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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강화 광성보(江華 廣城堡)

노촌魯村 2013. 6. 9. 09:38

 

 



 

 

강화 광성보(江華 廣城堡.사적  제227호.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출처 : 문화재청) 

 

  

 어재연 장군

어재연(魚在淵) :  1823(순조23) ∼ 1871(고종8). 조선 후기의 무장. 본관은 함종. 자는 성우이며, 용인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7) 무과에 급제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66년 프랑스 로즈함대(프랑스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 (병인양요)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을 수비하였다. 이어 회령부사가 되어 북쪽 변경지방의 비적을 토벌 치안을 보함과 동시에 장시를 개설하는 등 변경무역을 활성화하였다.
1871년 미국 아세아 함대의 강화도 내침으로 신미양요가 발발하였다. 6월 1일 손돌목 포격사건이 발생 한미간에 최초의 군사충돌이 발발, 위급을 고하자 진무중군에 임명되어 광성보로 급파하여 6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보에 부임. 미군과 대치하였다.
6월 10일 미군은 강화도 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을 점령하였고 6월 11일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마지막으로 광성보 공략에 나섰다. 이때 광성보에 수자기를 게양하고 침공해 오는 미군을 격퇴할 태세를 취하였다. 미군은 광성보에 대한 수륙양면 작전을 개시, 해상에서는 함포사격, 지상에서는 야포사격으로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였다. 드디어 광성보로 돌입한 미군과 어재연군은 육박전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그는 임전 무퇴의 결의로 칼을 손에 잡고 적을 무찔렀고 대포알 10여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가 장열하게 전사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병조판서지삼군부사에 추증 되었으며 시호는 충장이다. 강화충렬사에 배향되었다.(출처:강화군청)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광성보에서 본 염하강(강화해협)

광성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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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성보에서 용두돈대(쌍충비.손돌목돈대) 가는 길


 

 

쌍충비

 

 

 

 

어재순(魚在淳) : 1826년(순조26) ∼ 1871(고종8). 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함종. 자는 성순. 용인의 아들이며 신미양요 때 진무중군으로 군숙한 재연의 아우이다.
그는 벼술길에 나가지 않고 홀로 대소가를 지키며 은거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신미양요가 발생, 형 재연이 진무중군이라는 막중한 중책을 지고 광성보에 농성하고 있다는 소식에 접하였다. 이에 분연히 궐기, 형을 따라 미군을 격퇴할 결심을 굳히며 백의종군을 선언하자 일가 친지들은 지금 강화도에는 전선(군함)이 바다를 메워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생사는 하늘에 달려있으니 적이 두려워서 어찌 나라를 구하는 일을 못하리까"라고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광성보로 달려갔다. 어재연장군이 아우 재순을 보고 "나는 궁향의 일개 포의에 불과한 몸이다. 너는 왕사로 죽는 나와는 다르다. 어찌 빨리 돌아가지 못하겠느냐?" 라고 꾸짖으니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는 일에는 신민이 하나라고 말하면서 일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형과 같이 칼을 빼어 들고 선두에서 미군과 육박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이에 정부는 그를 이조참의에 추중하고 백의충절을 기렸다. (출처: 강화군청)

신미(辛未) 순의총(殉義塚)

 

 

 


손돌목돈대 가는 길


 손돌목돈대에서 본 손돌목

손돌목 돈대 

 

손돌목 돈대에서 본 손돌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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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돈대 들어가는 길 

 

 

 

 

 

 

 

 


용두돈대에서 본 손돌목(남쪽에서 북쪽으로) 

용두돈대에서 본 손돌목(서쪽에서 동쪽으로)

용두돈대에서 본 손돌목(북쪽에서 남쪽으로)

용두돈대에서 본 손돌목의 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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