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고려궁지(江華 高麗宮址.사적 제133호. 인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관청리))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이 있었다.
39년동안 사용되었고 1270년 강화조약이 맺어져 다시 수도를 옮기면서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전쟁이 일어나면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했다. 조선
인조 9년에 옛 고려 궁터에 행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군에게 함락되었다. 그후 다시 강화유수부의 건물을 지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거의 불타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이 남아있다.
이 곳은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에 저항한 우리 민족의 자주정신과 국난
극복의 역사적 교훈을 안겨주는 곳이다(문화재청 자료)
강화유수부 동헌
유수부(留守府) :
유수(
조선 시대,
강화유수부 동헌(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보입니다)
이 건물은 강화 유수부의 동헌으로 오늘날의 군청과 같은 관아 건물이다. 조선 인조 16년(1638)에 유수 김신국이 개수하였으며, 영조 45년(1769)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顯允觀)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현재는 명위헌(明威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글씨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인 백하 윤순(尹淳)의 글씨라 한다. 이 건물의 규모는 정면 8칸, 측면3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1971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앞면 8칸, 옆면 3칸의 익공계 팔작기와지붕이다. 기단은 2중 장대석으로 조성되었으며, 기단위에는 네모꼴의 주초석을 놓고 네모 기둥을 세웠다. 내부의 바닥 중앙에는 대청마루가 깔려 있고, 동쪽의 한 칸은 바닥을 높인 마루가 있다. 이러한 양식은 일반적으로 정면 6∼7칸, 측면 4칸의 목조 주심포 구조에 팔작지붕의 장중한 체제를 갖춘 조선후기 관아건축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동헌에서는 매월 1일과 15일에 유수 이하 각관이 동서반으로 나뉘어 대청에서 인사를 치루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했으며, 각관이 부임하거나 영장(營長)들이 등청(登廳)할 때 교유서(敎諭書)를 받아들이는 영명(迎命)을 행했다고 한다.
동헌의 왼쪽에는 높은 석축으로 단을 조성한 고려 궁궐터로 전하는 건물지가 있고, 그 앞의 낮은 곳에는 이방청(吏房廳) 건물이 있다. 현재는 명위헌(明威軒)과 이관당(以寬堂)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당호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였던 백하 윤순이 쓴 것이다.(출처:강화도군청)
1769년(영조 45)에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顯允觀)이라 명명하였다. 현재는 명위헌(明威軒)과 이관당(以寬堂)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당호(堂號)는 송나라 미남궁체(米南宮體)를 잘 쓰는 당시(영조)의 명필이며 학자였던 윤순(尹淳:1680∼1741)의 필적이다.
정족산 사고 옛 모습
태백산 사고 옛 모습
내일의 어제 블로그 외규장각 의궤와 조선왕실 혼례 이야기(대구박물관 기획전) : 바로가기
http://blog.daum.net/bosar/13431965
강화동종(江華銅鍾. 사인비구 제작 동종-강화 동종思印比丘製作 銅鍾-江華 銅鍾 복원품)
사인비구 제작 동종-강화 동종(思印比丘製作 銅鍾-江華 銅鍾.보물 제11-8호.인천 강화군 하점면 강화대로 994-19 강화역사박물관)
사진 출처 : 문화재청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만들어진 조선시대 종이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이 종은 사인비구가 숙종 37년(1711)에 제조한 종으로, 높이 198㎝, 입지름 138㎝이다. 종 꼭대기에는 두마리 용이 좌우로 서로 얼굴을 맞대고 종을 매달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종 윗면은 반원 모양으로 둥글고, 어깨 부분에는 ㄱ자형의 턱을 만들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꽃잎을 세워 장식하여 어깨부분이 돌출되었던 것의 변형된 모습으로 보인다.
어깨에서 훨씬 떨어진 곳에 사각형 모양의 유곽이 4곳에 있는데, 그 안에는 9개씩의 연꽃으로 된 돌기가 있다. 몸통 중앙에는 굵은 2줄의 횡선을 둘러 상·하로 2등분 하였다. 횡선 아래로는 종 입구 바로 위에 꽃무늬를 새긴 넓은 띠가 있을 뿐, 다른 장식은 하지 않았으며,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글이 남아 있다.
이 종은 전통적인 고려 종의 양식이 퇴화하고, 조선 종의 새로운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종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문화재청 자료)
이방청 정문
이 건물은 조선 중기에 강화 유수부내 육방(六房)중의 하나인 이방청으로 조선 효종 5년(1654) 유수 정세규가 건립하여 관아로 사용하던 것을 정조 7년(1783)에 유수 김노진이 내부를 개수하고 괘홀당이란 당호를 게시하였다. 1945년 해방이후 지방법원(등기소) 사무실로 임시 사용한 적이 있으며, 1977년 강화 중요 국방 유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이방청은 1915년부터 1972년까지 등기소로 사용되다가 1973년에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95년에는 시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했다. 현재의 모습은 1977년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사업때 고려궁지와 함께 정비된 것이다.
강화유수부는 동헌과 이방청 이외에 많은 부속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정해당(靜海堂)은 1664년(현종 6) 동헌의 남쪽에 있었으며, 삼아(參衙)는 이방청의 동편에 있었는데 도사(都事)가 거처하던 곳으로 화재 때문에 없어졌다고 한다.
해구보장지관(海口保障之館)은 객사로 병자호란때 불타버린 것을 1638년에 다시 세웠고, 1731년(영조 7)에 다시 지었지만 무너진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향청은 향사당(鄕社堂)이라고 불렸는데, 이 건물은 지방인으로 구성된 행정고문격 인사들의 집결처였다.
형옥은 옥터라 부르는데 동헌의 남쪽에 있었다고 한다. 조선후기까지 형방으로 사용하였다가 일제강점기때에는 농산물검사소로 사용하였다. 진무영(鎭撫營)은 1684년(숙종 10)에 세운 건물로 강화유수가 무관병사들을 열병하는 곳으로 열무당(閱武堂)으로도 불렸다. 또한 연무당(鍊武堂)은 진무영이 좁아 1870년(고종 7)에 새로 지었는데 신열무당이라고도 했다. 그후 동소문 밖으로 옮겼는데 동교장(東敎場)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연무당은 1876년 굴욕적인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된 곳이기도 하다.
관청건물로는 이밖에 조선시대 중영과 중군의 숙소이며, 중대 배하군졸들의 본부였던 만하헌(挽河軒)과 어영청·금위영·훈련도감·어변청(御邊廳)·별효사청(別驍士廳) 등이 있었다. (출처:강화도군청)
이방청
이방청(클릭하시면 원본 크기의 사진이 보입니다)
'인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화 삼랑성(강화 三郞城) 및 양헌수승전비(梁憲洙勝戰碑) (0) | 2013.06.29 |
---|---|
전등사 철종(傳燈寺 鐵鍾) (0) | 2013.06.11 |
보문사(普門寺) (0) | 2013.06.10 |
강화 초지진(江華 草芝鎭) (0) | 2013.06.09 |
강화 광성보(江華 廣城堡) (0) | 2013.06.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