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산성(江華山城.사적 제132호.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문화재청 자료)
첨화루(서문)
연무당 옛터
강화산성 서문 건너편에 있는 연무당 옛터는 1876년 강화도조약이 최종 조인된 장소이다. 이곳에서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의해 우리나라는 부산,인천,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하였다.
강화석수문(江華石水門.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0호.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883)
강화읍의 중심부를 흐르는 동락천 위에 설치하였던 수문이다.
조선 숙종 37년(1711)에 강화산성의 내성을 쌓을 때 연결하여 처음
설치하였으나, 광무 4년(1900)에 갑곶 나루터의 통로로 삼기 위하여 개천 어구에 옮겼다. 그 뒤 1977년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길이는 18.2m이고 높이는 2.7m, 너비는 4.7m이다. 무지개 모양의 수문이 3개이며, 화강암을 다듬어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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