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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공주 공산성 (公州 公山城)

노촌魯村 2013. 3. 4. 15:37

 

 

공주 공산성 (公州 公山城.사적 제12호. 충남 공주시 산성동 2외)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였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동서로 약800m, 남북으로 400m 정도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는데, 1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암문·치성·고대·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영은사·연지·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 도성이었으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중요한 유적이다.(문화재청 자료) 



 

 

 

  

    

 

목사 김효성의 비 (牧使金孝誠의碑.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1호. 충남 공주시 금성동16-1)

조선 중기의 문신인 김효성 선생의 비이다. 김효성(1585∼1665)은 광해군 5년(1613) 생원이 되었으며,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정조, 윤인, 이위경 등이 인목대비를 해치려고 할 때 이들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다 길주에 유배당하고 뒤에 진도로 옮겨 유배생활을 하였다. 인조반정으로 관직을 되찾아 의금부도사를 지냈으며 청안현감이 되었고, 이후 남원, 죽산의 부사와 공주, 청주의 목사 등을 두루 지냈다. 오랜 외직생활동안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목민관으로 이름을 떨쳤다.(문화재청 자료)

 

 

제민천교 영세비(濟民川橋 永世碑.공주시 향토문화유적 기념물 제20호.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161-1 공산성 서문 입구)

1817년(순조 17) 여름 대홍수로 제민천이 범람하고 교량이 붕괴되자 백성들은 그 수리를 원하였다. 그러나 공사에 필요한 비용은 3천여 금이라는 막대한 액수로 백성들에게 거둘 수 없는 매우 많은 돈이었다. 이에 비변사에 보고하여 충청수영의 군자미를 얻고 자체자금과 부여와 연기의 공전을 합하여 사업의 자금을 겨우 마련하였다. 이 다리의 복구는 8월에 마치고 하천의 둑을 고쳐 쌓는 일은 이듬해인 1818년 4월에 모두 완료되었다. 그 과정에서 공이 있는 관리와 자금의 지원에 혐조한 강신환 등 원납인 10인의 이름을 기록하여 두었다. 제민천 영세비의 비신 높이는 110㎝이고 폭 45㎝로 되어 있다. 제민천 영세비는 제민천제민천에 놓여 있던 교량을 중수하기 위해 당시 고을 사람들의 노력과 정성을 쏟았는지 알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하나의 교량을 중수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자금이 필요하고, 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썼던 방법들도 알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 자금의 일부를 댄 사람들의 명단을 통해 당시 고을의 실세를 추측해 볼 수 있다.(공주시청 자료)

  

금서루(錦西樓) : 금서루는 4곳의 성문 중 서쪽에 위치한 문루였으나, 유지(遺址)만이 남아 있었는데 이후 성내(城內)로 진입하는 차도로 이용되다가 1993년도에 복원되었다. "공산지(公山誌)"에 의하면 문루의 규모는 동문과 같이 3칸, 측면 1칸의 중층건물이었다고 한다.

 

 

금서루 성내에서 본 광경 

  

 

 

 

 

 

 

 

 

공산성 쌍수정 (公山城雙樹亭.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9호.충남 공주시 금성동 14-4)

공산성 진남루 북서쪽에 있으며, 조선 영조 10년(1734)에 처음 세운 정자이다. 인조가 이괄이 일으킨 반란(1624)을 피하여 공주로 잠시 피난 왔을 때, 이곳에 머물렀던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후 여러 차례 보수되어 오다 1970년에 전체적으로 해체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문화재청 자료)

 

 

충남 공주시 산성동에서 인절미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쌍수정사적비 (雙樹亭史蹟碑.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5호.충남 공주시 금성동 14-4)

조선시대 인조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하여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고 있는 비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 위에 비몸을 세우고, 목조 건축의 지붕을 모방한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 일반적인 양식이다. 비문에는 이괄의 반란,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10일 동안의 행적, 왕이 머물렀던 공산성에 대한 내용 등이 적혀 있다.숙종 34년(1708)에 세운 비로,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문화재청 자료) .

 

추정 왕궁지(推定 王宮址)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긴 웅진시대 초기의 왕궁터로 추정된다. 1985년 - 1986년 총 2년에 걸친 발굴 조사 때 10칸, 20칸의 등의 큰 건물터와 돌로 쌓은 둥근 연못터 및 목곽의 저장 시설 등 각종 유적이 확인되었고, 백제의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공산성 연못 

 

 

공산성 진남루 (公山城鎭南樓.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  

공산성의 출입통로로 이용되고 있는 진남루는 성의 남문에 해당되며,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원래 토성(土城)이었던 것을 석축성(石築城)으로 고쳐 세운 것은 조선 전기의 일이다. 진남루도 그 때 세운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고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여 원래대로 복원한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장식한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문화재청 자료)

공산성 백제 건물지 

 

공산성에서 출토된 와당

공산성 공북루(拱北樓.충남 유형문화재 37호. 충남 공주시 금성동 165)

공북루는 공산성이 금강에 임하고 있는 도하(渡河)지점에 세워져 있으며 남쪽에 위치한 진남루에 대하여 북문의 기능을 갖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가 큰 문루건축이어서 상층에는 루(樓)마루를 깔았고 하층은 통행로로 삼고 있다. 장대석으로 쌓은 낮은 기단 위에 기둥을 3렬로 배열하였는데 북쪽으로 강에 면하고 있는 주열(柱列)에는 팔각주를 사용하고 있다. 기둥 사이에는 문짝을 달지 않았으며 그 대신 좌우로 연결된 석축성벽이 북쪽으로 꺾어지면서 주위를 차단하였으며 중앙칸만을 통행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상층 루(樓)마루 4면에는 청판을 끼운 낮은 난간을 돌리고 있을 뿐이며 처마 밑의 결구방법도 공포와 창방(昌枋)을 생략하고 기둥머리고 직접 주심도리를 받치고 있다.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앞 뒤 기둥 위에 대들보를 걸고 그 상부에 주두를 배치하여 종량(宗樑)을 받쳤는데 이 종량 위에 있는 파련대공(波蓮臺工)에는 뜬 창방이 첨가되어 있다.(공주시청 자료) 

  

 

 

 

 

 

 

 

 

 

 

 

 


 


공산루



   

새바위성지에서 본 공산성


공산성 옛 사진(출처:조선고적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