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성덕왕릉(慶州 聖德王陵.사적 제28호.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8)
경주에서 불국사 방향으로 가는 길의 동남쪽 구릉 소나무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1∼737)의 무덤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본명은 융기이다. 당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37년에 왕이 죽자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이 능은 밑둘레 46m 높이5m이다. 무덤 아래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는데, 높이 90㎝ 정도의 돌(면석)을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의 조각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석상이 놓여있고 무덤 주위의 4모서리에는 돌사자를 배치하였다. 석상 앞쪽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 각 1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무인석 1개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石人) 1개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에서 보이고 있는 석물의 사실적인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초기 양식에 속하며,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서 완비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성덕왕릉귀부(聖德王陵龜趺.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6호.경북 경주시 조양동 666)
통일신라 성덕왕(재위 702∼737)의 능 앞에 세웠던 비석의 받침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비는 원래는 비몸과 그 위에 머릿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이 받침돌만
남아 있다. 받침의 거북은 목이 부러졌으며, 앞·뒷발에는 발톱을 새겨 놓았다. 등에는 6각형 무늬를 새겼으며, 중앙에 비몸을 꽂았던 네모난 홈이
파여 있다. 거북의 등에 새긴 무늬나 다른 덩굴무늬를 통해 8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비록 비몸과 머릿돌이 없어졌으나
왕릉을 만들 때 이용된 거북받침돌의 제작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문화재청 자료)
경주 효소왕릉(慶州 孝昭王陵.사적 제184호.경북 경주시 조양동 산8)
신라 제32대 효소왕(재위 692∼702) 무덤이다. 신문왕(재위 681∼692)의 아들로서 삼국을 통일한 후 안정과 발전이 있던 시기에 왕위에 올라 서시전과 남시전 등 시장을 열어 물품의 유통을 쉽게 하였다. 높이 4.3m, 지름 10.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석을 돌렸으나 현재 몇 개만이 남아있다. 무덤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혼령이 머무는 자리라는 혼유석만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02년에 왕이 죽자 이름을 효소라 하고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했으나, 현재 서쪽에 있는 이 무덤은 망덕사터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약 8㎞ 거리에 있어 차이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망덕사터 동쪽에 있는 신문왕릉을 효소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문화재청 자료)
조선고적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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