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포리 선착장 매표소
승용차 이용 : 서울 → 김포 → 강화진입 → 외포리 → 외포리 삼보해운 선착장 도착 → 승용차와 함께 카페리에 승선 → 석모도 → 보문사
대중교통 이용 : 강화 시외버스터미널로 오셔서 외포리 선착장까지 이동. 외포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석모도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외포리 - 석포리 카페리호
카페리호 승선 대기 자동차들
창건 당시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낙가산이라고 하고,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하여 보문사라 이름 짓고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산과 절의 이름이 모두 관세음보살을 상징하고 있어 보문사가 관음도량임은 창건의 역사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후 보문사를 창건한지 14년 만인 649년 석가모니 부처님과 미륵보살 등 스물 두 분의 석상을 바다에서 건져 올려 석굴 법당에 모신 나한전 조성 일화는 유명하며 기도의 영험을 많이 보여 신통굴로 불리기도 합니다.
나한전의 역사는 보문사의 역사와 함께 해 왔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습니다.
인천 강화도 서쪽의 석모도에 자리하고는 보문사는 양양 낙산사,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기도 도량입니다.
석모도 낙가산 중턱 눈썹바위 아래 마애 관세음보살님은 탁 트인 서해를 바라보며 중생들을 살펴주고 계십니다.
보문사는 나한전에서 24시간 스님들의 기도가 계속 이어지고 있어 누구나 언제든 기도 할 수 있는 나한도량으로 불자들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출처:보문사)
보문사 일주문
보문사석실(普門寺石室.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7호.인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1)
보문사에 있는 석굴사원으로, 나한상(羅漢像)을 모시는 나한전의 구실을 한다.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입구에 무지개 모양을 한 3개의
문을 만들고, 그 안에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마련하여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미륵 ·제화갈라보살, 나한상 등을 모셔두었다.
이 석불들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한 어부가 고기를 잡다가 그물에 걸린 돌덩이를 꿈에 나타난 대로 모셔 두었더니 큰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불상의 제작연대는 그처럼 오래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문화재청 자료)
나한전 조성 일화 : 신라 진덕왕 3년, 보문사 아랫마을 어부들은 여느 해와 다름없이 봄을 맞아 고기잡이에 나서느라 분주했다.
만선의 꿈에 부풀어 어부들이 바다에 그물을 쳤다가 올려보니 물고기는 보이지 않고 특이한 형상의 돌덩이가 22개나 그물에 걸려 있었다. 어부들이 자세히 들여다보니 돌덩이들은 사람 모습과 꼭 닮아있었다.
어부들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기이한 석상을 보고 놀랍고 두려운 생각이 들어 바다에 던져 넣고 배를 저어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 가서 고기를 잡기 시작했다.
한참만에 그물을 다시 걷어 올리자 아까 멀리 떨어진 곳에 던져버린 석상 22개가 그대로 다시 올라온 것이 닌가. 어부들은 매우 놀라 허둥지둥 그물과 석상들을 바다에 던져 버리고 서둘러 육지로 돌아와 버렸다.
그날 밤 어부들은 모두 똑같은 꿈을 꾸었는데, 맑은 얼굴에 훌륭한 풍모를 한 노스님이 나타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천축국(인도)으로부터 왔느니라. 나와 더불어 스물 두 성인이 돌배를 타고 이곳까지 왔는데 우리가 타고 온 돌배를 돌려보내고 물 속에 있다가 그대들의 그물을 따라 올라왔더니 두 번씩이나 우리들을 다시 물 속에 넣어 버리더구나.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부처님의 무진법문과 중생의 복락을 성취하는 길을 전하러 온 것이다.
그대들은 우리가 편히 쉴 수 있는 명산으로 안내해 주기 바라노라. 그 인연과 공덕은 후손들까지 길이 누리게 될 것이니라."
어부들은 새벽녘부터 일어나 간밤의 꿈 이야기를 하며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바다로 나가 어제 석상을 던져 버린 곳에 그물을 쳤다.
잠시 후 걷어올린 그물에는 어제의 그 석상 스물 두 체(體)가 그대로 따라 올라왔다.
어부들이 석상을 낙가산으로 옮기는데 보문사 석굴 앞에 이르니 석상이 무거워져서 꼼짝도 하지 않아 더 이상 앞으로 갈 수가 없게되자 이곳이 신령스러운 장소라고 생각했다. 이때 석굴 안에서는 경 읽는 소리가 나고 은은한 향이 밖으로 흘러 나오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더없이 편안한 마음을 느끼면서 굴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 스물 두 위의 석상을 좌대에 차례로 모셨다.
석가모니부처님과 좌우에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과 열 아홉분 나한님을 좌대에 모두 모시고 나니 굴 안은 엄숙하고 신비한 영기(靈氣)가 가득 찬 것처럼 느껴졌고, 마을사람들은 일제히 부처님 앞에 엎드려 거듭 절을 하고 예경을 올렸다.
그날 밤 꿈에 노스님이 다시 나타나 "그대들의 수고로 장차 무수한 중생들이 복을 빌어가게 될 것이다. 그대들에게 먼저 복을 줄 것이니 받은 복을 함부로 쓰지 말며 교만하거나 자만심을 버리라. 악하고 삿된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곧 복을 걷어들일 것이니라. 그리고 그대들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복덕을 갖춘 아들을 점지할 것이니라."
노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어부들에게 옥동자를 안겨 주고는 계속 말씀을 이었다.
"사람들은 이 노승을 빈두로존자라고 부른다네. 우리들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두 보살님을 함께 모시고 왔으니 나와 더불어 나머지 열 여덟 분은 모두 부처님의 수제자들이라네.”
어부들뿐만 아니라 보문사의 스님들도 같은 꿈을 꾸었으며 모두 그 신령스러움에 감탄하였다.(출처:보문사)
극락보전
와불전
삼성각
천인대 나한
오백나한상과 33관세음보살 사리탑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2005년에 조성된 사리탑은 목조 형식의 3층 석탑으로 탑신부 각 층에 11분씩 총 서른 세분의 관세음보살님이 각인되어있고 관세음보살님 위로 각각 용머리를 배치하고 옥개받침 부분에 처마도리와 서까래를 이중으로 내는 등 세세한 부분까지 표현하여 장엄하였습니다.
2, 3층에 난간대와 난간지석을 만들어 넣었고, 상륜부에는 앙화와 보륜, 보주 등 한국 석탑의 양식을 상당 부분 표현해낸 수작입니다.
33관음 사리탑의 뒷편을 둘러 감싸안듯 오백나한이 모셔져 있습니다.
나한이라 함은 아라한과를 증득한 존자를 말하며 열반경에 이르시기를 “아라한과(阿羅漢果)는 저 피안에 이르렀다고 이름하느니라. 아라한과는 무학(無學)의 법신(法身)이니, 계율과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의 지견(知見)이니라. 이 다섯가지로 인하여 저 언덕에 이를 수 있으므로 저 언덕에 이른다함이며, 저 언덕에 이르렀으므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태어나는 일이 없고 범행이 구족하고 할 일을 이미 마치었고 다시 생사를 받지 않는다 하느니라.” 라고 아라한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보문사의 오백나한 상은 오백분의 모습과 표정이 모두 달라 각각의 개성적인 모습을 자유분방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오백나한 봉안 불사가 지금도 진행되고 있습니다(출처:보문사)
마애관세음보살좌상은 극락보전 옆 계단을 따라 10여분을 올라가면 낙가산 중턱의 눈썹바위 아래에 새겨 모셔져 있습니다. 꽤나 가파른 길이라 계단은 지그재그 식으로 놓여 있습니다
눈썹 바위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해 바다의 경치는 장관입니다
(멀리 보이는 큰 섬은 대승도. 앞쪽의 작은 섬은 소승도)
연등과 때죽나무(Styrax japonica)의 꽃(꽤나 가파른 419계단길의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관세음보살님은 눈썹바위 아래의 바위면에 새겨 모셨는데, 눈썹바위가 마치 지붕처럼 돌출되어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관음부처님을 가려 주고 있는 형태입니다.
보문사마애석불좌상(普門寺磨崖石佛坐像.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9호. 인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산293)
금강산 표훈사의 주지인 이화응과 보문사 주지 배선주가 1928년 낙가산 중턱 일명 눈썹바위 암벽에 조각한 석불좌상으로, 높이 9.2m, 폭
3.3m이다.
머리에는 커다란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네모진 모습이다. 얼굴에 비해 코는 넓고 높으며, 귀는 투박하고
목은 매우 짧게 표현되었다. 옷은 각이 진 양 어깨를 감싸고 있으며, 가슴에는 큼직한 卍자무늬가 새겨져 있다. 손에는 깨끗한 물을 담은 병을
들고 연꽃무늬 대좌(臺座) 위에 앉아 있으며, 불신 뒤에는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있다.
이 불상은
문화재적인 가치보다는 성지(聖地)로서 더 중요시되고 있는데, 이 석불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찾는 여인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문화재청자료)
위의 사진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보입니다.
보문사가 관음 도량의 성지임을 가장 잘 상징하는 성보 문화재로서,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는 곳입니다. 특히나 눈썹 바위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해 바다의 경치는 장관입니다. 특히 일몰 경관이 아주 일품이어서 석모도의 일몰은 서해 최고의 낙조(落照)로 꼽히기도 합니다.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붉은 해와 노을을 쳐다보노라면 종종 그야말로 무아지경 불심(佛心)의 경지에 들곤 합니다.
마애관세음보살좌상은 극락보전 옆 계단을 따라 10여분을 올라가면 낙가산 중턱의 눈썹바위 아래에 새겨 모셔져 있습니다. 꽤나 가파른 길이라 계단은 지그재그 식으로 놓여 있습니다
중간쯤 오르다보면 계단 불사를 기념하는 관음성전 계단불사 공덕비'가 중간에 놓여 있습니다.
총 419개에 달하는 계단을 오르다 보면 제법 다리에 힘도 들고 허리가 뻣뻣해지기도 합니다. 이럴 때 ‘관세음보살‘을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외우면서 올라가노라면 어느새 관음보살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 입니다.
이 마애관음좌상은 1928년 배선주 주지스님이 보문사가 관음 성지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이화응(李華應)스님과 더불어 이곳에 새긴 것으로, 크기는 높이 920cm, 너비 330cm에 달하는 거상(巨像)입니다.
크기를 척수로 환산하면 높이 32척에 너비가 11척이 되는데, 이것은 곧 관음보살의 32응신(應身)과 11면(面)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님은 눈썹바위 아래의 바위면에 새겨 모셨는데, 눈썹바위가 마치 지붕처럼 돌출되어 있어 비바람으로부터 관음부처님을 가려 주고 있는 형태입니다.
관음좌상의 모습을 보면, 네모진 얼굴에 커다란 보관을 쓰고 두 손을 모아 정성스레 정병(淨甁)을 받쳐들고 연화대좌 위에 앉아 계십니다. 얼굴에 비해 다소 크게 느껴지는 코, 입, 귀는 투박하기는 하지만 서민적이라 보는 사람의 마음도 푸근해지며 정감이 갑니다. 또 부처님 얼굴에 빠짐없이 있기 마련인 백호(白毫)도 이마 사이에 솟아 있으며, 가슴에는 만(卍)'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불의(佛衣)는 양쪽 어깨를 모두 감싸도록 입는 통견(通肩)이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연화대좌 왼편에는 조불화응선사(造佛華應禪師)'가 그리고 그 반대편에는 화엄회상필부사왕중(華嚴會上八部四王衆)·나무화엄회상욕색제천중(南無華嚴會上欲色諸天衆)·화엄회상호법선신중(華嚴會上護法善神衆)' 등의 글씨가 세 줄로 새겨져 있다.
마애관세음보살은 비록 오래전에 조성되지는 않았지만 보문사가 관음 성지인 동시에 관음기도 도량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중요한 대·소사가 있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정성으로 기도 올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 하여 지금도 신도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인천광역시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출처:보문사)
사진출처 : 보문사의 보문사 풍경
일몰 경관이 아주 일품이어서 석모도의 일몰은 서해 최고의 낙조(落照)로 꼽히기도 합니다. 수평선 너머로 떨어지는 붉은 해와 노을을 쳐다보노라면 종종 그야말로 무아지경 불심(佛心)의 경지에 들곤 합니다.
보문사 홈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bomunsa.net/
불교TV 낙가산 보문사 바로가기
http://www.btn.co.kr/vod/vod_player.asp?PID=P381&DPID=37621&FSIZE=D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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