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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완주 송광사(完州 松廣寺)

노촌魯村 2013. 10. 27. 05:17

 

송광사일주문(松廣寺一株門.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호.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4-1)

송광사의 입구에 세워 속세와 불계의 경계역할을 하는 상징물인 일주문은 조선시대에 지은 것이다. 원래 지금의 위치에서 약 3㎞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인데, 절의 영역이 작아져서 순조 14년(1814)에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다가 1944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긴 것이다.
건물은 2개의 원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간결한 맞배지붕을 올렸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공포는 용 머리를 조각하는 등 조선 중기 이후의 화려한 장식적 수법을 엿볼 수 있다. 기둥의 앞뒤로 연꽃무늬를 장식한 보조기둥을 세워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앞면 중앙에는 ‘종남산송광사(終南山松廣寺)’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송광사 일주문은 전체적인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단정하고 원숙한 비례감을 느끼게 하는 조선 중기의 일주문이다(출처: 문화재청)

 

송광사금강문 (松廣寺金剛門.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3호.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2외 1필지 )

송광사 금강문은 금강역사를 모시는 문으로 일주문 다음에 있는 문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붕 천장을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고,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 천장이다. 앞면 3칸 중에 가운데칸이 출입구이고, 양 옆칸에는 금강역사와 사자·코끼리를 타고 있는 동자상 2구씩을 배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금강문은 새날개 모양으로 장식된 익공양식의 공포와 지붕 옆모습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어 규모도 작고 화려하지 않다. 그러나 이 건물은 다포계 팔작지붕으로 처리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출처:문화재청)

 

 

 

 

 

완주 송광사 소조사천왕상 (完州 松廣寺 塑造四天王像.보물  제1255호.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흥리 569 송광사)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동·서·남·북의 사천국(四天國)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다. 대웅전을 향하여 오른쪽에는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이, 왼쪽에는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과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이 위치하고 있다.
송광사의 동방 지국천왕상은 오른쪽 팔꿈치를 높이 쳐들어 칼을 잡고, 왼손은 엄지와 검지를 길게 펴서 칼끝을 잡으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왼쪽다리 옆의 악귀는 상의를 벗고 오른쪽 어깨로부터 굵은 끈을 왼쪽 옆구리에 걸쳤으며 바지를 입고 있다. 
북방 다문천왕상은 양손으로 비파를 들고 있으며 지상에서 약간 들어올린 왼쪽다리를 악귀가 오른손으로 받쳐들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다. 악귀는 상투 장식에 눈이 심하게 튀어 나오고 주먹코에 광대뼈가 튀어나와 입체감을 나타낸다.
남방 증장천왕상은 왼손에는 보주를 잡고 오른손으로 용을 움켜쥐고 있는데, 용은 입을 벌리고 천왕상의 얼굴을 향해 치솟고 있으며 꼬리는 팔뚝을 한번 휘감으며 올라가고 있다. 악귀는 꽃장식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는데, 발등의 근육과 발톱까지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서방 광목천왕상은 오른손을 들어 깃발을 잡고 있는데 깃발은 뒤로 휘어졌다. 왼팔은 거의 어깨까지 올려 손바닥 위에 보탑을 올려 놓았다. 다리 아래의 악귀는 측면을 향하고 있는 다른 악귀에 비해 정면을 향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서방 광목천왕상 왼쪽 머리끝 뒷면에는 조선 인조 27년(1649)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는 글이 있으며, 왼손에 얹어 놓은 보탑 밑면에는 정조 10년(1786)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이 사천왕상은 제작연대가 확실하고 병자호란 이후 국난극복의 강한 의지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천왕상이 지녀야 할 분노상, 용맹상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어 돋보이는 작품이다. (출처:문화재청)

 

 

 

 

 

 

 

완주 송광사 종루 (完州 松廣寺 鍾樓.보물  제1244호.전북 완주군  소양면 송광수만로 255-16, 송광사 (대흥리))

종을 달아 놓은 종루는 십자각을 가리키는 말이다. 십자각은 열 십(十)자 모양을 하는 2층형 누각이다. 종이 걸려 있는 중앙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각각 1칸씩 덧붙여 이루는 모양인데, 지붕 역시 중앙에서 모아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가운데 칸에는 종을 두고 목어·북·운판은 돌출된 칸에 각각 보관되어 있다. 마루 밑의 기둥들은 원형기둥과 사각기둥이 섞여 있으며, 위에 기둥들은 모두 원형기둥을 세워 놓았다.
조선시대의 유일한 열 십(十)자형 2층 누각으로 그 가치가 크다(출처:문화재청)

 

 

 

 

 

송광사동종 (松廣寺銅鐘.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8호) 

조선시대 만들어진 높이 107㎝, 입 지름 73㎝의 종이다.
종을 메다는 고리는 용이 여의주를 갖고 있는 형상이며, 옆으로 소리 울림을 도와 주는 음통이 있다. 종 윗부분에는 꽃무늬로 띠를 두르고, 아래 구슬 모양의 돌기가 한 줄 돌려 있다. 밑으로는 8개의 원을 양각하여 그 안에 범자를 새겨 넣었다.
몸통의 중심에는 머리 뒤에 둥근 광배를 두르고 보관을 쓴 보살 입상과 전패(殿牌)가 있고, 보살 입상 사이에는 사각의 유곽을 배치하였다. 유곽 안에는 9개의 꽃무늬로 된 유두가 있다. 종의 가장 아랫부분에는 덩굴무늬를 두르고 있다.
동종에 씌여있는 글을 통해 숙종 42년(1716) 광주 무등산 증심사에서 만들어졌으며, 그 뒤 영조 45년(1769)에 보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 문화재청)

 

 

완주 송광사 대웅전 (完州 松廣寺 大雄殿.보물  제1243호. 전북 완주군  소양면 송광수만로 255-16, 송광사 (대흥리))

송광사는 통일신라 경문왕 7년(867)에 도의가 처음으로 세운 절이다. 그 뒤 폐허가 되어가던 것을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가 제자를 시켜서 그 자리에 절을 지으려고 했지만, 오랫동안 짓지 못하다가 광해군 14년(1622) 응호·승명·운정·덕림·득순·홍신 등이 지었다고 한다. 이후로도 인조 14년(1636)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절의 확장공사가 있었고 큰 절로 번창하였다.
대웅전은 절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기록에 따르면 조선 인조 14년(1636)에 벽암국사가 다시 짓고, 철종 8년(1857)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완성하였다고 한다.
앞면 5칸·옆면 3칸 규모에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대웅전·의창군서’라고 쓰인 현판도 있는데, 의창군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이다. 인조 14년(1636)에 세운 송광사개창비의 글도 의창군이 썼다. 현판은 이때에 쓴 것으로 보이는데 대웅전을 세운 시기를 아는데도 참고가 되고 있다. 다른 건물에 비하여 가운데 칸이 비교적 좁고, 문 위 벽면에 그림을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건물 안쪽에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여래와 약사여래를 함께 모셔 놓았다. (출처:문화재청)

 

  

 

 

   

 

 

 

 

    

 

 

 

 

 

 

완주 송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복장유물 (完州 松廣寺 塑造釋迦如來三佛坐像 및 腹藏遺物.보물  제1274호)

송광사에 모셔져 있는 이 삼불좌상은 본존불인 석가불을 중앙에 안치하고, 오른쪽에는 아미타불, 왼쪽에 약사불을 배치하고 있다. 무량사 소조아미타불상(5.4m)과 함께 가장 거대한 소조불상(5m)으로, 신체 각 부분이 비교적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작품이다.
장중하고 원만한 얼굴과 두껍게 처리한 옷은 당당한 불상양식에 걸맞는 표현기법을 보여준다.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 표현은 강한 인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대적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존불에서는 삼불의 조성기와『묘법연화경』을 비롯한 불경류, 후령통(喉鈴筒) 등 다수의 복장품이 발견되었다.『조성기』에 의하면 숭정 14년(인조 5년,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의 연호를 함께 사용하고 있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당시의 극심한 혼란기를 극복하기 위한 국난극복의 의지와 역사의식의 반영과 함께 당시의 문화적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불상은 만든 연대가 확실하고 역사 의식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귀중한 자료로, 불상과 함께 복장유물 12종 중 불상조성기 3점과 후령통 3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출처:문화재청)

 

 사진출처:문화재청

 사진출처:문화재청

 사진출처:문화재청

사진출처:문화재청

 송광사목조삼전패 (松廣寺木造三殿牌.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0호 )

대웅전 삼존불 사이 앞쪽에 있는 나무로 만든 3점의 패(牌)이다. 전체적인 만든 방법과 형태는 같으나 부분적으로는 차이를 보인다.
그중 하나는 높이 2.28m로 앞면에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씨가 있고, 뒷면에는 조선 16대 왕인 인조 때 조성된 것이란 제작연대가 있다. 다른 2점은 높이가 2.08m로 같으며, 뒷면에 정조 16년(1792)에 수리하였음을 검은 글씨로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보살의 명칭을 적은 다른 위패들과는 달리 왕, 왕비, 세자로 조성한 2m가 넘는 대작이다. 여러 장의 목판을 엮어서 만든 것으로 구름과 용을 뚫어새긴 것이 특징이다.
조각이 정교하고 크기가 크며, 조성된 연대와 수리한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으로, 대다수 연대를 알 수 없는 불교 목공예의 시기을 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이다.(출처:문화재청)

 

    

송광사나한전 (松廣寺羅漢殿.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    

송광사 나한전은 효종 7년(1656) 벽암 각성대사가 송광사를 다시 지을 때 같이 지은 것이며, 전체적인 모습으로 볼 때 현재 건물은 20세기 초를 전후로 고친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옆면 지붕선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또한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되어있다. 천장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짜맞추어 천장 윗부분을 가리게 꾸민 우물천장이다.
내부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6나한과 오백나한·인왕상·동자상·사자상을 모시고 있다.

 

 송광사오백나한전목조석가여래삼존상및권속상일괄(松廣寺五百羅漢殿木造釋泇如來三尊像및眷屬像一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69호)

전라남도 완주군 소양면 송광사(松廣寺)의 나한전에 모셔진 불상으로, 삼존상 3구, 16나한상, 500나한상, 제석상 1구, 동자상 2구, 인왕상 2구, 사자상 2구 등 모두 526구이다.
본존불은 나무로 만든 연꽃무늬 대좌(臺座) 위에 놓여 있는데, 얼굴은 원만한 편이며 양쪽 귀는 짧게 표현되어 있다. 정제된 얼굴 표현에서는 근엄함과 자비로움이 느껴진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옷에는 두꺼운 옷주름이 새겨져 있고, 왼쪽 어깨에서 내려진 옷주름은 왼쪽 팔에 걸쳐 무릎을 덮고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가볍게 얹어놓았고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이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 협시보살, 나한상, 인왕상, 동자상 등이 배치되어 있다. 최근에 발견된 기록에 의해 조선 효종 7년(1656)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500나한상 중 일부는 후에 다시 석고로 틀을 만들어 새로 복원한 것이다. 본존불을 비롯하여 나한전 내의 불상들은 비교적 작품성이 뛰어난 귀중한 자료이다. (출처: 문화재청)

 

 

 

 

지장전 

 

 

 

 삼성각