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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상주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선생 기념비

노촌魯村 2012. 6. 16. 03:33

 

 

 

 

 

 

 

1905년 11월 20일. 황성신문 2면 사설란에 실린 '시일야방성대곡'

시일야방성대곡

저 번에 이토 후작이 한국에 왔을 때,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순진하게도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에 동양 삼국이 정족(鼎足)하는 안녕을 주선한다고 자처하던 사람이었으니, 오늘날 <그가> 한국에 온 것은 반드시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도와서 세움)하자고 할 방법을 권고하리라’고 하여, 시골에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官民, 관리와 국민)이나 상하가 환영하길 마지아니하였는데, 천하의 일에는 헤아리기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뜻밖에도 5조약은 어디에서부터 나왔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뿐 아니라 실상 동양 3국이 분열할 조짐을 빚어낼 것이니, 이토 후작의 본래부터 주장했던 뜻은 어디에 있었던가?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대황제 폐하의 강경하신 성의(聖意)가 거절하여 마지아니하였으니, 이 조약이 성립되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컨대 이토 후작 스스로 알고 스스로 간파하였을 것이어늘.

아! 저 개돼지만도 못한 이른바 우리 정부의 대신이란 자들이, 영달과 이득을 바라고, 거짓된 위협에 겁을 먹고서 머뭇거리고 벌벌 떨면서 달갑게 나라를 파는 도적이 되어 4천 년을 이어온 강토와 5백 년의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남에게 바치고, 2천만 생령(生靈)으로 하여금 모두 다른 사람의 노예 노릇을 하게 하였으니, 저들 개돼지만도 못한 외부 대신 박제순 및 각부 대신들은 족히 깊게 나무랄 것도 없거니와, 명색이 참정 대신이란 자는 정부의 수석관인데도 다만 부(否)자로써만 책임을 막고서 이름을 유지하는 밑천이나 꾀하였던가? 김청음이 국서를 찢고 통곡하던 일도 하지 못했고, 정동계가 칼로 할복하던 일도 못하고서 그저 편안히 살아 남아서 세상에 나서고 있으니, 그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상 폐하를 다시 대할 것이며, 무슨 면목으로 2천만 동포를 다시 대하리요.

아! 원통하고도 분하도다. 우리 2천만이 남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과 기자 이래의 4천 년의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별안간 멸망하고 끝났도다. 아! 원통하고 원통하도다. 동포여! 동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