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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반구대(盤龜臺)

노촌魯村 2013. 8. 6.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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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盤龜臺) :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 234-1

반구대(盤龜臺)는 언양읍 대곡리의 사연호 끝머리에 층을 이룬 바위 모양이 마치 거북이 넙죽 엎드린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반구산(265m)의 끝자락이 뻗어내려와 우뚝 멎은 곳에 테라스처럼 층층이 쌓인 점판암으로 형성된 기암절벽이 솟아있고, 돌틈새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와 그아래를 굽이쳐 흐르는 대곡천(大谷川)의 맑은 물이 절묘하게 뒤섞여 한폭의 진경산수화를 연출한다.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 선생이 언양에 유배되었을 때 반구대를 자주 찾아 천혜의 절경을 즐기며 귀양살이의 괴로움을 달랬다 하여 ‘포은대(圃隱臺)’라 불리기도 한다.
반구대 인근에는 선사시대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국보제285호 반구대암각화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고, 약 1억년전에 형성된 공룡발자국과 신라화랑의 호연지기가 느껴지는 국보제147호 천전리각석이 산책로로 연계되어 역사체험공간으로 각광받고 있다.(출처 : 울산광역시청) 

 

 

 

 

 테라스처럼 층층이 쌓인 점판암으로 형성된 기암절벽에 盤龜라고 조각됨

반고서원유허비(盤皐書院遺墟碑.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3호.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00-1 외)

유허비란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석으로, 이 비는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1337~1392)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포은 선생은 고려 우왕 2년(1376) 성균관 대사성의 벼슬에 있으면서 중국 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려는 친원배명 외교정책에 반대하다가 이곳에서 1년가까이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 동안 반구대에 올라 "중양절감회(重陽節 感懷)"라는 시를 짓는 등 많은 자취를 남겼다. 그 후 지역인들은 선생을 추모하여 반구대를 "포은대"라 명명하기로 하였다.
숙종 38년(1712) 언양지역 유생들이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세 분을 추앙하여 반고서원을 세우고 제서하였다. 그러나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서원은 문을 닫게 되었다. 그 후 지역 유림들이 포은대영모비(1885), 포은실록대비(1890), 반고서원유허비실기(1901) 3기의 비석을 차례로 세웠으며, 1965년 현위치로 이전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重陽節 感懷(중양절 감회)

                                              정몽주

 

節序重陽亦暑消 중양의 절서가 되니 역시 더위는 사라지고

天高馬膩冷霜朝 하늘 높고 말은 살찌나 서리 내린 아침은 차네.

 

黍禾嚲嚲昇祥旭 곡식은 익어 늘어졌는데 좋은 아침 해 뜨고

鴻雁嗈嗈聽遠霄 기러기 짝지어 우는 소리 멀리서 들리네.

 

國泰民安時絶好 국태민안 하니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좋고

風調雨順歲豊饒 풍조우순 하니 해는 풍년들어 넉넉하네.

 

重陽把酒無量感 중양절에 술잔드니 더없이 좋은 감정이라

擊壤歌呼紫陌遙 도성의 길 멀리서 풍년가 노래 부르도다.

 

 

 

 

 

 

 

 

 

 

   

반구서원(盤龜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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