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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덕

영해 괴시마을 목은 이색 유적지

노촌魯村 2012. 8. 18. 11:23

 

 

 

 

경북 영덕의 목은 이색 선생 생가터(이색은 외가인 이곳 영덕의 괴시마을에서 태어났다)

 가정(稼亭) 이곡(李穀) :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아버지. 이곡은 이윤경의 5대손으로 당대의 대문장가이며, 역동(易東) 우탁(禹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더불어 경학(經學)의 대가였다. 1320년(충숙왕 7년) 문과에 급제하고 원나라 제과(制科)에도 급제하였다. 원의 벼슬은 중서성좌우사원외랑(中書省左右史員外郞)에 오르고, 고려에서의 벼슬은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올랐다.

 가정(稼亭) 목은(牧隱) 양(兩)선생 유허비

 

 

 

 

 

 

 

 

 

 


 

 

 

 

이색초상 (李穡 肖像.보물 제1215호.서울 종로구 종로5길 76 (수송동))

고려말 3은(三隱) 중의 한사람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의 초상화는 원래 관복차림과 평상복차림의 두 종류가 있었으나 현재는 관복차림만 전해진다. 관복차림의 그림도 원본은 전하지 않고 원본을 보고 옮겨 그린 것으로 모두 4본 5점이 전해진다. 1654년 허의와 김명국이 옮겨 그렸다고 전해지는 가로 85.2㎝, 세로 143㎝ 크기의 예산누산영당본(禮山樓山影堂本)은 관리들이 쓰는 사모를 쓰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사모에는 회색줄을 넣어 입체감을 표현했으며, 얼굴에는 옅게 붉은 기운을 넣어 당시의 화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초상화는 고려말 관복을 충실하게 표현하였고, 옮겨 그린 것이지만 당시 일류화가들이 그린 것으로 회화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목은영당본(牧隱影堂本)은 가로 25㎝, 세로 25.8㎝ 크기의 소본(小本)과 가로 81.6㎝, 세로 149.8㎝ 크기의 대본(大本)이 전해진다. 소본은 누산영당본과 같은 시기인 1654년 그린 것으로 현재는 반신상이지만 잘려나간 곳을 감안하면 전신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본은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크기로 1711년에 옮겨 그려 임강서원에 모셔 두었다. 가로 85.2㎝, 세로 150.7㎝ 크기의 문헌서원본(文獻書院本)은 목은영당본과 동일한 형식으로 1755년에 새로 옮겨 그린 것이다. 목은영당본에 비해 수염처리와 옷의 묘사 등의 표현기법이 떨어지는데 이는 화가의 기량 차이 때문인 것 같다. 가로 78.7㎝, 세로 146.3㎝ 크기의 대전영당본(大田影堂本)은 헌종 10년(1844)에 옮겨 그린 것으로 누산영당본과 동일한 형태와 규모이며, 뛰어난 화가에 의해 옛 그림 화풍이 잘 표현된 초상화이다. 현재 이색영정의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시대 일류화가에 의해 새로 옮겨 그려진 4본 5점 모두 수준이 높고 보존 상태 역시 양호하며, 역사상 중요 인물을 그린 것으로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문화재청 자료)

목은영정 (牧隱影幀.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71호. 경북 안동시 일직면 원리 산9)

고려 후기의 문신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이다. 이색은 공민왕 1년(1352) 세금제도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장려, 불교억제 등 여러 정책에 대해 건의문을 올렸다. 공양왕 1년(1389) 이성계 일파가 위화도 회군으로 세력을 잡자 장단지역으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이후 이성계가 그를 조정으로 불러 들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이듬해 여강지역으로 가던 도중 생을 마치었다. 그림의 작가는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의 대학자였던 권근의 찬하는 글이 있고, ‘영락갑신9월’이라는 기록이 함께 있어, 조선 태종 4년(1404) 이전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처음에는 은거한 뒤 야인 차림의 초상화가 따로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한편 이 초상화는 임진왜란 당시 분실되었다가 일본에 갔던 사신에 의해 되찾게 되었다는 설도 함께 전해오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목은이색선생영정 (牧隱李穡先生影幀.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2호.경남 하동군 청암면 중이리)

고려 후기의 충신이자 성리학자인 목은 이색(1328∼1396) 선생의 초상화로, 가로 60㎝, 세로 120㎝ 크기의 엷은 채색화이다. 이색은 삼은(三隱) 중 한 사람으로, 14세에 성균시에 합격하였고, 공민왕 16년(1367) 성균관대사성이 되었다. 학문과 불교에 대한 조예가 깊었고 정치에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화폭 왼쪽 윗부분에 조선 태종 4년(1404)에 제작된 이래 영조 42년(1766)에 다시 그렸다는 기록을 적어 두고, 오른쪽 위쪽으로는 선생을 찬양한 글을 기록해 놓았다. 조선 전기의 초상화 기법이 잘 나타난 있는 작품으로, 강원도 원주 용화산 고자암에 보존하고 있던 것을, 광무 10년(1906) 중이리 소재의 경모당으로 옮겼다가 그곳이 하동댐 건설로 수몰됨에 따라 이곳 금남사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가정(稼亭) 목은(牧隱) 양(兩)선생 유허비(괴시리 입구에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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