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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상주

왕산역사공원

노촌魯村 2012. 6. 16. 03:49

 

왕산(해발 71.3m)은 상주시내 중심부에 솟아 있는 작은 산으로, 조선시대 과거에 장원한 사람이 많이 배출(임진왜란 전까지 68명이 문과 급제)되면서 '장원봉'(壯元峯)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때 왜병이 정상에 층루(層樓)를 짓고 난 뒤부터는 장원이 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일제강점기 때는 왕산의 '왕'(王)자를 같은 발음인 '앙산'(央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금도랑은 상주성 서쪽 파로문(서문) 지역에서 왕산 뒤편으로 흐르는 냇물로, 1천3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상주 복용동 석조여래좌상 (尙州 伏龍洞 石造如來坐像.보물 제119호)

상주 복용동 석조여래좌상 (尙州 伏龍洞 石造如來坐像.보물 제119호.경북 상주시 서성동 163-48 왕산공원)

 상주 시내 왕산공원 왕산 남쪽 기슭에 석불 일구가 보존되어 있다. 이 석불은 원래 상주시 복용동에 있었던 것을 1975년 현재 자리로 옮긴 것이다. 복룡동에 있는 당간지주와 복룡동 일대에서 많이 발굴되고 있는 옛 기와쪽 등으로 미루어 보아 중고대에 이 곳에는 큰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석불은 견고한 화강석 하나로 조성된 여래상으로 결가부좌하였는바 양쪽 무릎과 오른손, 그리고 양어깨와 머리 부분에 파손이 심하여 광배와 대좌는 없어졌다. 파손된 머리에는 나발(꼬불 꼬불한 부처의 두발)이 뚜렷하게 남아있고, 양쪽 귀는 길게 늘어져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양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없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두 눈은 눈 고리가 길게 옆으로 흘렀으며, 콧마루는 파손이 심하나 형태는 뚜렷하여 입술과 같이 작게 조각된 것이 주의를 끈다. 양쪽 볼은 비대한 듯 하나 약간의 웃음을 담고 입술에도 미소가 어리어서 둔중함 보다는 오히려 풍려 한 인상을 주고 있다. 얼굴 모양은 원만하며 목에는 삼도(3개의 줄)가 돌려졌는데 그 선은 얼굴과 같이 매우 부드럽게 조각되었다. 어깨를 두른 법의는 두 팔에 걸쳐 밑으로 흘렀고 가슴 밑 배꼽 부분에서는 원호를 그리면서 두 무릎까지 흘렸는데 옷의 아름다움이 비단 같고 오른쪽 무릎 위에는 왼쪽 발바닥이 조각되어 있다. 수인(그 깨달은 내용을 양쪽 손가락으로 나타내고 있는 모양)은 오른 손은 크게 파괴되고 왼손은 다섯 손가락이 모두 파손되었으나 양손의 위치로 보아 지권인(왼손 둘째 손가락을 뻗치어 세우고 오른손으로 그 첫째 마디를 쥐는 형상)을 맺은 것으로 추측되므로 이 불상은 비로자나불이라 생각되며 만들어진 연대는 고려 초기인 10세기 경으로 추측된다.(상주시청 자료)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선생 기념비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 2면 사설란에 실린 '시일야방성대곡'

시일야방성대곡

저 번에 이토 후작이 한국에 왔을 때,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순진하게도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에 동양 삼국이 정족(鼎足)하는 안녕을 주선한다고 자처하던 사람이었으니, 오늘날 <그가> 한국에 온 것은 반드시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도와서 세움)하자고 할 방법을 권고하리라’고 하여, 시골에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官民, 관리와 국민)이나 상하가 환영하길 마지아니하였는데, 천하의 일에는 헤아리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뜻밖에도 5조약은 어디에서부터 나왔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 아니라 실상 동양 3국이 분열할 조짐을 빚어낼 것이니, 이토 후작의 본래부터 주장했던 뜻은 어디에 있었던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강경하신 성의(聖意)가 거절하여 마지아니하였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컨대 이토 후작 스스로 알고 스스로 간파하였을 것이어늘.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이른바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이, 영달과 이득을 바라고, 거짓된 위협에 겁을 먹고서 머뭇거리고 벌벌 떨면서 달갑게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어 4천 년을 이어온 강토와 5백 년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남에게 바치고, 2천만 생령(生靈)으로 하여금 모두 다른 사람의 노예 노릇을 하게 하였으니, 저들 개돼지만도 못한 외부 대신 박제순 및 각부 대신들은 족히 깊게 나무랄 것도 없거니와, 명색이 참정 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관인데도 다만 부(否)자로써만 책임을 막고서 이름을 유지하는 밑천이나 꾀하였던가? 김청음이 국서를 찢고 통곡하던 일도 하지 못했고, 정동계가 칼로 할복하던 일도 못하고서 그저 편안히 살아 남아서 세상에 나서고 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상 폐하를 다시 대할 것이며,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를 다시 대하리요.

아! 원통하고도 분하도다. 우리 2천만이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의 4천 년의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별안간 멸망하고 끝났도다. 아!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