사되었을 때, 왕의 널(관) 안쪽 머리 부근에서 포개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금판을 뚫어서 덩굴 무늬를 장식했으며, 밑으로는 줄기가 있는데 아래위로 2, 3개의 작은 구멍이 있어 무엇인가에 부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좌우로 벌어진 줄기 중간에는 꽃 무늬를 배치하였으며, 줄기가 길게 연장되면서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준다. 두 가닥은 아래로 향하게 하여 변화를 주고있다. 앞면에는 전체에 걸쳐 구슬모양 꾸미개를 금실로 꼬아서 달았다.(문화재청 자료)

무령왕 금제 뒤꽂이 (武寧王 金製釵.국보 제159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때 금으로 만든 뒤꽂이 일종의 머리 장신구이다. 무령왕릉 나무널(목관) 안 왕의 머리에서 발견되었으며, 길이는 18.4㎝, 상단의 폭은 6.8㎝이다.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역삼각형 모양이며, 밑은 세가닥의 핀 모양을 이루고 있어 머리에 꽂았던 것으로 보인다. 역삼각형의 윗부분은 새가 날개를 펼치고 있는 모습이고, 3개의 꼬챙이쪽은 긴 꼬리처럼 되어 전체 모습이 날고 있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양 날개쪽 좌우에는 꽃무늬를 도드라지게 찍었고, 그 아래는 서로 대칭으로 덩굴무늬를 빈틈없이 메꿔 놓았다. 새의 머리와 날개 부분의 테두리는 끌 끝으로 찍은 작은 점들이 열지어 있다. 여기서 사용된 문양은 모두 뒤에서 두들겨 솟아 나오게 한 타출법(打出法)을 사용하였고 ,세부 표현에는 선으로 새기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왕의 머리부분에서 발견되었고, 끝이 3개로 갈라진 점으로 보아 의례 때 쓰인 머리 장식품으로 보인다.(문화재청 자료)

 

무령왕 금귀걸이 (武寧王 金製耳飾.국보 제156호. 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 34 국립공주박물관)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금 귀고리 한 쌍으로 길이는 8.3㎝이다. 왕의 널(관)안 머리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며, 호화로운 장식이 달려있다.
굵은 고리를 중심으로 2가닥의 장식을 길게 늘어뜨렸다. 하나는 속이 빈 원통형의 중간 장식 끝에 금판으로 된 커다란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이 장식은 무늬가 없어 간소하지만 앞·뒷면에 타원형의 작은 잎을 하나씩 붙여 변화를 주었다. 옆으로 보면 안이 굽은 모습을 하고 있다. 원통형의 중간 장식에는 금선과 금구슬을 이용해 장식한 마개가 있고, 서로 마주보게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둘렀다. 다른 한 가닥은 여러 개의 작은 고리로 이루어진 구슬 모양의 장식에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연결하고, 끝에는 금모자를 씌운 푸른 곱은 옥을 매달아 금색과 조화를 이루게 하였다. 이런 2줄의 귀고리는 경주 금령총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다.(문화재청 자료) 

무령왕비 금귀걸이 (武寧王妃 金製耳飾.국보 제157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백제 때 귀고리 2쌍으로 길이는 11.8㎝, 8.8㎝이다. 왕비의 귀고리로, 굵은 고리를 중심으로 작은 장식들을 연결하여 만들었다. 한 쌍은 복잡한 형식으로 길고 짧은 2줄의 장식이 달려 있고, 다른 한 쌍은 1줄로만 되어있다. 앞의 귀고리 중 긴 가닥은 금 철사를 꼬아서 만든 사슬에 둥근 장식을 많이 연결하였으며, 맨 밑에는 작은 고리를 연결하여 8개의 둥근 장식을 달고 그 아래 탄환 모양의 장식을 달았다. 짧은 줄의 수식은 다른 한 쌍의 것과 거의 같은 수법이나 탄환 장식은 달지 않고, 잎사귀 모양의 장식과 담록색의 둥근 옥을 달았다. (문화재청 자료)

 

 

 

무령왕비 은팔찌 (武寧王妃 銀製釧.국보 제160호)

공주시 무령왕릉 왕비의 나무널(목관)내 왼쪽 팔 부근에서 발견된 한 쌍의 은제 팔찌로, 바깥지름 8㎝, 고리지름 1.1㎝이다. 팔목이 닿는 안쪽에는 톱니 모양을 촘촘히 새겼고, 둥근 바깥면에는 발이 셋 달린 2마리의 용을 새겼다. 용의 조각은 세밀하지는 않으나 힘이 있어, 묵직한 팔찌와 잘 어울리고 있다. 한 개의 팔찌 안쪽에 새긴 글로 보아 왕비가 죽기 6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만든 사람의 이름과 무게가 쓰여있다. 전체적인 윤곽이 깔끔하고 중후하며, 만든시기와 작가, 작품과 직접 관계된 글이 있는 예로, 고대 미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무령왕 발받침 (武寧王 足座.국보 제165호.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 34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목관 안에서 발견된 장의용 나무 발 받침으로 왕의 발 받침대이다. 윗부분이 넓고 아랫부분이 좁은 사다리꼴 통나무의 중앙을 W자로 깊게 파서 양 발을 올려놓게 만들었다. 전면에 검은색 옻칠을 하고 폭 0.7㎝정도의 금판을 오려 거북등 무늬를 만들었으나 일부는 떨어져 없어졌다. 6잎의 금꽃을 거북등 무늬 모서리와 중앙에 장식하고, 꽃판 가운데에 옛날 부인의 머리장식의 하나인 보요(步搖)를 매달아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무령왕비 베개 (武寧王妃 頭枕.국보 제164호. 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 34 국립공주박물관)

무령왕릉 목관 안에서 발견된 왕비의 머리를 받치기 위한 장의용 나무 베개로, 위가 넓은 사다리꼴의 나무토막 가운데를 U자형으로 파내어 머리를 받치도록 하였다. 표면에는 붉은색 칠을 하고 금박을 붙여 거북등 무늬를 만든 다음, 칸칸마다 흑색·백색·적색 금선을 사용하여 비천상과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봉황·어룡(魚龍)·연꽃·덩굴무늬를 그려 넣었다. 베개의 양 옆 윗면에는 암수 한 쌍으로 보이는 목제 봉황머리가 놓여 있는데, 발굴 당시에는 두침 앞에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왕의 머리 받침은 거의 부식되어 두 토막만이 남아 있을 뿐이어서 형체를 알 수 없다.(문화재청 자료)

 

 

 

 무령왕릉 청동거울 일괄 (武寧王陵 銅鏡一括.국보 제161호.충남 공주시 관광단지길 34 국립공주박물관)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청동거울로 청동신수경, 의자손수대경, 수대경 3점이다.
청동신수경은 ‘방격규구문경’이라는 중국 후한의 거울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거울 내부에는 반나체 인물상과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한나라의 거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의자손수대경은 중국 한대의 수대경을 본떠 만든 복제품이다. 거울 중앙의 꼭지를 중심으로 9개의 돌기가 있고, 안에는 크고 작은 원과 7개의 돌기가 솟아있다. 내부 주위의 테두리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선명하지 못하여 알아볼 수 없다.
수대경 역시 한나라 때 동물 문양을 새겨 넣은 수대경을 본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 거울에 비해 선이 굵고 무늬가 정교하지 못하다. .(문화재청 자료) 

청동신수경은 ‘방격규구문경’이라는 중국 후한의 거울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거울 내부에는 반나체 인물상과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한나라의 거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수대경 역시 한나라 때 동물 문양을 새겨 넣은 수대경을 본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 거울에 비해 선이 굵고 무늬가 정교하지못하다

의자손수대경은 중국 한대의 수대경을 본떠 만든 복제품이다. 거울 중앙의 꼭지를 중심으로 9개의 돌기가 있고, 안에는 크고 작은 원과 7개의 돌기가 솟아있다. 내부 주위의 테두리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선명하지 못하여 알아볼 수 없다.

 

 

무령왕비 금목걸이 (武寧王妃 金製頸飾.국보 제158호)

공주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백제 무령왕비의 목걸이로, 길이는 각각 14㎝, 16㎝이다. 9마디로 된 것과 7마디로 된 것 2종류가 있는데, 발굴 당시 7마디 목걸이가 9마디 목걸이 밑에 겹쳐져 있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활 모양으로 약간 휘어진 육각의 금막대를 끝으로 갈수록 가늘게 하여 고리를 만들고 다른 것과 연결시켰다. 고리를 만들고 남은 부분을 짧은 목걸이의 경우 10∼11회, 긴 목걸이는 6∼8회 감아서 풀리지 않게 하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연결된 금막대마다 고리를 만들고 마무리를 한 솜씨가 매우 뛰어나다. 2개의 목걸이 모두 한쪽 끝에 몸에 걸기 위한 작은 고리가 끼워져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은 간단한 구조를 하고있다. 현대적 감각과 함께 매우 세련되어 보이는 작품이다. (문화재청 자료)

 

 

 

 

     

금동제신발(왕) : 왕의 신발은 내측판, 외측판과 바닥판의 3판을 서로 붙여 만들었습니다. 각 판은 다시 안에 은판이 있고 그 밖에 금동판을 덧댄 것입니다. 신발 속에는 3중의 포가 붙어 있고, 얇은 나무껍질이 함께 나왔는데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닥은 앞부분이 조금 들려 있고, 10개의 철못이 박혀 있는데 단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사각추모양입니다. 내측판의 표면에는 전면에 거북등무늬가 구획되었는데, 그 안에는 꽃잎무늬를 장식하였습니다. 외측판 역시 거북등무늬가 타출되었는데, 내부에 꽃잎무늬와 더불어 봉황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동제수저  : 무령왕릉 출토 수저 가운데 숟가락은 몸체가 은행알 모양이고 손잡이가 끝으로 가면서 넓어져서 기다란 삼각형을 이루고 있으며 젓가락의 경우는 지름면이 각(角)져 있습니다. 무령왕릉의 숟가락은 여러 줄의 돋을선과 가는선을 새겨서 화려하게 장식하여 그 품격을 더해주고 있으며 젓가락 가운데에는 손잡이 부분에 둥근 고리를 만들어 고려시대의 젓가락처럼 끈으로 묶는 고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무령왕릉의 숟가락과 꼭같은 숟가락이 이와 비슷한 시기의 일본의 무덤에서 출토된 바 있어 백제와 일본과의 문물교류의 한 양상을 살펴볼 수 있게 합니다.  

동제잔 : 모두 3점 출토되었습니다. 1점(A)은 왕비의 머리 쪽에서, 2점(B,C)은 연도입구 가까이에 놓여 있었습니다. A의 전체형태는 반원상입니다. 구연 내면에 턱진 점은 위의 발과 같습니다. 구연 바로 아래에 2줄의 횡침선을 돌렸습니다. 굽은 0.9cm정도로 높은 편입니다. B와 C는 모두 구연이 외반되었고 구연끝이 뾰족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동체부에는 1cm가량 돌출된 돌대를 2줄 돌렸습니다. 굽은 0.6cm내외의 높이로 A에 비하여 낮은 편입니다.

동제접시 : 전체적인 형태는 깊이가 얕은 원형의 용기이며 내면에 침선이 있어 뚜껑보다는 접시로 사용되었을 것 같습니다. 구연은 윗면이 둥글며 두툼하고 아랫면이 직선적인데 구연 끝을 뾰족합니다.

받침있는 은잔 : 동탁은잔은 청동제 받침(동탁)과 은으로 만든 잔(은잔)을 합친 것입니다. 받침은 낮은 대각이 달린 접시 모양인데 정 중앙에는 은잔을 받치기 위한 속이 빈 원통형의 받침이 솟아 있습니다. 여기에 은잔의 굽이 안으로 들어가면서 걸치게 고안되어 있습니다. 마치 단아한 산봉우리와 같이 만든 잔 뚜껑에는 산과 산사이의 골짜기에 짐승이 노닐고 있으며, 위로 올라가며 나무가 새겨져 있고 꼭대기에는 연꽃잎이 빈틈없이 채워져 있습니다. 뚜껑 덮힌 잔의 윗부분에는 구름무늬가 부드럽게 표현되었고, 그 밑으로 3 마리의 용이 유유히 날고 있으며, 이 모두를 연꽃과 고사리 같은 꽃들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습니다.

 

 

 

 

 

 

일본 왕 고백 "백제 무령왕의 후손"
무덤 속의 칼. 환두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