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지혜와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마음의 눈으로 보고자,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보이지 않는 것까지 기록하고자합니다.

충남

남연군의 묘(南延君의 墓)

노촌魯村 2013. 4. 20. 13:06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보입니다.







오른편에 보이는 비석이 남연군 신도비

 남연군 신도비

 

 

 


남연군의 묘(南延君의墓.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5-28)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의 묘이다.
대원군 이하응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라는 말을 듣고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곳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을 불태우고 탑을 부순 후 이장했으며, 이장한지 7년 후에 차남 명복이 태어났는데 그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그 후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으며, 이 일로 대원군이 서양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묘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무덤 주변에서 조선시대의 기와가 많이 나왔다고 전해진다.(출처: 문화재청)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822) : 조선 시대의 문신, 왕족으로 이름은 구(球), 원래 이름은 채중(采重)이다. 시호는 영희(榮僖)·충정(忠正).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이며, 고종황제의 할아버지이다. 원래 인평대군의 6대손이나 뒤에 아들 없이 사망한 사도세자의 넷째 서자 은신군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남연군묘에서 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일원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보입니다.



예산 가야사지(禮山伽倻寺址.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107-31외 22필)

가야사지는 예산군과 서산시 경계에 있는 가야산(伽倻山) 석문봉의 동쪽 아래 넓게 형성된 골짜기에 있는 절터이다.
이곳은 가야동이라고 불리는데 99개의 암자가 있었으며 절터의 중심지라고 전해지는 곳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인 남연군묘(南延君墓)가 자리잡고 있다.
지금 대부분 개간되어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사지의 가람을 추정할 만한 유구(遺構)는 이미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야동 계곡의 논과 밭에 흩어져 있는 기와조각과 석재, 자기조각으로 보아 넓은 골짜기에 걸쳐 거대한 규모로 사찰이 조영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대원군이 남연군묘를 면례(緬禮: 무덤 옮겨서 다시 장사 지냄)하기 위해 절을 소각하고 절 뒤에 있던 고려시대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세운 금탑(金塔)을 철거함으로써 폐사(廢寺)가 되었으며, 이곳에 있던 금탑을 남연군묘 안에 부장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상태로는 사지의 가람을 확인할 수 없으나 사찰의 중심지로 추정되는 남연군묘 부근에는 기와조각과 초석으로 보이는 대형 석재가 흩어져 있다.(출처:문화재청)

  




 

 

사진출처 : 문화재청 

남은들상여(남은들喪輿.중요민속문화재 제31호)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시신을 장지까지 운반하던 기구로 행상, 영여, 온량거라고도 한다. 남은들 마을입구의 상여막에 보관되어 있는데 보통의 상여막에서 처럼 상여를 해체하여 보관하지 않고 조립된 그대로 관람하기 좋게 전시되어 있다.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해 넓은 천을 펼쳤다. 몸체에는 봉황, 용무늬 등이 새겨지고 색색의 띠와 술을 늘어뜨려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데 망자의 명복을 빌고, 슬픔을 덜어주려는 의미인 듯 싶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남연군은 순조 22년(1822)에 죽었는데 당시의 가야사 터(현재, 예산군 상가리에 있는 보덕사터)가 왕손을 낳게 하는 명당이라는 풍수설에 의하여, 흥선대원군이 헌종 6년(1840)에 가야사를 불태우고 아버지의 묘를 이장한 것이라 한다. 이장을 하고 난 그 다음 해에 둘째 아들 이재황(李載晃)-후일, 고종으로 즉위함-을 낳았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상여의 제작은 1840년과 고종의 탄생년인 1852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상여는 그 자체의 가치보다도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상여라는 점에서 유물로서 가치가 있다. 각 부의 조각수법도 당시의 조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이며, 다른 작품에 비하여 어느 정도 제작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또한 대원군이 세도를 얻기 전에 제작된 것이므로,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보다는 조촐한 모습이지만 왕실 상여의 제작을 담당하던 ‘귀후서(歸厚署)’에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왕실에서 사용하던 상여인 대여(大輿)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숙종 대의 ‘청풍부원군 상여’와 비교할 만한 가치를 지닌 자료이다.(출처:문화재청)
 

 사진출처 : 문화재청 

 사진출처 : 문화재청 

 사진출처 : 문화재청 

 사진출처 : 문화재청 

 사진출처 : 문화재청 

 사진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