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돌석장군생가지 (申乭石將軍生家址.경상북도 기념물 제87호.경북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1)
신돌석(1878∼1908)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평민출신의 의병장으로는 가장 먼저 군사를 모아 막강한 의병세력으로 성장하여 1896∼1908년 영덕, 영양, 울진 등의 여러 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여 독립의병사에 길이 남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원래 있던 생가는 일본 관헌들이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꺾기 위한 정략적 차원에서 불에 태워 없앴고, 지금 있는 집은 1995년 복원한 것이다.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의 一자형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문화재청 자료)
신돌석장군생가지 (申乭石將軍生家址) : 신돌석장군 한말의 평민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평산, 자는 순경이고 호는 장산, 본명은 태호이다. 이명은 돌석, 태홍, 태을, 대호이며, 별명은 태백산 호랑이로 알려져있다.1878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출생. 이중립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으로 전국에서 봉기하자 영해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이듬해 해산하였다.이후 1905년 을사조약으로 재차 의병이 봉기하자, 1906년 영릉의병진으로 창군하여 경상남북도, 강원도, 충청도 일원에서 신출귀몰한 게릴라전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하였다.1907년 이인영 총대장으로부터 교남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으나, 1908년에 이르러 의병장들이 많이 순국하고 전세가 불리해져 의 병활동이 위축되자 11월에 후일을 기약하고 의병을 해산하였다.신돌석은 후일을 기약하고 지품면 눌곡리 외가의 동생들인 김상렬, 상태, 상호 형제를 찾아가 은거했는데, 현상금에 눈이 먼 이들이 준 독주를 마시고 도끼로 살해되고 말았다.그 때의 장군의 나이 31세였다. 1962년 장군의 유해가 국립묘지 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1995년 도곡리에 생가가 복원되고 1999년 장군의 혼이 어린 이 자리에 장군의 항일 정신을 길이 후대에 남기고 빛내기 위해 성역화 공원이 조성되고 그 기념관이 세워졌다.(영덕군청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