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 용연사(達城 龍淵寺.달성군 옥포면 옥포면 반송6길 6)
용연사는 비슬산의 북쪽 기슭에 자리잡은 사찰로 달성군 옥포면에 소재한다.
진입로 입구에 조성된 벚꽃길이 유명하며, 계곡 입구에 이르면 용연사의 명물 '옥연지'가 나타난다.용연사는 912년(신라 신덕왕 1년)보양선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용연사 적멸보궁 뒤뜰에는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모셔온 석가세존 진신사리를 봉안한 석조계단이 조성되어 있다. 이중기단 위에 석종형 탑신을 세우고 팔부신상, 사천왕상으로 조각한 이 석조계단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석조예술품 으로, 보물 제 539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연사삼층석탑(龍淵寺三層石塔.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대구 달성군 옥포면 용연사길 260)
용연사 극락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바닥돌은 후대에 새로운 돌로 보수한 상태이며, 기단과 탑신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이 짧고 처마가 얇은데 비해 밑면에 새긴 4단의 받침이 높직하다.
극락전의 장중한 규모에 비해 석탑의 높이가 2.6m로 너무 작아 서로 잘 조화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이 1층으로 줄어들고, 지붕돌의 조각양식이 변화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자료)
용연사극락전(龍淵寺極樂殿.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대구 달성군 옥포면 용연사길 260)
비슬산 용연사는 통일신라 신덕왕 원년(912)에 보양국사가 처음 지었다고 전한다. 조선 세종 1년(1419)에 천일대사가 다시 지었고,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여러 해에 걸쳐 다시 지었다. 이렇게 지어진 건물은 200여 칸이 넘고 승려도 500여 명이나 되는 큰 절이었다고 한다.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은 영조 4년(1728)에 다시 지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간결한 맞배지붕집이다. 지붕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 양식으로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문화재청 자료)
달성 용연사 금강계단(達城 龍淵寺 金剛戒壇)
달성 용연사 금강계단(達城 龍淵寺 金剛戒壇.보물 제539호.대구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915)
계단(戒壇)은 계(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를 수여하는 식장으로, 이 곳에서 승려의 득도식을 비롯한 여러 의식이 행하여 진다. 용연사 내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이 계단은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임진왜란(1592) 때 난을 피해 묘향산으로 옮겼던 통도사의 부처사리를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이 다시 통도사로 옮길 때 용연사의 승려들이 그 일부를 모셔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한다.
돌난간이 둘러진 구역 안에 마련된 계단은 널찍한 2단의 기단(基壇)위로 종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아래층 기단은 네 모서리마다 4천왕상(四天王像)을 1구씩 세워두고, 위층 기단은 4면에 8부신상(八部神像)을 돋을새김하였는데, 뛰어난 조각솜씨는 아니지만 섬세하고 균형감이 있어 단조로운 구조에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유행한 양식을 보이고 있는 탑신은 별다른 꾸밈을 하지 않은 채 꼭대기에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조각해 두었다.
절 안에 세워져 있는 석가여래비에는, 석가의 사리를 모시고 이 계단을 쌓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조선 광해군 5년(1613)에 계단이 완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구조가 섬세하고 조각기법이 예리하며, 특히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작품으로서 당시의 석조건축과 조각을 연구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계단(戒壇)이란 수계의식, 득도식 등을 비롯한 여러 의식이 행해지는 신성한 곳으로 금강계단이라고도 한다. 용연사 내의 한적한 곳에 자리잡은 이 계단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두고 있으며, 계단의 앞쪽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전각을 설치하였다. 통상 적멸보궁은 일반적인 전(殿)이나 각(閣)보다 법당으로서의 격이 높은데, 내부에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으며 법당 바깥에 설치한 계단이나 사리탑에 모셔진 진신사리를 예배의 대상으로 한다.
이곳에 봉안된 사리는 신라 선덕여왕(632-647) 때의 고승인 자장법사가 중국에서 구법(求法)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져와 두 함(函)에 넣어 통도사에 봉안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임진왜란(1592) 때 통도사의 사리탑이 파괴되어 사리를 도난당하였다. 그 후 사명대사에 의해 다시 수습되고, 또 서산대사의 명에 따라 한 함은 태백산 보현사에, 한 함은 통도사에 안치토록 하였다. 그러나 전란과 사명대사의 입적으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치악산 각림사에 일시 봉안하였으나 현종 14년(1673) 5월 5일 이곳 용연사에 탑을 건조하고 봉안하게 된 것이다.
돌난간이 둘러진 구역 안에 마련된 계단은 널찍한 방형의 이중기단 위로 종모양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상층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신상(八部神像)을 돋을새김으로 조각하여 동서남북 사방팔방을 수호하게 하였으며, 하층기단에는 네 모서리마다 사천왕상(四天王像)을 1구씩 배치하였다. 이들 팔부신상과 사천왕상은 예리한 조각기법은 아니지만 섬세하고 균형을 이루어 단조로운 사리탑에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부가하고 있는데, 조선 후기에 유행했던 석조 예술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본보기가 되고 있다. 다만 도난의 우려가 있어 사천왕상 4구는 별도 보관 중이고 현재 현장에는 모조품이 배치되어 있다. 계단 주위를 두르는 석조 난간은 1934년에 세워진 것이다.
한편 용연사와 같이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사찰은 여러 곳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643년 신라의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석가모니의 사리(舍利)와 정골(頂骨)을 나누어 봉안한 5대 적멸보궁이 있다. 경남 양산 통도사,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적멸보궁이 이에 해당된다.(달성군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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